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속의 어떤 순간은 반복돼 재현된다. 2000여 년 전 유대 사람 예수가 십자가에 달린 순간이 그렇다. 성경의 복음서들에 주로 기록된 이 날의 이야기는 목격자들의 입과 기록을 통해 이스라엘은 물론 전 세계로 확산됐다. 자신을 "하느님의 아들"이라 말하던 젊은 목수의 이야기는 수천 년간 많은 사람들을 매료했다.

예술가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화가들은 캔버스에 십자가를 그렸고 작가들은 예수의 마지막을 묘사할 '한 문장'을 위해 고심했다.

영화 도 그날에 주목했다. 영화로 재현된 예수의 모습은 어느 매체보다 더 생생하게 보는 이의 상상력을 자극했다. 덕분에 영화는 역사적인 그 순간을 기억하고 기념하기 위한 훌륭한 선택지가 됐다.

여기 반복돼 재현되는 또 다른 역사가 있다. 1965년 3월 미국에서 일어난 셀마-몽고메리 행진이다. 앨라배마주 셀마에서 투표권 보장을 요구하는 흑인 600여 명이 시작한 이 행진은 2주 후 약 2만 5천 명이 모이는 시위로 몸집을 불렸다. 그들은 셀마에서 몽고메리까지 87km를 걸었다. 서울에서 원주까지의 거리다. 셀마의 행진이 촉매제가 돼 같은 해 8월 린든 존슨 대통령은 흑인의 투표권 보장을 골자로 하는 선거권법(Voting Rights Act)에 서명하게 된다. 

뜨거웠던 셀마의 3월은 다양한 방식으로 재현돼 왔다. 화폭에 담기고, 종이에 쓰였다. 매년 3월이 되면 전 세계에서 셀마로 사람들이 모여든다. 흑인 최초로 대통령이 된 오바마도, 현 미국 대통령 바이든도 3월이 되면 셀마를 찾아 시민들과 함께 걸으며 자유와 평등의 의미를 되새겼다. 

영화도 셀마를 잊지 않았다. 2015년 브래드 피트와 오프라 윈프리가 공동 제작자로 손을 잡고 이 날의 역사를 스크린으로 옮겼다. 제목은 <셀마>. 연출은 영화 전공자가 아닌, 흑인들의 역사를 전공한 신인 감독 에이바 듀버네이(Ava Marie DuVernay, 1972~)가 맡았다. 
 
 흑인 화가 제이콥 로렌스가 그린 셀마-몽고매리 행진 <다리에서의 대치(1975)>

흑인 화가 제이콥 로렌스가 그린 셀마-몽고매리 행진 <다리에서의 대치(1975)> ⓒ 1stdibs.com

 
"자유는 곧 올 것이다"

1964년 노벨 평화상 수상을 앞둔 마틴 루터 킹(데이빗 오예로워) 목사가 수상 연설을 준비하는 모습으로 영화는 시작된다. 화려한 넥타이를 고쳐 매며 "너무 꾸몄어. 이건 나에게 어울리지 않아"라고 말하는 킹 목사의 표정은 어둡다. 그는 수상의 영예를 누리지만 흑인들은 여전히 전쟁 같은 세상을 살고 있기 때문이다. 

킹의 노벨상 수상 후 5개월이 지난 1965년 3월 7일. 앨리배마주의 셀마에서 사건이 일어난다. 주민 절반이 흑인이지만 흑인 유권자는 1%도 되지 않는 셀마. 참다못한 흑인들이 투표권 보장을 위한 행진을 시작했다. 그러나 돌아온 것은 경찰의 무차별적 폭행과 살해였다. 피의 일요일(Bloody Sunday)이라 불리는 이 사건을 계기로 흑인들의 분노는 정점에 달한다. 

킹 목사는 동료 운동가들과 함께 셀마로 향한다. 그러나 킹 목사가 잠시 셀마를 비운 사이 경찰들은 강압적으로 주민들을 해산시키고, 지미 리 존스이라는 흑인 청년이 경찰의 총에 맞아 숨지게 된다. 킹과 주민들은 셀마에서 몽고메리까지 54마일(87km)을 행진하기로 한다. "인간이 평등하게 창조됐다고 믿는다면 셀마로 오라"는 킹 목사의 호소에 다양한 인종의 지지자들이 셀마로 모여든다.  

3월 9일. 시위대는 비폭력 평화 행진을 재개한다. 이번에는 경찰들이 길을 터주었지만 킹 목사는 경찰들을 믿지 못하고 시위대를 해산시킨다. 그날 밤, 행진에 참여했던 백인 목사 한 명이 백인 우월주의자들에게 목숨을 잃는 일이 발생한다. 이 죽음은 전 미국을 분노하게 했다. 

언론이 셀마를 주목하자 린든 존슨 대통령은 정치적 압박감을 느낀다. 그는 앨라배마의 주지사에게 공문을 보내 "행진을 막지 말라" 명령한다. 마침내 3월 21일. 킹 목사와 시위대들은 몽고메리까지의 행진을 완주한다. 몽고매리 주지사 건물 앞에서 "자유는 곧 올 것이다!"라고 외치는 킹 목사의 모습을 비추며 영화는 막을 내린다. 

1965년 3월, 전 미국을 충격에 빠뜨린 셀마-몽고매리 사건을 다룬 영화 <셀마>는 당시의 사건을 충실히 재현한 역사 영화인 동시에 마틴 루터 킹 목사에 대한 전기 영화다. 비폭력 인권 운동가, 노벨 평화상 수상가, 뛰어난 연설가인 킹 목사는 영화로 표현하기 쉬운 인물이 아니다. 그에게서 어떤 얼굴을 끌어내 관객의 마음을 움직일 것인가? 연출가의 가장 큰 고민이었으리라.

