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영화, 독립출판, 독립서점, 독립언론, 독립다큐 등. 온갖 독립자 붙은 것이 넘쳐나는 세상이다. 일제강점으로부터 해방을 맞은 지 80년이 다 되었건만 세상엔 여전히 독립이란 글자가 붙은 무엇들이 수시로 일어난다. 일제가 물러난 세상에서도 아직 독립을 외칠 필요가 있는 것일까. 그렇다면 그건 대체 무엇일까.
 
독립을 외치는 무엇들과 마주하여서 반드시 물어야 하는 것이 있다면 '무엇으로부터의 독립인가'하는 질문일 테다.
 
독립영화는 무엇으로부터 독립하려 하는가. 일군의 독립영화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기존 영화제작 체계로부터 독립하려는 의지가 읽히는 듯도 하다. 기존의 영화제작 체계, 이를테면 관객의 입맛에 맞춘 이야기를 내어놓는 소위 상업영화의 제작방식이 맞지 않는 이들이 많다. 수용자보다 작가에게 집중하는 작품이 유독 독립영화 가운데선 흔히 찾아볼 수 있는 것이다.
 
우리와 상관없이 포스터

▲ 우리와 상관없이 포스터 ⓒ 필름다빈

 
톡톡 튀는 독립영화의 매력
 
그래서일까. 독립영화의 매력 중 하나가 바로 독특함이다. 다른 어느 영화와도 차별화되는 저만의 색채를 가진 작품이 독립영화계에선 꾸준히 머리를 들이민다. 개성 있는 문법으로 저만의 관심을 풀어내는 영화의 매력, 내가 독립영화를 찾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우리와 상관없이>도 독립영화다. 1993년생 신인 감독 유형준의 장편 데뷔작이다. 스타라고 부를 만한 배우도 없고, 영화의 전개방식도 여러모로 생소하다. 총 5회 차 촬영으로 81분 짜리 장편을 찍어냈을 만큼 열악한 환경에서 만들어진 저예산 영화다. 전반부와 후반부 사이에 6개월의 시차를 두고 촬영한 점도 특기할 만하다.
 
영화엔 여러 인물이 등장한다. 그중 중심이 되는 건 중년 여배우 화령(조현진 분)이다. 촬영한 작품 시사회를 앞두고 뇌졸중으로 쓰러져 입원한 그녀는 제가 나온 작품을 기억하지 못한다. 시사회에 참가하지 못한 주연 여배우라니. 화령이 제작자며 동료들에게 마음의 부담을 느끼는 것도 당연하다. 스스로 작품 내용을 기억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부터가 마음을 무겁고 답답하게 한다.
 
우리와 상관없이 스틸컷

▲ 우리와 상관없이 스틸컷 ⓒ 필름다빈

 
개봉 앞두고 쓰러진 여주인공
 
시사회 당일이 되어 아침부터 저녁까지 여러 인물들이 그녀를 찾아온다. 김PD(김미숙 분), 후배 배우(조소연 분), 남자 배우(이양희 분), 후배 배우의 애인(곽민규 분), 감독(최성원 분) 등이다. 그러나 그들로부터 얻어낸 정보는 좀처럼 어우러지지 못한다. 엇비슷한 주제로 오가는 대화들이 어딘지 맞지 않고 삐걱거린다. 누구는 기역이라 기억하는 걸 다른 이는 니은이라 답한다. 그 근저에 단순한 기억의 착오가 있는지, 어떠한 의도가 있는지를 화령도, 관객들도 알 수가 없다. 그저 짐작만 할 뿐이다.
 
마침내 감독이 찾아왔을 때 화령은 무엇을 물으려 하는가. 어쩌면 감독이야말로 PD와 배우들이 답해주지 못한 진실을 말해줄 수 있는 이가 아닌가. 그러나 영화는 가장 중요한 그 순간이 진실인지 아닌지 불명확하게 그려낸다.
 
화령이 제가 출연한 영화의 진실을 찾아가는 것만큼 느긋한 속도로, 영화는 작품을 둘러싼 모든 인물의 관계도를 조금씩 그려나간다. 병실을 찾은 이들이 털어놓는 온갖 이야기들을 통하여 화령과 다른 배우들의 미묘한 관계가, 그러나 화령 본인조차 제대로 알지는 못하였던 모습이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또 한 편으로, 이들이 서로 품었고 나누었던 감정과 욕망 또한 드러나니 관객은 파편적인 병실의 대화로부터 영화를 찍는 내내 이뤄졌을 이들의 어느 시절을 떠올려보게 된다.
 
