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봇이 인간을 어설프게 닮을수록 불쾌감이 증가한다는 '불쾌한 골짜기' 이론. 아예 유사성을 느끼지 못하는 상태보다 불명확하게 발을 담근 정도에서 보다 왜곡된 심리 상태를 경험한다는 주장이다. 잠시 수단을 바꿔보자. 시각이 아닌 청각을 통해서도 같은 상황을 마주할 수 있을까. 적어도 대중음악에서는 그렇지 않은 듯하다. 난해한 구성과 연속된 소음, 기괴한 비주얼이 한데 모였음에도 누군가는 예술성을 느끼기 마련이다. 목격 행위가 주는 분명한 거북함이 있지만 동시에 청감으로 중화시키며 이해하려는 태도가 갖춰지기 때문이다.

아이슬란드 출신의 비요크는 위 주장에 누구보다 적합한 인물이다. 팝적인 요소를 담아 비교적 접근이 용이했던 데뷔작 < Debut >과 달리 < Post >와 < Homogenic >은 당시 시장에 큰 충격을 선물했다. 더욱 괴이하고, 때로는 무질서하며 가끔은 무서울 정도로 정돈된 전개를 엇갈아 놓자 거대한 세계관이 그려졌고, 듣는 이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그 한가운데로 옮겨져 몽환적인 순간을 체감했다.

어둠 속의 댄서

 비요크 < Vespertine >뮤직비디오 중 한 장면

비요크 < Vespertine >뮤직비디오 중 한 장면 ⓒ One Little Indian


세기말의 이유 모를 긴장감과 새천년을 고대하며 생겨난 수많은 혼란은 비요크를 향한 극적인 필터로 작용했고 이에 힘입어 2년 단위로 신보를 발매하던 그가 돌연 영화계로의 외도를 선언한 일은 분명 예상 밖의 행보였다. 당시 < 브레이킹 더 웨이브 >와 < 백치들 >로 평단의 호평을 받은 덴마크 출신 감독 라스 폰 트리에의 러브콜에 응한 것이다.

그렇게 탄생한 2000년 작 < 어둠 속의 댄서 >는 공장에서 일하며 홀로 아이를 키우는 셀마(비요크 분)의 끝없는 추락을 다룬 영화로, 오늘날 익히 알려진 촬영 과정에서의 심각한 마찰과 달리 높은 작품성을 인정받고 있다. 그해 열린 제53회 칸 영화제에서 작품은 황금종려상을, 비요크는 여우주연상을 받으며 연기에도 재능이 있음을 알렸고 이에 따라 앞으로 배우 활동에 전념할 것인지 귀추가 주목되던 상황. 그는 "영화를 위해선 목숨을 바칠 수 없지만 음악을 위해선 목숨을 바칠 수 있다"며 본업 복귀를 선언한다.

사실 음악계를 떠날 생각은 애초에 없었다. 정신적으로 매우 힘든 배역에 사운드트랙 작업까지 도맡아 지칠 대로 지친 그였지만 촬영 기간 새 앨범을 준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머지않아 남편으로 맞이할 미국의 현대 미술가 매튜 바니와 교제를 이어가며 그간 발매한 앨범에선 비중이 크지 않았던 '사랑'이란 감정을 탐구하기 시작한 것도 이 시기다.

우리의 밤은 당신의 낮보다 아름답다

앨범명 'Vespertine'은 땅거미가 지고 난 뒤의 형상을 의미한다. <어둠 속의 댄서>에서 비요크는 점차 시력을 잃어가는 유전병을 앓아 밤보단 낮을 선호하고 뮤지컬 단막보단 공장 소음에 익숙한 이방인 역을 분했는데, < Vespertine >은 이의 연장으로 제작된 동시에 의미적으로 상극에 위치한다. 밝은 낮보단 어두운 밤이 사랑에 어울리고 기계의 소음보단 애달픈 속삭임이 좋으며 사랑하는 이가 옆에 있어 결핍따윈 없는 모습을 표현한 것이다.

