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1회 EBS 국제다큐영화제가 8월 19일부터 25일까지 열립니다. 32개국 53편에 달하는 다큐멘터리 작품 중 눈에 띄는 다큐를 소개합니다.[편집자말]

 제21회 EBS 국제다큐영화제 상영작 <없는 산> 스틸컷

제21회 EBS 국제다큐영화제 상영작 <없는 산> 스틸컷 ⓒ EBS국제다큐영화제


01.
<없는 산>
한국 / 2024 / 다큐멘터리
감독 : 정진아

정진아 감독의 다큐멘터리 <없는 산>은 정적이고 단일한 목소리로 이루어진 내래이션으로 이루어져 있다. 45년 만에 지구로 돌아온 외계인과 외계 생명체 연구자인 화자의 대화 속 자신의 목소리다. 단순한 대화만으로는 이 작품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정확히 따르기 어렵다. 누군가를 찾는 외계인의 여정에 함께하며 동두천 일대의 여러 공간을 비추기는 하지만 그것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까지는 드러내지 않고 있어서다. 오히려 이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시절의 증거처럼 제시되는 푸티지와 이미지다. 이 자료들은 가장된 대화의 의미 없는 발산을 제한하며 의도된 중의성으로부터 명확한 이야기 하나를 건져 올린다.

이 작품은 'UFO 연구 일지', '보건소에서', '기름 도깨비', '물의 가장자리', 그리고 '살아남기를 위한 호칭기도' 등 총 다섯 챕터로 구성돼 있다. 각각의 챕터는 작품 전체가 바라보고자 하는 자리의 분절에 해당하며 극 중 인물의 이동성에 따른 플롯을 완성하는 기능을 하기도 하고, 역사적으로는 시간의 선형성을 따르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각각의 챕터 속에는 하나의 장면에 대한 정확한 근거들이 제시된다. 두 번째 챕터인 '보건소에서'에서 작품 전체가 지칭하는 대상이 주기적으로 검사를 받은 흔적인 STD 검사의 개별 건강진단수첩이 스틸컷으로 보여주는 식이다.

작품의 대상이 되는 존재이자 극중 인물이 외계인과 함께 흔적을 좇아 따르는 대상을 정확히 밝히지 않고 의도 아래에 남겨두는 것은 재현에 가깝다. 존재가 당시에 겪어야만 했던 대우와 그런 상황 속에서도 숨을 죽인 채로 버틸 수밖에 없었을 처지를 가상의 이야기 속에서 다시 그려내는 것이다. 이에 대해 화자는 '저마다의 자리를 타고나는 것인지?', '물과 기름처럼 섞이지 않아 그 자리에 계속 머물게 되는 것인지?'와 같은 표현을 통해 드러낸다. 사회의 가장자리에 머물렀던 이들에 대한 묘사다.

다큐멘터리의 타이틀인 '없는 산'은 이야기의 마지막에서 제시되는 동두천 무연고 무덤가 상패산을 의미한다. 외계인을 따라 화자가 지나온 지금까지의 모든 여정의 끝이다. 이곳은 연고를 알 수 없는 미군 위안부들이 묻힌 자리다. 그리고 우리는 다시 이 작품의 이야기를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처음에 이야기했던 중의성의 한 꺼풀을 들춰낸 자리, 그 안에 여전히 머물고 있는 지나온 역사의 한 모습이다. 그제야 비로소 도깨비와 나눴던 화자의 모호한 언어가 정확한 모습으로 탈바꿈할 것이다.

"해가 떠오르면 우리는 두려워한다. 그것이 계속 떠 있지 않을까 봐. 해가 져도 두려워진다. 아침이 와도 떠오르지 않을까 봐."

그들 모두는 여기 네 문장의 시간 속에 갇힌 사람들이다.

 제21회 EBS 국제다큐영화제 상영작 <그날까지> 스틸컷

제21회 EBS 국제다큐영화제 상영작 <그날까지> 스틸컷 ⓒ EBS국제다큐영화제

02.

