고 이소룡 주연의 <정무문>, <용쟁호투>에서 스턴트 배우로 활동하던 성룡은 70년대 중반부터 무협영화에 주연으로 출연했지만 당시만 해도 성룡은 차고 넘치는 '이소룡의 아류' 중 한 명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던 1978년, 성룡은 기존의 무술영화에 '코믹'이라는 양념을 뿌린 영화 <취권>을 선보이며 일약 이소룡의 뒤를 잇는 '아시아의 액션스타'로 떠올랐고 90년대 중반 미국시장까지 진출하며 종횡무진 활약했다.

대부분의 영화들이 '코믹액션' 장르인 성룡은 지난 2004년 <폴리스스토리>의 5번째 이야기인 <뉴 폴리스스토리>를 선보였다. 하지만 <뉴 폴리스스토리>는 기존 <폴리스스토리> 시리즈와 스토리나 설정이 전혀 이어지지 않는 별개의 영화였고 웃음코드도 거의 없었다(심지어 주인공 이름도 '진가구'가 아닌 진국영이었다). <뉴 폴리스스토리>는 성룡의 이질적인 캐릭터 때문에 중국과 홍콩을 제외한 대부분의 나라에서 흥행 실패했다.

이처럼 배우나 감독들은 평소 관객들이 가지고 있는 이미지와는 전혀 다른 장르의 영화에 출연하거나 연출하면서 새로운 도전에 나설 때가 있다. 1990년대 후반부터 다양하고 독창적인 영화들을 꾸준히 만들며 '충무로의 재담꾼'으로 불린 장진 감독도 지난 2006년 국내에서 그 인기가 시들었던 '조폭영화'에 도전하며 관객들을 놀라게 했다. 지금은 '1억 배우'가 된 류승룡의 첫 주연작이기도 한 영화 <거룩한 계보>였다.
 
 <거룩한 계보>는 다양한 장르의 영화를 본인만의 스타일로 만들었던 장진 감독이 처음으로 만든 조폭물이었다.
<거룩한 계보>는 다양한 장르의 영화를 본인만의 스타일로 만들었던 장진 감독이 처음으로 만든 조폭물이었다.CJ ENM
 
평소 이미지 깬 감독과 배우들의 변신

사실 극장을 찾는 관객들만큼 변덕스럽고 입맛을 맞추기 힘든 존재도 드물다. 관객들에게 사랑 받았던 검증된 이미지의 연기를 보여주면 '변신을 두려워한다'고 비판하고 과감한 변신을 시도하면 '그냥 하던 거나 잘하지'라며 차가운 시선을 보내기도 한다. 하지만 배우와 감독들은 자신의 예술적 만족을 위해, 그리고 때로는 변덕스런 관객들의 요구에 부합하기 위해 끊임없이 변신에 대해 고민하고 새로운 시도를 한다.

<죠스>와 <인디아나 존스>, <E.T>를 만들며 할리우드 최고의 상업영화 감독으로 군림하던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은 한창 전성기를 달리던 1985년 '뜬금없이' 흑인문제를 다룬 신작 <컬러 퍼플>을 선보였다. 스필버그 감독이 아카데미 시상식을 노리고 만들었다고 알려진 <컬러 퍼플>은 1986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11개 부문 후보에 이름을 올렸다. 하지만 <컬러 퍼플>은 7관왕을 차지한 <아웃 오브 아프리카>에 밀려 무관에 그치고 말았다.

<마스크>와 <덤 앤 더머>,<트루먼쇼>,<브루스 올마이티> 등 많은 히트작을 거느린 할리우드 최고의 코미디 배우 짐 캐리는 2004년 정통 멜로 <이터널 선샤인>에 출연했다. 코미디 배우 짐 캐리가 조용하고 내성적인 캐릭터를 연기한 최초의 영화였던 <이터널 선샤인>은 2000만 달러의 제작비로 7400만 달러의 수익을 올렸고 국내에서도 2015년 재개봉 관객으로만 50만을 돌파했다(박스오피스 모조, 영화관입장권 통합전산망 기준).

