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개인[전]> 스틸컷

영화 <개인[전]> 스틸컷 ⓒ 인디그라운드


* 이 글은 영화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01.
어느 관계에나 어려움은 있지만 부모와 자식 사이의 관계는 특히 더 그런 것 같다. 원인은 여러 이유가 있지만, 근본적인 문제점은 꽤 오랫동안 한쪽이 일방적으로 받기만 하는 형태에 있다. 이를 두고 우리는 부모라면 당연히 해야 할 도리와 책임으로 여기거나, 감정적인 측면에서 부모의 무제한적인 사랑이라 말하기도 한다. 관계의 측면에서만 보면 형편없는, 당장 끊어져도 이상할 게 없는 구조다. 아무 말도 못 하고 방긋방긋 웃기만 하는 때에는 (울기도 하지만) 그래도 좀 낫다. 소위 머리가 다 크고 나면 이 기형적인 관계가 한쪽으로 더 치우친다. 표현을 할 수 있게 되면 생각을 하게 되고, 머리를 굴릴 수 있게 되면 요구를 할 수 있게 되어서다. 책임을 배우는 건 한참 후의 일이다. 배운 대로 따르는 건 또 별개의 문제고.

이렇게 이야기하면 세상의 모든 자식이 부모를 괴롭히고 힘들게만 하는 존재인 것처럼 여길지도 모르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누군가를 품에 안고 키운다는 일은, 자기 핏줄로 이어진 존재의 탄생을 목도하고 그의 오늘을 내일로 이어주는 일은, 세상의 그 무엇보다 벅차며 숭고한 일이다. 그리고 사실, 그 부모들 역시 누군가의 자식으로 비슷한 과정을 통해 자라왔을 것이기에 억울하고 분하기만 할 일도 아니다. 그래서 더 복잡하고 어려운 것 같기도 하다. 세상의 그 어떤 관계도 이처럼 순환하는 과정에 놓여 있지 않다.

02.
"저 돈이 필요해서 파는 건데요?"

영화 <개인[전]>은 전업 화가의 꿈을 키우며 첫 개인전을 앞둔 석준(곽민규 분)과 그의 아버지(양흥주 분) 사이에서 일어나는 에피소드를 담고 있다. 여전히 부모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아들과 이제는 자신의 자리에서 스스로를 돌보고 싶은 아버지 사이의 이야기다. 서로의 입장을 이해하려는 노력보다는 각각의 현재를 평가절하하며 자신의 입장을 관철시키려는 모습은 많은 이들이 안고 살아온 단절된 모양의 가족을 떠올리게 한다. 이야기의 중심에 놓여 있는 건 아버지의 수석(壽石)이지만, 그 이면에는 서로를 정확히 마주하지 못하는 '어려운 관계'가 짙은 그림자처럼 깔려있다.

두 사람의 관계는 석준이 집 안에 있던 수석을 몰래 훔쳐 갤러리에 가져다 팔면서 꼬인다. 아들은 코로나 확진으로 인해 큰방에 격리돼 나올 수 없는 아버지의 상황을 이용했다. 거실과 베란다에 전시된 돌들은 그의 취미이자 자랑과도 같다. 오죽하면 격리라는 암묵적 약속과 규칙을 어기면서까지 방문을 열고 나와 자신의 건강보다 수석을 더 아끼고 보살폈을까. 하지만 첫 번째 개인전을 앞둔 아들의 눈에는 바닷가 모래사장에 널린 흔한 돌이나 다름없고, 하나쯤 사라져도 알아차릴 수가 없을 것처럼 보인다.

서로를 인정하지 못하는 아버지와 아들
 
 영화 <개인[전]> 스틸컷

영화 <개인[전]> 스틸컷 ⓒ 인디그라운드


03.
발단은 역시 아버지가 아끼는 수석을 아들이 몰래 가져다 파는 행위에 있지만, 사실 그 이면에는 서로의 자리를 인정하지 않는 심리가 있다. 석준의 아버지는 그림을 그리는 일을 전업으로 한다는 아들이 나이가 차도록 제대로 벌이도 하지 못하고 집에만 틀어박혀 있는 것이 못마땅하다. 직업도 없고 사회 경험도 없이 막연한 꿈만 안고 사는 게 걱정이 되는 것이다. 반대로 석준은 아무 데서나 돌을 주워 와 집안에 늘어만 놓는 게 무슨 예술이고 취미냐고 생각한다. 여기에는 자신의 꿈과 일을 인정해 주지 않는 듯한 아버지의 태도를 향한 반항과 서운함도 담겨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 작품에서 아버지의 코로나 확진과 격리는 시대적 상황을 반영한 것이기도 하지만, 두 인물의 거리감을 조성하기 위한 장치로 보이기도 하다. 실제 영화 속 꽤 많은 지점에서 석준과 아버지 사이에는 장애물(유리문, 창문 등)이 놓여 있다. 이런 장치는 두 사람이 물리적으로만 차단되고 단절된 것이 아니라 심리적으로도 비슷한 상황에 놓여 있다는 걸 시각적으로 보여준다. 물론 이 문제는 영화가 바라보는 시점의 사건, 그 이전부터 이미 오랜 시간에 걸쳐 축적되어 온 산물이라고도 할 수 있다.

