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극장에서 하는 연극은 그 규모 때문에라도 큰 기대를 안 하게 된다. 비좁은 무대 위에 적은 인원의 배우들이 나와서 사소한 이야기를 하다가 들어가겠지, 하는 마음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그런데 지난 2일 을지로 철학극장에서 본 연극 <만나러 갈게, 비는 오지만>은 그런 선입견을 통쾌하게 부수어 버리는 수작(秀作)이었다.     
일단 어떻게 이런 배우들을 모아 놓았나 싶을 정도로 아는 얼굴들이 많았고 연기 또한 고르게 훌륭했다. 아내와 나는 마이코 역을 맡은 심은우 배우의 팬이라 갔지만 극의 중심이 되는 준짱 역의 권주영, 기미코 역의 박수진, 그리고 그들의 부모 역할을 맡은 박승현, 황규찬, 고은빈 들도 모두 다른 무대에서 맹활약하는 정상급 배우들이었다. 

일본 희곡을 가져온 이 작품은 방금 그림책 작가로 당선되었다는 소식을 접한 기미코(박수진)와 그의 후배 도모(박세인)가 얼싸안으며 기뻐하는 장면으로 시작되는데 이는 2018년의 일이고 극은 곧 1991년 기미코와 준이 어렸을 때 이야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연극 <만나러 갈게, 비는 오지만> 스틸 이미지.

연극 <만나러 갈게, 비는 오지만> 스틸 이미지. ⓒ 철학극장

 

 
 연극 <만나러 갈게, 비는 오지만> 스틸 이미지.

연극 <만나러 갈게, 비는 오지만> 스틸 이미지. ⓒ 철학극장

 
어렸을 때 미술학원 워크숍에서 불의의 사고로 한쪽 눈의 시력을 잃게 된 준짱이 모든 사연의 시작점이다. 사고가 나던 날 저녁 하필 개인적 만남을 가졌던 준의 엄마 와코와 기미코의 아빠 유타로는 바람을 피운 것도 아닌데 관계를 의심받게 되고 결국 두 집안은 등을 돌리게 된다. 거기에 죽은 언니의 딸 기미코를 키우며 형부에 대한 사랑을 키워가는 마이코, 그리고 그들과 관계된 사실을 우연히 알게 된 야구장 직원 가자미의 입장까지 겹치면서 이야기는 꽤나 복잡해졌는데 이를 깔끔하게 정리한 사람은 연출가 고해종이다. 

연출가이면서 인문학 연구자이기도 한 고해종은 자크 라캉 등의 프랑스 철학을 바탕으로 일본 작가의 희곡을 깊이 분석하고 거기서 발생하는 인간관계의 실존적 모순과 불가해성을 미니멀한 무대 위에 솜씨 좋게 배치했다. 특히 다다미가 길게 놓인 개방형 무대에서 과거와 현재가 엇갈리는 순간을 배우들의 동선과 대사 타이밍만으로 기가 막히게 표현한 점은 가히 장인의 솜씨다. 물론 여기엔 일본인 특유의 망설임과 배려를 어눌한 몸짓과 대사로 표현하다가 터져 나와야 할 때는 정확하게 포효하는 배우들의 고른 기량도 한몫 했다. 
 
포스터 철학극장에서 제공받았음.

▲ 포스터 철학극장에서 제공받았음. ⓒ 철학극장

 
악역 없는 드라마는 만들기 힘든 법인데 그런 면에서 이 연극은 일단 극본의 정교함이 빛나서 모든 캐릭터들이 살아 있었고 과잉이나 치기 없는 연출은 가해자와 피해자만으로 나뉠 수 없는 인생의 복잡성을 다루면서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아서 기분이 좋았다.

나는 특히 27년 전 잘못과 현재의 의도하지 않은 '양 그림' 표절에 대해 사과하는 기미코에게 '인생에 필요한 것은 용서가 아니라 일어난 일을 받아들이는 태도'라는 취지의 말을 하는 준의 대사가 가슴에 와닿았다. 아울러 진짜 인생에서는 어느 것 하나 깔끔하게 정리되는 법이 없으며 인간관계를 결정하는 것은 팩트 이전에 감정의 문제임도 다시 한번 인식하게 되었다. 

연극이 끝나고 좁은 극장 계단에서 즉석 파티가 열렸다. 생일을 맞은 심은우 배우를 위해 팬들이 케이크와 플래카드 등을 준비해 온 것이었다. 극장 앞 아스팔트 위에서도 사람들은 좀처럼 헤어질 줄 모르고 인사를 나누고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연극을 좋아하고 뭔가를 위해 정성을 다하는 사람들끼리만 느낄 수 있는 공감의 시간이었다. 

이 작품은 202년 제10회 현대일본희곡 낭독공연 <만나러 갈게, 비는 오지만 逢いにいくの、雨だけど>으로 첫선을 보였고 정식공연으로는 이번이 국내 초연이다. 강력 추천한다. 2024년 6월 9일까지 을지공간에서 상연한다. 서두르시라.

● 작 : 요코야마 다쿠야
● 연출/무대디자인 : 고해종
● 출연 : 고은민 권주영 박새인 박수진 박승현 심은우 최준하 황규찬
● 장소 : 철학극장
● 기간 : 2024년 5월 30일 - 6월 9일
덧붙이는 글 인스타그램과 페이스북에도 포스팅함.
연극리뷰 셰익첵 만나러갈게비는오지만 편성준 철학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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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피라이터 출신 작가. 『부부가 둘 다 놀고 있습니다』 『읽는 기쁨』 등 네 권의 책을 냈고 성북동에 있는 한옥집을 고쳐 ‘성북동소행성’이라 이름 붙여 살고 있습니다. 유머와 위트 있는 글을 지향하며 출판기획자인 아내 윤혜자, 말 많은 고양이 순자와 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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