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이 지(JAY-Z)의 'The Blueprint' 앨범 재킷amazon
둔탁하고 안정적인 드럼 비트와 담백한 래핑으로 겨루는 정직한 장르, 미국 동부를 대표하는 음악 올드스쿨 힙합은 2000년대 초반 음악 시장을 랩으로 뜨겁게 달구었다. 황금기 중간에 태어난 제이 지(JAY-Z)의 < The Blueprint >는 그 장점을 가장 잘 살린 작품으로, 제이 지를 이 시대 가장 강력한 힙합 아티스트 반열에 올렸다. 게다가 올해 한국을 방문하는 나스(Nas)와 예(구 칸예 웨스트), 올해 복귀한 에미넴(Eminem) 등 당대의 거대한 이름들과도 뗄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다.
걸작의 배경
제이 지의 배경과 가치관은 이 음반을 깊게 이해할 중요한 단서다. 브루클린 출신의 어린 제이 지, 숀 카터는 어려서부터 힙합 음악과 밀접했다. 뉴욕을 평정한 래퍼 비기(The Notorious B.I.G)나 버스타 라임즈(Busta Rhymes)와 친교한 그는 숱한 친구들처럼 거리 생활을 시작했고 여러 선배의 곡에 피처링하며 래퍼로서 활동을 시작했다.
독보적으로 돋보인 제이 지의 강점은 사업수완이다. 이례적으로 독립 회사를 설립해 발매한 데뷔작 < Reasonable Doubt >은 우수한 성적을 냈고, 라카펠라(Roc-A-Fella) 레코드는 그야말로 성공 가도를 달렸다.
그러나 진정한 업계의 인정과는 다소 먼 것도 사실이었다. 당시 뉴욕 힙합 신은 여전히 비기의 영향권 아래였고 < Illmatic >의 나스가 출중한 예술성을 인정받았으며, 대중성에 치중한 팝 랩 시장에서도 또 다른 힙합 영업왕 퍼프 대디, 넬리나 에미넴 등 걸출한 경쟁자도 여럿 있었다. 게다가 나스를 비롯한 타 힙합 아티스트와 주고받고 있었던 디스와 앨범 발매 직전 휘말린 소송 등으로 입지가 흔들거렸다. 모두가 공백의 왕좌에 호시탐탐 올라가려 하던 와중에 결정적인 한방이 필요했던 것이다.
익숙한, 그러나 새로운 힙합
그가 준비한 새로운 음반은 놀라운 사업 수완과 판매고로 대표되는 영리한 제이 지의 현재를 놓치지 않으면서도 청사진이라는 이름표에 맞게 힙합 음악의 미래라는 명분까지 담은 작품이어야 했다. 그가 가장 먼저 선택한 카드는 프로듀서 진의 급격한 세대교체. 스위즈 비츠나 디제이 프리미어 등 기존까지 함께 했던 탄탄한 비트메이커 라인업의 비중을 줄이고 당시 신인이었던 칸예 웨스트와 저스트 블레이즈를 중심에 투입해 변혁을 꾀한 것이다.
그렇게 탄생한 < The Blueprint >는 힙합의 뿌리와 가까우면서도 세련미를 갖춘 독특한 작품이다. 태초의 힙합이 어떠했는가, 디스코와 펑크(Funk) 음반을 기술적인 변형을 덧입혀 재생하는 중에 탄생한 아날로그-디지털 혼혈 음악이다. 상업성에만 몰두한다는 비판을 받던 제이 지는 이 음반에서 옛 소울 음악을 필두로 한 여러 명곡에서 추출한 샘플을 조합하고 그 위에 유려한 랩을 장식했다. 게다가 알 그린(Al Green), 나탈리 콜(Natalie Cole), 잭슨 파이브부터 도어스(The Doors)의 음악에 이르기까지, 시대와 장르를 가리지 않고 너른 입맛을 선보였다.
초창기 칸예 웨스트의 상징적인 작곡 기법인 '칩 멍크 소울'도 여기서 발현됐다. 소울 음악의 보컬 소스를 추출해 음역대를 높여 특유의 분위기를 형성하는 매력적인 장르다. 이를 활용한 'You don't know'나 옛 소울을 활용한 다른 곡들이 중앙에 자리하며 앨범을 단단하게 이끈다.