<그날까지>
일본 / 2024 / 다큐멘터리
감독 : 겐 마사유키

겐 마사유키(Gen Masayuki) 감독의 다큐멘터리 <그날까지>는 정확히 한 사람의 삶을 조명하는 작품이다. 그가 바라보는 인물은 화가이자 래퍼로 활동하고 있는 37살의 강춘혁. 세 번째 고난의 행군이 한창이던 1998년, 12살의 나이로 가족과 함께 두만강을 건넌 탈북민이다. 정확히 한국 땅을 밟은 건 16살이 되던 해였다. 북한으로 송환된 재일교포 출신의 조부모로 인해 북한에서 태어난 그의 삶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에는 감독 역시 재일교포 2세라는 배경이 있다. 세대는 다르지만, 이들은 민족의 가장자리에 함께 서 있다.

강춘혁이 관객들 앞에서 라이브드로잉을 선보이는 장면으로 이 작품 <그날까지>는 시작된다. 붓 하나를 들고 그림을 완성해가는 모습 뒤로 그가 직접 쓰고 부른 랩 'For the Freedom'이 흘러나온다. 자신이 어린 시절을 보낸 공간에 대한 비판과 겪어야만 했던 고난의 시간을 녹여낸 곡이다. 에둘러 돌아가지 않고 단번에 시각과 청각을 채우는 인물이 가진 여러 정체성의 총합은 오랜 시간을 지나 현재 완성된 강춘혁이라는 사람의 현재 모습을 오롯이 전달하는 데 성공한다.

현재의 모습이 되기까지 그가 겪어야 했던 시간은 그야말로 파란만장했다. 처음 10년의 시간 동안에는 주어지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해냈다. 자립을 위해 필요한 것들이었다. 자신을 표현하기 위해 필요한 부분을 찾기 시작한 것은 그 다음이었다. 검정고시를 통해 미대로 잘 알려진 H 대학의 회화과에 입학했고, 2014년에는 유명 힙합 오디션 프로그램에 출연해 탈북래퍼로도 이름을 알렸다. 마음에 품고 있는 메시지를 지금, 세상에 이야기할 수 있도록 토대를 만들어 준 소중한 시간이다.

그의 삶은 여전히 남과 북 경계에 있다. 하모니카 집들이 쭉 늘어서 있고, 멀지 않은 곳에 탄광이 보이고 항상 일본어로 대화를 나눴던 가족에 대한 기억. 남과 북은 하나이기에, 어떤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다시 통일을 이룩해야 한다던 북한에서의 사상과 달리 아무런 생각도 가지고 있지 않던 남한 사회에 대한 처음의 충격. 과거와 달리 자유롭게 자신의 생각을 담은 예술 활동을 할 수 있는 현재의 모습이 서로 엉킨 상태로 내재돼 있어서다. 춘혁씨의 작업 활동을 지켜봐 온 남성우 사진작가는 자신 또한 그에 대한 선입견을 가졌던 적이 있었지만, 그저 하나의 평범한 사람에 불과하다는 것을 이제 알고 있다고 말한다.

미술과 음악. 그의 모든 작품 세계 속에는 'Until the day', 그날까지라는 주제의식이 내포돼 있다. 지금은 분단되어 있는 남북이 원래의 모습대로 하나가 되는 날에 대한 소망이 담겨있는 메시지다. 아직은 요원해보이지만, 언젠가는 그의 꿈이 실현되는 날이 찾아오지 않을까. 그리고 이 소망은 그런 한 남자를 바라보고 있는 겐 마사유키 감독에게도 큰 의미를 갖는다. 뒤틀린 역사의 흐름으로 인해 가장자리로 밀려날 수 밖에 없었던 사람의 입장에서. 이제는 이국이 된 것만 같은 조국을 바라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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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숫자로 평가받지 않기를 바라며 글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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