데뷔작 <조용한 가족>과 두 번째 영화 <반칙왕>을 통해 뛰어난 감각의 코미디 감독으로 이름을 알리던 김지운 감독은 2003년 자신의 세 번째 장편영화로 공포영화 <장화, 홍련>을 선택했다. <장화, 홍련>은 개봉 20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한국의 대표적인 웰메이드 공포영화로 꼽힌다. 또한 <장화, 홍련>을 통해 영화에서 크게 두각을 나타내지 못하던 염정아라는 배우가 재발견됐고 임수정과 문근영이라는 걸출한 신예 여성배우를 둘이나 배출했다. 

<취화선>을 시작으로 <연애소설>,<클래식>,<첫사랑 사수 궐기대회>,<내 머리 속의 지우개> 등 초창기 손예진은 '첫사랑'과 '청순가련'의 이미지가 매우 강했다. 그런 손예진에게 2005년에 개봉했던 코미디영화 <작업의 정석>은 그 동안 대중들이 좋아했던 손예진의 이미지를 깨는 과감한 변신이었다. 하지만 손예진은 <작업의 정석>을 성공으로 이끌었고 <장업의 정석>은 오늘날 '전천후 배우' 손예진을 있게 한 초석이 됐다.

독특한 감성의 '장진 조폭영화'
 
 서른을 훌쩍 넘긴 나이에 영화에 데뷔한 류승룡(왼쪽)은 <거룩한 계보>를 통해 처음으로 주연을 맡았다.
서른을 훌쩍 넘긴 나이에 영화에 데뷔한 류승룡(왼쪽)은 <거룩한 계보>를 통해 처음으로 주연을 맡았다.CJ ENM
 
대중예술을 하는 사람에게 있어 이름이 장르가 되는 것만큼 영광스런 수식어도 드물다. 현재 한국 영화에서는 봉준호 감독과 박찬욱 감독 정도가 '이름이 장르'라는 수식어를 듣고 있다. 하지만 2000년대 중반까지는 '장진식 코미디, '장진식 멜로'라는 수식어가 있었을 정도로 장진 감독의 이름 자체가 곧 장르로 불리던 시절이 있었다. 그만큼 장진 감독의 영화에는 기존의 정형화된 틀로는 표현할 수 없는 독특한 스타일이 있었다는 뜻이다.

영화 <거룩한 계보>는 '장진식 조폭물' 정도로 부를 수 있는 영화다. 영화의 설정은 2000년대 초반 극장가에 우후죽순처럼 쏟아졌던 조폭 코미디의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그 진행 방식은 기존의 조폭 코미디보다는 장진 감독의 다른 영화들과 더 비슷하다. <거룩한 계보>에서는 재소자들이 다양한 방법을 통해 탈옥을 모색하지만 조직에게 배신 당하고 복수하려는 동치성(정재영 분)과 정순탄(류승룡 분)을 제외하면 비장한 목적이 있는 인물은 없다.

물론 1980년대 젊은 남성관객들의 가슴을 뜨겁게 했던 홍콩의 대표 누아르 영화 <영웅본색>이나 <첩혈쌍웅>과 비교하면 <거룩한 계보>는 중간중간 흐름을 깨는 어색한 부분이 적지 않다. 특히 전투기가 추락하면서 교도소의 외벽이 무너지고 이를 통해 재소자들이 탈옥에 성공하는 장면은 황당하기 그지 없다. 하지만 이렇게 정돈되지 않은 불균형조차도 장진 감독의 영화들에서 심심찮게 볼 수 있는 고유의 색깔 중 하나다. 

