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터 극장 로비 포스터.

▲ 포스터 극장 로비 포스터. ⓒ 극단 신세계

 
전세 사기 이야기인데 슈퍼맨이 나오다니 뭔가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라 흥미로웠다. 실제로 전세 사기 피해자였다는 작가 겸 감독 김수정은 왜 이런 얘기를 생각해 냈을까. 슈퍼맨이 나오게 된 이유는 그가 더 이상 슈퍼맨이 아닌 평범한 시민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 살고 있던 슈퍼맨은 1970년대 이리 열차 전복 사고 등 각종 위기 때마다 많은 인명을 구했고 외환위기 당시 금 모으기 운동 홍보대사를 역임하는 등 활약이 대단한 히어로였다. 하지만 슈퍼 히어로들의 활약만큼이나 부작용도 커서 많은 사람들이 피해를 입게 되자 정치권에서 영웅들의 힘을 제거하자는 법안이 나왔다. 원더우먼, 슈퍼맨, 배트맨, 홍길동 등 어벤저스는 더 이상 초능력을 쓰지 못하게 되었다. 초능력을 쓰는 순간 지구에서 영원히 추방한다는 엄혹한 법이 제정된 것이다.

힘을 쓰지 못하는 히어로들은 자신의 과거 이미지를 이용하든 공부를 해서 새 지식을 쌓든 돈을 벌어야 한다. 슈퍼맨도 인기는 없지만 그래도 성실한 배우로 생활하며 돈을 벌었다. 그리고 악착 같이 모은 돈 3억 5천만 원으로 성북동에 있는 한 신축 빌라에 들어갔다. 그런데 이게 이른바 '갭투자'를 이용한 전세 사기 물건이었던 것이다. 세상에, 슈퍼맨이 전세 사기 피해자라니! 집주인은 연락이 안 되다가 겨우 부인이 전화를 받았는데 자기 남편은 지금 구치소에 수감되어 있으니 해결을 할 수가 없다고 발뺌하고 슈퍼맨은 억울하기도 하고 창피하기도 해서 오열한다.

전세금을 돌려받을 방법을 찾으려 구청, 법원 등을 돌아다녀 보았으나 뾰족한 수가 없고 변호사나 부동산 전문가는 상담료가 너무 비싸서 엄두가 안 난다. 부동산에 대해 너무 모른다는 자각이 들어 스스로 공부를 해보려고 부동산 학원에 갔더니 과거에 짝사랑했던 원더우먼 누나가 학원강사로 변신해 갭투자는 좋은 제도라는 둥 강의하고 있는 게 않은가. 원더우먼은 슈퍼맨에게 말한다. "야, 나도 죽어라 공부해서 내 능력으로 돈 버는 거야."

전세는 전 세계에서 우리나라에만 존재하는 제도다. 이명박부터 문재인 정권에 이르기까지 역대 집권층은 선거 때 표를 얻기 위해 전세 대출을 '폭탄 돌리기' 식으로 계속 키워 왔고 결국 엄청난 국민 부채와 이런 사기극들을 양산하게 된 것이다. 연극은 작가의 직접 경험담을 바탕으로 한 것이기에 각종 법률과 부동산 상식이 난무하는데 나는 정말 하나도 알아듣지 못하는 내용들이었다. 
 
커튼콜 연극 끝나고 커튼콜 촬영.

▲ 커튼콜 연극 끝나고 커튼콜 촬영. ⓒ 편성준

 
우리가 살면서 사는 물건 중 가장 액수가 큰 게 자동차와 집일 것이다. 아무리 싼 집이라도 몇 억 원이 들고 은행 대출 등 빚이 생기는 문제이기 때문에 전세 사기는 누군가의 운명을 바꿔 놓기도 한다. 당연히 자살자가 속출했다. 연극에서는 이게 '사회적 참사냐 개인의 문제냐'를 가지고 토론하는 장면이 나온다. 물론 쉽게 결론을 내리기 힘든 문제다. 다만 피해를 당한 사람은 물론 전문가들도 알아먹기 힘들고 해결책도 어려운 제도라면 단순하고 쉽게 바꿔야 한다는 점에서는 '사회적 참사' 쪽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은행이나 세무서 같은 데 가는 걸 싫어하는 건 그들이 사용하는 용어가 너무 어렵기 때문이다. 법조계는 더 하다. 이는 내가 글쓰기 강연을 할 때(특히 'UX 라이팅' 얘기할 때) 자주 하는 얘기다. 어려우면 쉬운 글로 고쳐야 한다. 그게 수용자 중심의 글쓰기다. 사고를 확장해 보면 부동산도 그렇지 않을까. 전세를 가진 사람의 돈을 끼고 계속 집을 사는 갭투자 방식은 내용이 너무 어려워서 일반인들이 속아 넘어가기 쉽다. 그렇다면 이런 악법은 고쳐야 하지 않나. 보다 단순하고 쉽게 개선하는 게 마땅하지 않나. 지금도 엄청난 빚 부담에 거리로 나앉거나 자살하는 사람이 계속되고 있다면 말이다.

160분에 달하는 공연을 다 보고 나니 온몸에 힘이 빠지며 참담한 생각조차 들었다. 연극은 전세 사기의 심각성을 충분히 전달하고 공감하게 하지만 일단 뾰족한 해결책이 없다는 점에서 절망적이고, 이렇게 심각한 내용도 내가 연극을 보러 오지 않았으면 몰랐거나 대수롭지 않게 여겼을 거라는 점에서는 극장 안과 밖의 감정 온도차가 너무 심했다. 그리고 배우들의 연기가 너무 열정적이고 소리를 지르는 바람에 힘든 점도 있었다. 아내는 지난해에 이 연극을 한 번 보고 이번이 두 번째 관람인데 첫 공연 때도 비슷한 톤이었다고 하니 이는 감독의 의도였을 것 같다. 개인적으로 매 순간 지르는 것보다는 좀 더 강약 조절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현실적 문제를 무대 위에 작품으로 계속 형상화시키는 극단 신세계의 노력은 정말 존경할 만하다. 감독은 물론 배우들까지 똘똘 뭉쳐 공부하고 아이디어를 내서 완성한 작품성만으로도 한 번 보시라고 권하고 싶은 연극이다. 2024년 6월 9일까지 대학로극장 쿼드에서 상연한다.

● 작/연출 : 김수정
● 출연 : 고민지 고용선 김보경 이강호 이시래 장우영 한지혜
● 기간 : 2024년 6월 1일 ~ 6월 9일
● 장소 : 대학로극장 쿼드
덧붙이는 글 페이스북에도 올림.
연극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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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피라이터 출신 작가. 『부부가 둘 다 놀고 있습니다』 『읽는 기쁨』 등 네 권의 책을 냈고 성북동에 있는 한옥집을 고쳐 ‘성북동소행성’이라 이름 붙여 살고 있습니다. 유머와 위트 있는 글을 지향하며 출판기획자인 아내 윤혜자, 말 많은 고양이 순자와 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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