이렇듯 사랑과 성(性)을 주제로 육체와 영적 추상 간의 관계를 다룬 < Vespertine >은 전작의 마초적이고 적극적인 인상의 반대편에서 은밀하고 조심스럽게 인사를 건넨다. 물론 방식은 동일하다. 트립 합 사운드를 기반으로 실물 악기와 일렉트로니카의 극적인 조우를 담아낸 < Homogenic >처럼 합창단과 현악, 하프 연주 등 낭만주의적 요소와 전자 건반이나 타악 위주의 효과음을 깔끔히 융합한다. 고전적 오케스트레이션과 현대적 비트 프로그래밍의 아름다운 만남인 셈이다.

사랑은 누구에게나 조심스럽고 어렵다. 쟁취하려 달려들수록 명은 짧아지고 멀어지면 온도를 잃는다. 이상적인 방법은 적정 거리를 두고 절제와 침착을 유지하는 것. 매튜 바니와의 관계 속에서 깨달은 간단하고도 어려운 명제를 작품에 투영하기 위해 심장 박동이나 호흡과 유사한 박자를 기저에 두고 의도한 노이즈는 일상적 소음에 크게 지나지 않도록 설계한 뒤 속삭이듯 불안정한 보컬을 얹는다. 온전치 못한 가창이 거슬리지 않는 까닭이 어쩌면 그 자체로 우리네의 사랑과 닮아 있어서는 아닐지 생각해 본다.

확실한 시퀀스, 강약 조절의 승리

 비요크 < Vespertine >앨범 커버

비요크 < Vespertine >앨범 커버 ⓒ One Little Indian


'Cocoon'과 'Pagon poetry'의 뮤직비디오는 선뜻 권하기 쉽지 않지만 작품을 이해하는 데 분명 중추적 역할을 한다. 사랑에는 뜨겁게 타오르는 일면이 있는가 하면 곧 꺼질듯한 불씨의 희미한 연기 같은 모습도 존재한다. 나아가 모두가 쉬쉬하는 성(性)의 억눌림을 표출하는 것 또한 해당 감정을 다루는 중요한 방식일 터, 이에 위 두 곡의 에로티시즘은 주제 의식을 보다 강조하고 확장한다.

더구나 두 곡 사이를 잇는 'It's not up to you'가 수준 높은 프로그래밍을 통해 꽉 찬 사운드스케이프로 후반부 합창의 위력을 뽐내며 대중성을 확보하니 이어지는 'Undo'의 우울함이 더욱 와닿는다. 끌어내린 분위기는 뒤따른 트랙 'Pagon poetry'가 나서 경사를 맞추고 어느덧 앨범의 허리에 도달하자 앰비언트 사운드가 압권인 연주곡 'Frosti'로 후반부를 맞이할 준비를 마친다.

종반에 다다르자 제재의 완성을 향한 질주가 시작된다. 불완전함 속에서도 평정심을 놓치지 않았던 보컬은 걷잡을 수 없이 폭발하고 생체 리듬에 가까웠던 박자는 의도적으로 만들어낸 글리치 사운드와 함께 제각각 방임된다. 억눌린 섹슈얼리티의 작발(炸發), 불씨의 소멸, 사랑의 완성이자 이별의 시작. 어떻게 바라볼 것인지는 온전히 듣는 이의 몫이다.

1993년 첫 앨범부터 1997년 < Homogenic >과 영화 작업까지 쉴 새 없이 달려온 그간의 여정과 닮아있는 아름다운 마무리다. 잔잔하게 시작해 멈출 줄 모르고 타올랐던 사랑은 앨범의 끝과 맞닿아 사라지고 연기의 형태로 여운만이 남는다.

직설적인 가사, 파격적인 선정성, 질서와 무질서의 경계를 지나 곧 물러섬과 비움으로의 귀결로 마무리된 < Vespertine >, 전자음악 장르와 여성 음악가의 계보를 넘어 대중음악사에 길이 남을 획은 이렇게 그어졌다. 펜도 아닌 붓으로 말이다.
명반 비요크 VESPERT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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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음악웹진 이즘(IZM)의 필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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