듀버네이 감독은 강인하고 리더십 넘치는 위인전 속 인물 대신 약하고 두려움 많은 연약한 인간으로 그를 묘사했다. 영화 속 킹 목사는 어딘가 우울하고 경계심이 가득한 인물이다. 연설대에 올라가면 카리스마 있는 연설로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지만 단에서 내려오는 킹은 오히려 불안하고 무기력해 보인다.  

킹 목사를 비폭력만을 고집하는 이상주의자가 아닌 전략적인 연출가의 모습으로 묘사한 것도 흥미롭다. 그는 안전한 시위 방식을 고집하는 동료들을 "아침 신문 1면과 저녁 뉴스에서 반복될 드라마를 만들어야 한다"며 설득한다. 백인들의 관심을 모으고 여론을 바꿔서 백악관을 움직이겠다는 킹의 전술은 어떤 이들의 반감을 사기도 한다.  
 
 영화 <셀마> 포스터

영화 <셀마> 포스터 ⓒ 네이버영화

 
 
 두버네이 감독(오른쪽)과 킹을 연기한 배우 데이빗 오예로워

두버네이 감독(오른쪽)과 킹을 연기한 배우 데이빗 오예로워 ⓒ 네이버영화


킹 목사 클로즈업하는 이유
 
이런 킹 목사를 설득력 있게 표현한 것은 영국 출신 배우 데이빗 오예로워(David Oyelowo.1976~)다. 배우이자 영화 제작자이기도 한 그는 런던극예술학교를 졸업하고 영국 로열 셰익스피어 컴퍼니에서 흑인 최초로 '헨리 6세'를 연기했다. 어딘가 연극적인, 낮고 호소력 짙은 그의 목소리는 킹 목사의 명연설을 재현하는 장면에서 특히 빛을 발한다.

영화 속에는 유독 킹 목사의 얼굴을 클로즈업한 장면들이 등장한다. 감독은 '램브란트 조명'이라 불리는, 흡사 램브란트의 회화처럼 빛과 어둠을 부각해 인물의 감정을 드러내는 연출을 애용한다. 이를 통해 갈등하고 고뇌하는 킹 목사의 내면세계로 관객들을 집중시키겠다는 의도다. 

몇 군데의 슬로모션도 눈에 띈다. 영화 도입부 흑인 아이들이 폭탄에 휩쓸리는 장면, 지미 리 존슨이 백인의 총에 맞는 장면이다. 찰나로 끝났을 그 순간을 영화가 허용하는 최대한으로 늘려 보여주는 것은 "그 순간을 잊지 않겠다"는 감독의 애도처럼 느껴진다. 추상화처럼 표현된 파편과 함께 떨궈지는 소녀들의 신발, 갑작스러운 총탄에 두 눈을 감지도 못한 채 쓰러지는 청년 지미의 모습을 보며, 관객들은 분노와 함께 긴장감 속에 흑인들의 행진을 지켜보게 된다. 

역사 영화답게 이야기는 셀마의 그 날들을 시간순으로 그려내며 천천히 절정으로 향한다. 마침내 연방 정부의 보호 아래에 진행된 마지막 행진의 날. 결연한 표정으로 다리를 건너는 킹 목사 부부와 지지자들의 모습을 비추던 화면은, 실제 당시의 행진 모습을 담은 낡은 기록 영상으로 전환된다.

침낭과 짐꾸러미를 들고 백인들과 함께 손을 잡은 흑인들의 모습, 흑인 아이를 품에 안은 백인 할아버지, 말을 탄 백인 보안관들, 시위자들을 못마땅하게 쳐다보며 침을 뱉고 욕하는 사람, "흑인들은 꺼져라!"고 쓴 팻말을 든 백인 우월 주의자들의 모습을 보다 보면 이것이 불과 60년 전의 미국이라는 것에 새삼 놀라게 된다.  
 
영화에서 가장 강력한 메시지를 발신하는 순간은 행진을 끝낸 킹 목사가 몽고메리의 주 의사당 앞에서 연설하는 장면이다. 

"사람들은 우리가 이곳에 도착하지 못할 거라 했습니다. 우릴 막겠노라 말했습니다. 우린 여기 올 자격이 없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오늘 우린 미국인으로 이 자리에 우뚝 섰습니다.(중략) 언제가 되야 자유로워지겠습니까? 곧, 이제 곧 입니다! 언제 자유가 찾아옵니까? 곧, 이제 곧 옵니다!"
 
 실제 집회 사진

실제 집회 사진 ⓒ crmvet.org


셀마-몽고메리 행진에서부터 60년. 킹 목사는 우리의 '지금'을 어떻게 평가할까. 꿈이 이루어졌다며 기뻐할까? 아니면 아직 셀마의 행진은 끝나지 않았다고 목소리를 높일까?

"작은 시골 교회의 목사로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고 싶다" 했던 마틴 루터 킹. 그는 1969년 4월 흑인 노동자들의 시위를 돕다가 백인 우월주의자의 총에 맞아 사망한다. 연약하고 두려움 많던 사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희생으로 누군가가 빛난다면 기꺼이 목숨을 버리겠다"라고 말했던 마틴 루터 킹. 영화를 보고 나면 어둠 속에 있는 누군가를 향해 "정의는 천천히 오는 것 같지만 반드시 온다"라고 말하는 그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하다.
덧붙이는 글 <셸마>는 로튼토마토 '최고의 영화 100선' 30위에 선정됐습니다. '이 영화, 드르륵 탁!' 연재는 이 기사로 종료됩니다. 더 잘 준비해서 새로운 연재로 돌아오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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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에서 영화와 미학을 공부했습니다. 프리랜서 번역가. 동경 거주 중. Matthew 22:3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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