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김영삼 대통령 재임시절이던 지난 1995년, 고 노태우 전 대통령의 '수천 억 대 차명계좌 보유설'이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다. 아무리 나라를 좌지우지할 수 있는 권력의 정점에 있는 대통령이라 하더라도 수천 억 대의 비자금을 보유했다는 비현실적인 이야기는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도저히 믿을 수 없을 만큼 화당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이 거짓말 같은 이야기는 모두 사실이었다. 이후 정치권을 중심으로 노 전 대통령의 비자금에 대한 폭로와 증거제시가 이어졌고 궁지에 몰린 노 전 대통령은 1995년 10월 27일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 사저에서 기자회견을 가졌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노 전 대통령은 재임기간 5년 동안 기업인들로부터 약 5000억 원의 통치자금을 받아 사용했다고 밝히며 '대국민사과'를 했다.

결국 노태우 전 대통령은 그 해 11월 1일 전직 대통령으로는 최초로 검찰조사를 받고 보름 후 배임수뢰 혐의로 구속수감 됐다. 그리고 지난 1995년 겨울 전직 대통령의 비자금 사건을 풍자한 박중훈, 정선경 주연의 코미디 영화 <돈을 갖고 튀어라>가 개봉했다.
 
 김상진 감독의 장편데뷔작이었던 <돈을 갖고 튀어라>는 서울에서만 16만 관객을 동원하며 선전했다.

김상진 감독의 장편데뷔작이었던 <돈을 갖고 튀어라>는 서울에서만 16만 관객을 동원하며 선전했다. ⓒ (주)서우영화사

 
제목 같지만 내용은 전혀 다른 영화들

사실 <돈을 갖고 튀어라>는 지난 1969년 개봉했던 우디 앨런 감독이 연출과 주연을 모두 맡았던 영화와 제목이 같다. 1969년 작 <돈을 갖고 튀어라>는 우디 앨런 감독의 두 번째 장편 영화로 젊은 시절의 앨런 감독이 작정하고 웃기기 위해 만든 코미디 영화였다. 이처럼 영화에서는 내용이나 주제는 달라도 제목이 같은 영화가 개봉할 때가 종종 있다. 이는 관객들에게 적지 않은 혼란을 주지만 한편으로는 색다른 재미가 되기도 한다. 

지난 1945년 이탈리아의 고 로베르토 로셀리니 감독은 세계 2차 대전 시기의 로마를 배경으로 나치에 대항하는 이탈리아 저항조직 소속원들의 활동을 그린 영화 <무방비도시>를 만들었다. 로셀리니 감독의 <무방비도시>는 1946년 제1회 칸 영화제 경쟁 부문에 초청되기도 했다. 그리고 2008년에는 한국에서 손예진과 김명민이 출연한 <무방비도시>가 개봉했다. 한국영화 <무방비도시>는 소매치기와 형사의 이야기를 다룬 범죄드라마다.

1959년에 개봉한 고 빌리 와일더 감독의 <뜨거운 것이 좋아>는 <7년 만의 외출>,<왕자와 무희>와 함께 고 마릴린 먼로의 대표작이다. <뜨거운 것이 좋아>는 지난 2017년 BBC가 52개국 253명의 영화평론가들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 '역대 최고의 코미디 영화'에 선정되기도 했다. 그로부터 49년이 지난 2008년에는 한 집에 사는 세 여성의 연애담을 그린 이미숙과 김민희, 안소희 주연의 한국영화 <뜨거운 것이 좋아>가 개봉했다.

1997년 로베르토 베니니가 감독과 주연을 맡은 영화 <인생은 아름다워>는 26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까지도 '인생영화'로 꼽는 관객이 많은 명작영화다. 특히 자신을 보는 아들 앞에서 우스꽝스럽게 걸어가는 귀도의 마지막 모습은 많은 관객들을 눈물 짓게 했다. 그로부터 25년이 지난 2022년 한국에서는 류승룡과 염정아 주연의 뮤지컬영화 <인생은 아름다워>가 개봉해 100만 관객을 돌파하며 잔잔한 사랑을 받았다(영화관입장권 통합전산망 기준).

1992년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연출과 주연을 맡고 진 해크먼, 모건 프리먼 같은 대배우들이 출연한 서부영화 <용서받지 못한 자>는 이듬 해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과 감독상을 비롯한 4개 부문을 수상하며 작품성을 인정 받았다. 그리고 13년 후 중앙대 연극영화과에서 연출을 전공한 윤종빈 감독은 하정우가 출연한 한국 군대의 어두운 이면을 그린 문제작 <용서 받지 못한 자>를 선보였다.

'코미디 연기 장인' 박중훈의 원맨쇼
 
 사실 <돈을 갖고 튀어라>의 천달수는 여성을 구타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음주운전을 하는 등 도덕적으로는 최악의 인간에 가깝다.

