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겹겹이 여름> 스틸컷
인디그라운드
*이 글은 영화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01.
어떤 인연은 한 번의 선언으로 관계의 종말을 맞이하기도 하지만, 또 다른 인연은 끝내 되살아나기도 한다. 종언(終言)이 세상을 무너뜨리지 않도록 하는 것이 노력이라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이별을 막지 못한 모든 연인의 마지막에 분투와도 같은 절실함이 놓여 있지 않을 리 없어서다. 보통의 종말은 전부의 의미를 퇴색시킨다. 함께 지나온 시간을 지우고, 공유해 왔던 기억을 잘게 부스러뜨리고, 선명했던 존재의 흔적마저 모두 삼켜 여기로부터 떨어뜨려 놓는다. 자신이 딛고 있는 선형의 세상에서는 다시 닿을 수 없는 아주 먼 곳으로.
끝내 소멸하지 않는 인연에게도 더 나은 종류의 노력 같은 건 없다. 관계의 끝자리에서 내려다보이는 조각난 마음은 누구에게나 날카롭고 공허하다. 서로에게 상처가 없는, 어느 쪽도 서로의 등허리를 아쉬워하지 않는 이별이라고 해도 그렇다. 헤어짐을 경험하는 모두는 결코 돌려주지 못할 마음 하나를 안고 혼자가 된다. 자신의 것이지만 오롯이 자신의 것은 아닌 이 마음을, 어떤 이들은 메말라 죽도록 내버려두지 않는다. 깨끗이 잊지 못하거나 질척이는 모양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보통의 종말이 아닌 것, 그들에게 조금 다른 것이 있다면 그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영화 <겹겹이 여름> 속 두 인물 연(이노아 분)과 강(김우겸 분)은 몇 번의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한다. 관계가 항상 연속되는 것은 아니다. 길게는 몇 년의 시간을 둔 채로 서로 다른 사람이 되어 살아가게 되기도 하지만, 두 사람은 어느 여름의 계절마다 서로를 알아본다. 끝내 떨어지지 않던 스물셋의 여름과 재회에도 불구하고 다시 이어질 수 없던 스물여덟의 여름, 그리고 지나온 시간의 상흔 속에서도 서로를 알아볼 수 있었던 서른셋의 마지막 여름까지. 영화는 겹겹이 쌓인 계절의 단층을 푸르른 여름의 이미지로 치환해 내고자 한다.
02.
"나 사실 너 보고 싶었어. 진짜로."
연과 강이 스물여덟이던 해의 여름은 영화가 선택하는 첫 번째 계절이 된다. 4년 만의 재회가 이루어졌던 여름이다. 이 시점의 두 사람은 오래전 이별을 한 상태다. 헤어져 있던 사이 남자는 편집자가 되었고, 여자는 이사를 했다. 강은 준비하고 있던 시인 등단의 꿈도 포기한 것처럼 보인다. 많은 것이 변했다. 두 사람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과거 놀이터였던 공간은 이제 작은 공터가 되었다. 오래된 고궁의 담벼락을 보존하기 위한 시의 정책으로 인해서다. 4년은 짧은 시간이 아니다.
변하지 않는 것도 있다. 무더운 여름날의 풍경과 소소한 장면 속에서 웃는 두 사람이다. 여전히 아이처럼 유치하게 구는 강의 모습도 그대로이고, 그런 모습에 화가 난 연을 다시 웃게 만드는 남자의 미소도 변함없이 똑같다. 영화가 직접 알려주는 것은 아니지만, 강이 건넨 아이스크림도 분명 기억 속 연이 좋아했던 종류였을 것이다. 무엇보다 그런 그를 다시 보고 싶었다는 여자의 마음이 같은 모양으로 남았다. 하지만 역시 4년이라는 시간은 짧은 시간이 아니다. 이때의 강에게는 만나는 사람이 있고 두 사람은 엇갈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