04.
"집에서 도와주는 게 당연한 거냐?"

사실 석준에게 이번 전시 기회는 절실하다. 개인 전시가 잘 진행되면, 서울에서 꽤 알아주는 갤러리에서 소속 작가로 계약할 기회가 주어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석준 주변에는 집에서 경제적으로 지원해 주는 친구들도 많은데, 자신은 그렇지 못해서 실력이 뒤처지지 않은 데도 데뷔가 늦어지는 것 같다고 느낀다. 그림 그릴 시간도 없는데 언제 아르바이트해서 돈을 모아 작업할 재료를 구할지 걱정이 크다. 반복되는 악순환의 구조를 이번에야말로 끊어내 버리고 싶은 욕심, 그게 석준이 수석을 내다 팔도록 했다. 물론 아버지가 지금까지 모든 돌의 모양과 가치를 기억하고 있을지는 상상도 못 했다.

상대에게 못해 준 일이 많은 데다 자신의 부족함을 스스로가 이미 잘 알고 있을 때 우리는 종종 큰 소리를 먼저 낸다. 미안하다는 말은 목구멍에 걸려 나오지 않고, 답답한 상황과 마음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상대에게 전가해 버리는 경우다. 극 중 두 사람도 그렇다. 아직도 부모님의 집에 얹혀살면서 경제적으로 아쉬운 소리를 해야 하는 아들이나, 정확히 얼마가 드는지는 모르지만 개인전을 위해 필요한 만큼의 지원을 해줄 수 없는 부모나, 모두 이 상황이 안타깝다. 지금 당장 아무것도 할 수가 없기에 두 사람은 서로에게 화를 낸다.

부모의 사랑과 헌신, 당연할까
 
 영화 <개인[전]> 스틸컷

영화 <개인[전]> 스틸컷 ⓒ 인디그라운드


05.
집에 마련된 아버지의 전시장에서 수석 하나를 훔쳐 자신의 전시장을 세우려는 석준의 모습은 단순히 두 사람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일반적인 부모·자식 사이에서의 일처럼 보인다. 사랑과 헌신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자신의 성장과 더 나은 걸음을 위해 부모의 자리를 침범했던 나날들. 누가 조금 먼저 철이 들었고, 어떻게 기울어진 관계를 조금이라도 복구했느냐의 문제지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을 것이다. 결국 우리는 극 중 석준의 모습에서 과거 자신의 모습을 만난다.

석준이 아버지에게 돌을 판 적이 있다고 고백하는 장면은 그래서 중요하다. 두 사람이 처음으로 마주하는 장면이자 서로의 자리를 인정하기 시작하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부자(父子)는 여전히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어색한 태도로 일관하지만, 서로를 향해 조금씩이나마 방향을 틀었다는 것 자체가 관계 개선에 대한 희망으로 보인다. 이제 두 사람은 서로의 자리를 단순히 흔한 돌을 수집하거나 한심하게 붓질이나 하는 것 정도로 폄하하지는 않을 것이다. 아들이 얼마나 절실하게 자신의 꿈을 키워가고 있는지, 아버지가 어떤 마음으로 자신의 수석을 모으고 관리하고 있는지 알 수 있게 되었으니 말이다.

관계라는 것이 그렇다. 거리를 두면 몸과 마음은 편할지 모르지만, 가까이에 있어야 서로를 정확하게 알 수 있고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그 과정에는 분명히 불편한 순간도 있고 어려운 시간도 있을 것이다. 아무런 대가도 없이 관계를 쌓을 수는 없으니까. 우리 모두에게는 그런 시간이 필요하다. 서로 이해하지 못하고 소통하지 못하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소중한 무언가를 잃어버리게 될지도 모른다.
덧붙이는 글 영화진흥위원회에서 설립하고 한국독립영화협회에서 운영 중인 인디그라운드(Indieground)는 2024년 2월 15일(목)부터 총 18개의 큐레이션을 통해 ‘2023 독립영화 라이브러리’ 선정작 92편(장편 22편, 단편 70편)을 소개/상영할 예정입니다. 열한 번째 큐레이션인 '직진은 재미없으니까'은 7월 16일부터 7월 30일까지 보름간 인디그라운드 홈페이지를 통해 회원 가입 후 무료로 시청 가능합니다.
영화 인디그라운드 개인전 곽민규 안준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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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숫자로 평가받지 않기를 바라며 글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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