우리와 상관없이 스틸컷

▲ 우리와 상관없이 스틸컷 ⓒ 필름다빈

 
영화 속 영화, 모호하고 애매한 분위기
 
두 번째 장이라 해도 좋을 후반부는 아마도 이들이 찍은 영화 속 장면처럼 느껴진다. 여기서 화령은 장성한 딸을 둔 중년 여성이고, 이혼한 남편과 이따금 만나 다투는 사이이며, 딸과 후배 남자배우는 연인 사이로 등장한다. 앞선 전반부에서 언급된 영화의 내용과 상당부분이 중첩되는 이 이야기가 후반부에선 마치 사실처럼 전개된다. 병실을 찾은 이들의 이야기가 얼마쯤 사실이고 얼마쯤 거짓임이 확인되는 가운데, 진위를 따지는 일이 실은 그리 중요하지 않단 생각도 고개를 치켜든다.
 
영화는 모호한 기억 속을 떠도는 듯 애매하다. 누군가의 기억이 다른 누군가에겐 거짓이고, 또 다른 누구에겐 참이며, 아예 일을 알지 못하는 이에겐 흥미롭거나 그렇지 않은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극중 반복해 등장하는 골목길처럼 같은 길도 오가는 이에 따라 비슷하거나 전혀 다르게 다가올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모두가 그 길이 같은 길이라고 느낀다면 그대로도 좋은 것이 아닌가. 그러나 그 길로부터 모두 서로 다른 감상을 갖는다면 그 또한 멋진 일이 아닌가.
 
우리와 상관없이 스틸컷

▲ 우리와 상관없이 스틸컷 ⓒ 필름다빈

 
모호한 이야기가 주는 독특한 매력
 
흑백의 화면과 멈춰진 카메라, 일상의 공간이며 대화를 포착하는 시선까지 여러모로 홍상수를 떠올리게 한다. 그 분위기의 유사성은 그러나 다분히 불명확한 주제의식이며 흐릿한 초점 가운데서 의미를 잃어버린다. 노력할수록 인물 간의 단절된 소통만 두드러지는 이야기가 도리어 유형준이란 감독의 독자적 색채를 두드러지게 한다. 나로선 아직 그 개성에 대한 호오를 판단하기 이르다는 생각이 들 뿐이다.
 
명확한 이야기가 각광받는 시대다. 이해하기 위해 큰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없는 이야기, 가만히 앉아 있어도 관심을 끄는 작품이 좋은 영화로 평가받는다. 그러나 때로는 이해하기 어렵고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작품이 가진 미덕이 있음을 깨닫는다. 설득이 아닌 표현 그 자체만으로 작가의 역할을 다하는 작품들도 있다는 뜻이다. 그런 작품 가운데도 제법 볼 만한 무엇이 있다는 이야기다.
 
유형준이 그런 작가인지, 또 <우리와 상관없이>가 그만한 영화인지를 쉬이 답할 수는 없겠다. 난해하고 모호한 것 뒤에 깔린 가치와 미덕이 충분히 확인되지 않는 탓이다.

그러나 여러모로 이 작품 가운데서 주의를 끄는 요소를 발견하게 된 것도 사실이다. 묘한 긴장과 파편화된 이야기 가운데 드러나는 몇 가지 진실들이 어쩌면 매력적인 무엇으로 나를 이끌어갈지 모른다는 기대를 품도록 한다. 비록 이 작품이 끝내 나를 움직이지 못하였다 하여도, 나는 유형준의 다음 작품을 기다릴지 모르겠단 생각이 든다.
덧붙이는 글 김성호 평론가의 브런치(https://brunch.co.kr/@goldstarsky)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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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영화평론가.서평가.기자.3급항해사 / <자주 부끄럽고 가끔 행복했습니다> 저자 / 진지한 글 써봐야 알아보는 이 없으니 영화와 책 얘기나 실컷 해보련다. / 인스타 @blly_kim /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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