사실 <돈을 갖고 튀어라>의 천달수는 여성을 구타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음주운전을 하는 등 도덕적으로는 최악의 인간에 가깝다. ⓒ (주)서우영화사

 
2015년 <쓰리 썸머 나잇>을 끝으로 8년째 신작을 선보이지 않고 있지만 김상진 감독은 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발표하는 작품마다 관객들의 많은 사랑을 받았던 충무로의 대표 흥행감독 중 한 명이었다. 특히 1999년 <주유소 습격사건>으로 230만, 2001년 <신라의 달밤>으로 서울 160만, 2002년<광복절특사>로 310만, 2004년 <귀신이 산다>로 289만 관객을 동원하며 4연속 흥행을 기록하기도 했다.

<돈을 갖고 튀어라>는 강우석 감독 밑에서 <미스터 맘마>,<투캅스>의 조감독,<마누라 죽이기>의 각본과 조감독을 역임했던 김상진 감독의 장편 데뷔작이다. 개봉 당시 한창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전직 대통령의 비자금 사건을 소재로 비자금 세탁 과정에서 2년 넘게 통장거래가 없었던 백수 천달수(박중훈 분)의 통장에 100억 원이 이체되면서 벌어지는 소동을 그린 코미디 영화다.

영화 속에서 천달수는 친구들의 예비군 훈련을 대신 나가고 용돈을 받으며 근근이 먹고 사는 백수다. 부모마저도 동네사람들에게 언급하기 꺼려 하는 부끄러운 아들이지만 전 정권의 요인들은 천달수를 베일에 싸인 '비밀요원' 정도로 추정한다(1년에 반 이상을 군복 차림으로 다니고 그 기간도 3~4일씩 계속됐기 때문). 

90년대 중반 한국영화는 과장을 조금 보태서 '박중훈이 나오는 영화와 박중훈이 나오지 않는 영화'로 구분할 수 있었다. 그만큼 한국영화의 원톱 배우였던 박중훈은 엄청난 겹치기 출연을 강행하며 충무로를 이끌었는데 <돈을 갖고 튀어라> 역시 박중훈이 한창 바쁠 때 찍었던 작품이다. 하지만 박중훈은 '코미디 연기의 장인'답게 <돈을 갖고 튀어라>에서도 엄청난 존재감을 발휘하며 영화 속에서 많은 웃음지분을 책임졌다.

굳이 뮤지컬영화가 아니더라도 영화에서 주인공이 직접 부르는 노래는 관객들에게 큰 울림을 줄 때가 있다. <가문의 영광>에서 김정은이 불렀던 <나 항상 그대를>이나 <후아유>에서 조승우가 불렀던 '통기타 메들리' 등이 대표적이다. <돈을 갖고 튀어라>에서도 정선경이 연기했던 은지가 나미의 <슬픈 인연>을 부르는 장면이 나오는데 정선경의 열창과는 별개로 다소 뜬금없는 선곡이었다는 평가가 지배적이었고 크게 화제가 되지도 못했다.

어설픈 신구 킬러 콤비의 티키타카
 
 <돈을 갖고 튀어라>에서 코믹연기를 선보였던 김승우는 이후 멜로전문배우로 이름을 날렸다.

<돈을 갖고 튀어라>에서 코믹연기를 선보였던 김승우는 이후 멜로전문배우로 이름을 날렸다. ⓒ (주)서우영화사

 
지금은 '동방우'라는 이름을 사용하고 있는 명계남은 80년대까지 연극배우로 활동하다가 1990년대 초·중반부터 영화로 활동범위를 넓혔다. <돈을 갖고 튀어라>에서는 전설적인 킬러 장하사를 연기했는데 장하사는 모두가 천달수를 특수요원으로 오해하고 있을 때 천달수가 백수임을 가장 먼저 눈치 챘다. 최종적으로 비자금 100억 원을 빼돌린 장하사는 영화 마지막에 달수와 은지 부부의 통장에 50억 원을 입금하는 의리를 보인다.

<장군의 아들>에서 김두한의 첫 번째 보스 쌍칼을 연기하며 관객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던 김승우는 군복무를 마친 후 <돈을 갖고 튀어라>에서 신인킬러 뱁새 역을 통해 처음으로 주연급 캐릭터를 맡았다. 뱁새는 <돈을 갖고 튀어라>의 은근한 개그 캐릭터로 장하사의 무용담을 줄줄 외우다가 "(스포츠처럼) 건전한 걸 물어보라"는 장하사의 일갈에 한국축구 대표팀 감독의 키와 프로야구 몸 맞는 공 기록 같은 의미 없는 질문을 던진다.

지난 2021년 tvN 드라마 <나빌레라>에서 발레리노를 꿈꾸는 70대 할아버지 역을 맡아 열연을 펼치며 많은 시청자들을 감동시켰던 박인환 배우는 <돈을 갖고 튀어라>에서 천달수의 아버지로 출연했다. 친구들의 예비군 대타나 하면서 세월을 보내는 아들을 한심하게 생각하고 혼을 내면서도 뱁새나 경찰이 찾아와 아들에 대해 물으면 엉뚱한 쪽으로 말을 돌리면서 아들을 보호하기 위해 노력한다.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영화 돈을 갖고 튀어라 김상진 감독 박중훈 정선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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