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 스틸컷
롯데컬처웍스(주)롯데엔터테인먼트
03.
"아, 아파트 무너지면 안 되잖아요. 이거 하나뿐인데."
두 사람의 시작과 달리 영탁(이병헌 분)의 등장은 꽤 극적인 부분이 있다. 1층에서 발생한 원인을 알 수 없는 폭발 이후 그는 모습을 드러내는데, 이 지점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의 등장에 계획적인 부분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해당 장면을 자신의 집으로 여겨지는 고층의 난간에서 지켜보고 있는 것도, 기다렸다는 듯이 소화기를 품에 안고 등장해 문제를 해결하는 것도 모두다. (그는 이후에 명화가 아파트에 몰래 숨어든 외부인을 도와주는 모습도 동일한 모양새로 지켜본다.) 이후 입주민 대표가 되어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모든 상황을 주도해 나가는 것이 전부 처음부터 그의 계획에 포함되어 있던 것이라고, 처음 입주민 대표로 추대되기 직전에 혼자 구석에 앉아 귤을 까먹으며 꺼벙한 표정으로 앉아 있던 것이 일종의 연기였다고 생각하면 무리가 있는 것일까.
이런 가정은 다소 지나치다 하더라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연단에 서 있는 영탁의 모습에 조금씩 사욕이 서리고 자신조차도 속일 수 있을 정도의 잘못된 믿음이 피어나는 것에는 틀림이 없다. 영화의 중반부에 등장하는 황궁 아파트의 잔치 장면은 그래서 중요하다. 그 사이에 드러나는 그의 실체와 별개로 혜원(박지후 분)을 소개한 이후 '아파트'를 열창하는 그의 모습은 영화가 처음으로 그의 욕망을 정면에서 비추는 장면이다. 날렵한 콧날을 기준으로 얼굴 양쪽의 한 면에 드리우는 그림자와 다른 한 면에 비추는 섬광, 그리고 아파트 외벽에 일렁이는 욕망의 그림자. 그의 존재는 욕망의 산본이라고 해도 틀리지 않으며, 이 공간의 곳곳에 그 욕망의 씨앗을 뿌리고 키워내는 인물에 가깝다.
그리고 그 시작은 아파트로부터 외부인들을 모두 몰아내기 위해 시도되는 첫 대결이 된다. 선두에 나서 아파트 단지를 떠나 달라는 영탁은 극심한 몸싸움 끝에 머리에 큰 부상을 입게 되고, 이는 그의 존재를 한층 더 부각시키는 상징적인 사건이자 순간으로 남는다. 다시 생각해도 그의 등장으로부터 모두의 신임을 얻기까지 걸린 시간이 그리 길지 않다.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그가 전쟁의 트로피를 움켜쥐고 모두가 환호하는 순간에, (영탁이 그랬던 것처럼) 명화가 홀로 그 장면을 멀찌감치 내려다보고 있다는 것이다.
04.
앞선 세 인물이 극의 최전방에 서 있다고 한다면, 부녀회장인 금애(김선영 분)는 수면 아래에서 이들을 교묘히 움직이는 인물에 속한다. 분량적인 면에 있어서는 모두의 앞에 나서서 스스로 이 아파트의 목소리를 자청하는 인물이지만 사실 결정적이고 위급한 상황에서는 큰 역할을 할 의지도 능력도 없는 인물이다. 처음 주민들이 모인 자리에서도 변죽만 울리고, 드림팰리스라는 이웃 아파트의 사람들을 모함하고 갈등을 조장하며 편 가르기를 주도하는 역할 밖에 해내지 못한다. 그녀에게 주어진 역할은 사람들의 시선이 아파트 단지의 바리케이트 너머로 향하지 않도록 만드는 것. 영탁이 내부에 욕망을 불러일으키는 인물이라면, 금애는 모두가 현실을 바라보지 못하게 현혹하는 쪽에 속한다.
외부인과의 첫 대결 이후 이어지는 아파트 정비 사업 주간 장면이 대표적이다. 영화 <설국열차>(2013)에 등장하는 메이슨(틸다 스윈튼 분)을 떠올리게 하는 그녀의 모습은, 실제로 그 인물의 이미지와 역할을 이어 내기라도 하듯이 선동가로서의 면모를 잘 보여주고 있다. 문제는 외면적으로 보이는 것과 달리 그녀의 내적 욕망은 지극히 개인적인 방향을 향해 있다는 것이다. 그녀는 전체의 상황이 자신의 의도와 다르게 나아갈 때마다 그 욕망을 제대로 억제하지 못하고 터뜨리는 모습을 보인다. 아파트 단지의 바리케이트를 기준으로 외부에서는 영탁이, 내부에서는 금애가 이 집단을 지휘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두 사람이 결정적인 차이가 바로 여기에 있다. 위험을 향해 직접 몸을 던지는 사람과 그렇지 않는 사람. 영화의 후반에서 '다들 이상하게 희망적이신 거 같다'며 비꼬는 혜원의 말에서 그녀 역시 비켜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