<거룩한 계보>는 2004년 <아는 여자>를 통해 뒤늦게 영화에 데뷔한 류승룡이 처음으로 주연을 맡은 작품이기도 하다. <거룩한 계보>의 정순탄은 조직의 지시로 살인을 저지르고 사형수가 됐다가 교도소에서 절친 치성을 만난 후 탈옥을 한다. 영화 후반부에 로버트 프로스트의 시를 인용한 대사이자 영화의 포스터에도 나오는 명대사 "니는 밀어붙여, 나는 퍼부을랑께!"를 시전한 배우 역시 류승룡이었다.

추석연휴가 끝난 2006년10월에 개봉한 <거룩한 계보>는 독특한 조폭영화라는 평가 속에 전국 174만 관객을 동원했지만 손익분기점이었던 200만 관객에는 아쉽게 미치지 못했다. 그 후 장진 감독은 2009년에 개봉한 <미스터 프레지던트>로 255만 관객을 모으며 다시 흥행감독이 됐지만 2010년대 들어 <퀴즈왕>,<로맨틱 헤븐>,<하이힐>,<우리는 형제입니다>가 차례로 흥행 실패하면서 현재 10년 가까이 신작을 선보이지 못하고 있다.

류승룡의 주연 등극으로 희생(?)된 정준호
 
 <거룩한 계보>에 출연한 배우들 중 가장 이름값이 높았던 정준호는 영화에서 가장 많은 분량을 가져가진 못했다.
<거룩한 계보>에 출연한 배우들 중 가장 이름값이 높았던 정준호는 영화에서 가장 많은 분량을 가져가진 못했다.CJ ENM
 
류승룡이 주연으로 입지가 상승하면서 본의 아니게 희생을 했던 배우가 포스터에서 정재영과 함께 투톱 주연처럼 나오는 김주중 역의 정준호였다. <두사부일체>와 <가문의 영광>,<공공의 적2>,<투사부일체>를 연속으로 히트시킨 정준호는 영화 속 멋진 장면들을 정재영과 류승룡에게 양보하고 한 발 물러나 준주연 역할에 만족했다. 그래도 최종보스 김영희(민지환 분)를 처리하며 복수를 마무리한 인물은 바로 정준호가 연기한 김주중이었다.

동치성과 정순탄, 김주중이 속했던 폭력조직의 두목 김영희는 조직을 수월하게 운영하기 위해 조직원들을 이용하는 비열한 우두머리다. 과거에는 정순탄에게 살인을 지시한 후 팽했고 동치성 역시 같은 방법으로 배신했다. 결국 김영희는 탈옥한 동치성에게 쫓기다 또 다른 부하인 김주중의 총에 맞아 최후를 맞는다. 김영희 역은 드라마 <제4공화국>과 <제5공화국>에서 모두 전 수도경비사령관 고 윤필용을 연기했던 민지환 배우가 맡았다.

장진 감독은 자신의 초기작에서 여자 주인공 캐릭터의 이름을 '화이'라고 지었고 제작과 각본에 참여했던 <웰컴 투 동막골>부터는 여자주인공 이름을 '여일'로 바꿨다(하지만 정작 멜로 영화 <아는 여자>에서는 이나영이 연기한 여자주인공 이름이 '이연'이었다). <거룩한 계보>는 장진 감독의 영화 중에서 화이와 여일이 모두 등장한 유일한 영화인데 화이는 서울예대 시절 '대학로 이영애'로 불리던 장영남이, 여일은 아역배우 출신 윤유선이 연기했다.

<거룩한 계보>에서는 최근 <더 글로리>에서 고위직 비리경찰 신영준, <사냥개들>에서 최사장(허준호 분)의 오른팔 황양준을 연기하며 시청자들에게 더욱 친숙해진 배우 이해영이 조검사 역으로 출연했다. 조검사는 동치성에게 조직의 배후를 진술하면 감형을 해주겠다며 회유하지만 조직과 두목 김영희에 대한 충성심이 강했던 동치성은 끝내 이를 거부한다. 결국 의리를 지킨 동치성은 모든 혐의를 뒤집어쓰고 7년 형을 선고 받는다.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영화 거룩한 계보 장진 감독 정재영 류승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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