국내 힙합에서도 비슷한 작법을 활용한 가리온의 대표곡 '영순위'가 2010년 히트를 기록했고, 발매 후 20년이 넘게 지난 지금도 심심찮게 이 장르를 활용한 힙합 음악이 쏟아지는 걸 보면 제이 지가 그린 21세기 힙합의 설계도는 아직 유효한 것으로 보인다.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랩의 맛
깔끔한 프로듀싱도 중요하지만 어쨌든 마이크를 쥔 'MC'라면 랩으로 말하는 것이 이 세계의 법칙이다. 능란한 랩 실력 없이는 아메리카 대륙에서 래퍼로서 인정받을 수 없다는 뜻이다. 더군다나 서로 적개심을 표출하며 다투고 있다면 랩 음악은 곧 정당한 싸움의 무기다. 이 앨범에서 그는 힙합 역사에 남을 강력한 선전포고를 날린다. 미국 동부를 대표하는 나스, 맙 딥(Mobb Deep)의 프로디지 등 육중한 무게감 있는 래퍼와 대치한 본격적인 왕위 쟁탈전이었다.
데이비드 보위의 곡 'Fame'의 멜로디가 스며든 2번째 트랙 'Take over'는 나스 앨범의 작품성은 인정하는듯 하면서도 게으름을 비꼬았고, 플로우가 평범하다며 일갈해 버렸다. 약 3개월 후 이 도발에 나스도 바로 응수했으니, 그의 5집 < Stillmatic >에 수록된 'Ether'가 제이 지의 디스를 정면 반박한 것이다.
최고를 향한 두 거장의 혈투는 물론 살벌했지만, 랩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분명 큰 즐거움을 만끽했을 테다. 얼마 지나지 않아 둘은 곧 원만한 관계를 회복해 묵직한 랩 배틀은 계속되지 못했고 뉴욕은 다시 긴 평화를 맞는다.
당대 최고 거리의 시인 나스에게 자신감 있게 도전장을 내밀 수 있던 건 제이 지의 랩 역시 그에 못지않았기 때문이다. 사업적인 수완이나 그가 끼치는 음악 외적 영향력에 많이 가려져 있지만 이 음반에서 약 한 시간 동안 쏟아붓는 제이 지의 랩은 당대 일류를 아우른다. 신인 시절 에미넴과 함께 꾸린 'Renegade'가 대표적이다. 서로 다른 두 톤의 랩이 대비되며 강한 인상을 남긴다.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랩이 단출한 비트에서 어떻게 맛을 낼 수 있는지 쉽게 확인할 수 있다.
누구나 좋아하게 될 힙합의 스탠다드
음악적 완성도도 훌륭하지만 가장 큰 장점은 누구나 좋아할 랩 앨범이다. 짧지 않은 구성에도 여러 히트곡이 귀를 휘감아 지루할 틈을 허용하지 않는다. 가벼운 후렴구가 인상적인 'Izzo'와 'Hola' Hovito'가 제이 지의 대중 소구력을 대표한다면, 담담한 랩과 소울풀한 백 보컬이 말랑말랑하게 조합된 'Song cry'는 간결한 감성 힙합도 제시한다. 탄탄하고 꽉 찬 구성에 즐길 거리가 빽빽한, 근본과 상업화 사이 적절한 균형을 지켰다.
제이 지는 현재와 미래를 두 손에 쥐고 힙합 음반의 스탠다드를 만들어 이것이 힙합의 정석임을 제시했다. 덕분에 < The Blueprint >는 빌보드 앨범 차트 1위는 물론이고, 롤링 스톤을 비롯한 숱한 매거진을 비롯해 최근 애플 뮤직 명반 순위에도 이름을 올렸으며 미국 의회 도서관이 영구적으로 보존하는 2000년대 최초의 음성 기록물로 각인됐다.
자타 공인을 넘어 역사에 기록된 힙합 역작 < The Blueprint >, 뉴욕의 왕이 써 내린 힙합의 정석은 이제 클래식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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