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재경> 스틸컷
인디그라운드
*주의! 이 글에는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01.
괜스레 마음이 헛헛하여 일이 손에 잡히지 않을 때가 있다. 날이 흐린 것도 아니고 끼니를 거른 것도 아닌데 속이 텅 빈 것 같은 기분. 외로움에 속하는 정서다. 외롭다는 감정은 홀로 된 이후에야 느낄 수 있는 마음이다. 누군가를 떠나보낸 이후에 그 빈자리의 공백을 크게 느끼게 될 때 조금씩 떠오르기 시작한다. 그가 내던 소리가 더 이상 들리지 않고, 그가 귀찮게 하던 행동이 이제 내 곁에 머물고 있지 않으며, 그로 인해 자신을 둘러싸고 있던 공기가 달라졌음을 피부로 느끼게 될 때.
영화 <재경>은 함께 지내던 이들을 모두 내보내고 난 뒤에 남겨진 이가 느끼게 되는 쓸쓸한 감정이 녹아 있는 작품이다. 시작은 아파트에 혼자 살고 있던 재경(고유준 분)에게 어느 날 갑자기 두 사람이 불쑥 찾아오면서부터다. 집을 구할 때까지 딱 일주일만 머물겠다고 했으면서 3주가 지나도록 나갈 생각을 하지 않는 아는 동생 성우(김용삼 분)와 남자친구와 싸우고 집을 나왔다는 친동생 지원(박지원 분)의 갑작스러운 방문. 전혀 미안한 기색도 없이 당연하다는 태도로 일관하는 두 사람의 모습에 재경은 화가 치밀어 오른다.
사사건건 싸우고 부딪히고 세 사람. 재경과 두 사람은 물론, 이 집에서 서로 처음 만난 성우와 지원 역시 서로 조금도 지려고 하지 않는다. 집주인 재경이 집을 비운 어느 날, 성우와 지원은 함께 빨래를 널다가 베란다에 갇히고 만다. 문을 열어 줄 사람은 아무도 없고, 오도 가도 못하는 상황에서 두 사람은 처음으로 제대로 된 대화를 하게 된다. 그리고 이 대화를 통해 극 중 인물 모두가 마음 한편에 커다란 공동(空洞)을 가진 이들이라는 것을 서로가 알게 된다.
02.
기본적으로 이 영화에서 가장 표면에 드러나는 것은 앞서 이야기했던 감정에 대한 것이다. 원하지 않았던 동거의 불편한 시간 이후 모두가 떠나간 자리에 홀로 남게 되는 재경의 감정이 중심에 놓이게 된다. 기능적으로만 냉정하게 말하자면 다른 두 인물의 역할은 이 감정의 콘트라스트를 극대화하기 위한 장치라고도 할 수 있다. 이 영화가 최종적으로 바라보고자 하는 자리 역시 과정이 아닌 결과에 있다는 뜻이다.
이와 같은 경우에서 작품이 감정을 드러내는 방식을 살펴보는 일은 필수적이다. 일반적으로 극 중 인물의 감정을 극대화하고 관객에게 전달하기 위해 감정선에 이목을 집중시키는 것과 달리 이 영화가 인물의 감정을 그려내는 방식은 주목하는 데 있지 않다. 외로움이라는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서 인물을 심리적으로 몰아붙이는 대신 처음부터 작품 전체를 소란스럽게 채워 넣는다. 세 인물의 모습이 조금 우스꽝스러우면서도 과격하게 그려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동생 지원의 아침 루틴이라는 클라리넷 소리도, 나갈 생각을 하지 않는 성우의 코 고는 소리도 모두 영화의 마지막 지점에서 누군가의 그리움이 될 대상들이다. 물론 이 사실을 처음부터 알 리 없는 관객들에게는 영화 초반부의 이 소음들은 그저 시끄럽게 여겨질 뿐이다.
주목하는 방식을 대신해 활용되는 것은 발굴과 굴채의 형식에 가깝다. 영화 전체를 가득 채우고 있던 소음, 함께 지내던 이들의 증거가 썰물이 빠져나가듯 모두 사라져 버리고 나면 그 공간을 대신해 채우는 갑작스러운 고요함과 적막함이 갯벌에 묻혀있던 어떤 것들처럼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이 방식은 관객의 경험적인 측면 역시 함께 고려된 부분이 있다. 영화의 청각적인 부분을 십분 활용한 것으로, 극 중 인물이 경험하는 동일한 상황을 관객 역시 함께 경험하며 잠깐이나마 스크린 밖으로 전이된 감정을 공유하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