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미국, 열아홉 살 남자 청년 세 명이 만났다. 세 사람은 그때로부터 19년 전 한 날 한 시에 유대인 생모의 아들 세 쌍둥이로 태어났으나 생후 6개월 만에 <루이스 와이즈> 입양기관을 통해 저마다 다른 가정에 각각 입양되어 자랐다. 세 사람은 일란성 쌍둥이여서 외모가 매우 똑같았고, 입양된 두 살 손위 누이가 있다는 가정환경까지 (의도적으로 짜맞추기라도 한 듯) 똑같았다. 
 
태어난 지 6개월 만에 생이별한 세 쌍둥이(바비, 에디, 데이비드)는 만나자마자 금방 친해졌다. 동일한 외모, 유사한 취향은 처음엔 그들 자신들에게도 무척 재미있어 보였다. 세 청년의 가족과 지인들은, 오랜 세월 떨어져 지냈음에도 세 청년에게서 관찰되는 공통된 몸집과 음성과 취향을 흥미롭게 지켜보았다. 급기야 언론에서도 세 쌍둥이를 주목했다. 세 쌍둥이는 유명해졌고, 다채로운 TV쇼에 초대받았으며, 팝가수 마돈나(데뷔 직후)가 등장하는 영화에도 출연했다. 20대의 혈기왕성한 세 청년은 어린 시절을 함께 보내지 못한 것을 한꺼번에 몰아서 보상받으려는 듯 내내 같이 붙어다녔다. 1993년엔 <세쌍둥이>라는 식당을 열어 한동안 '동업'을 하기도 했다. 

쌍둥이 생이별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어느 일란성 세 쌍둥이의 재회> 스틸 컷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어느 일란성 세 쌍둥이의 재회> 스틸 컷Netflix
 
다큐멘터리 <어느 일란성 세 쌍둥이의 재회>는 세 쌍둥이의 재미있고 감격적인 재회에서 출발해, 그들의 재회가 중단시킨 '무엇'이 존재했다는 사실을 밝혀낸다. 그 '무엇'이란, 연구대상자들 모르게 진행된 심리학 실험이었으며, 일란성 쌍둥이를 분리입양하는 실험조건을 요구하는 연구 프로젝트였다. 작품의 상영시간은 1시간 37분이다. 
 
그런데 비밀리에 실행된 일란성 쌍둥이 실험의 전모가 밝혀지기까지는 몇 번의 단계가 필요했다. 첫 번째 단계, 세 쌍둥이의 입양부모 여섯 명은 아기들을 분리입양시킨 입양기관 루이스 와이즈를 대상으로 소송을 제기하려 했다. 실제로 세 아기는 입양 초기 분리불안 증세를 극심하게 겪었다. 양부모들은 속수무책으로 아기들을 지켜보았다. 만일 그때 아기들이 세 쌍둥이인 줄 알았더라면 양부모들은 아기들을 한자리에 모이게 한다든지, 아무튼 더 나은 해결방안을 강구하려 했었을 것이다. 

그런데 쌍둥이라는 사실을 까맣게 몰랐기에 아기들의 불안을 충분히 이해해줄 수도 다독여줄 수도 없었다. 그렇지만 속았다는 억울한 마음으로 기획한 양부모들의 집단소송 계획은 이내 좌절되고 말았다. <루이스 와이즈>는 "세 쌍둥이를 한꺼번에 입양시키기 어려웠다"는 원론적 해명을 내놓았고, 법률 전문가들은 소송의 유익이 없다며 양부모들을 주저앉혔다. 시간이 흘러 <루이스 와이즈>는 입양활동을 종료하고 문을 닫았다. 
 
두 번째 단계, 세 쌍둥이는 <루이스 와이즈>의 기록을 토대로 자신들의 생모를 추적했다. 그들의 생모는 출산 직후 아기들을 포기했노라고 말했다. 그녀는 자신이 낳은 세 쌍둥이의 운명에 대해 별로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공교롭게도 그 무렵, 이들 세 쌍둥이 외에도 서로의 존재를 모르는 채 다른 가정에 입양되어 한동안 자라다가 해후한 쌍둥이 사례들이 더 발견됐다(역시 <루이스 와이즈>를 통한 입양). 이같은 수상한 공통점에 대하여 조사하던 중 로렌스 라이트 기자는 수상쩍은 논문 한 편에 주목하게 된다. 그 논문에 따르면, 일란성 쌍둥이들의 분리입양은 인간 정신질환의 유전성 관련 생체실험 연구를 위해 신중히 설계된 실험조건의 일부였다. 일란성 쌍둥이는 동일한 유전자를 지녔기에 이들에게 서로 다른 양육을 제공한다면 유전병력의 강약 여부를 추적관찰할 수 있다.  

세 번째 단계, 마침내 세 쌍둥이들은 자신들이 그와 같은 생체실험 대상자 중 한 사례였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세 쌍둥이 연구는 예일대학 아동발달센터의 피터 뉴바우어 박사가 주관하는 심리학 연구 프로젝트 중 하나였고(1960~1980), 세 쌍둥이가 재회한 시점에 해당 연구 프로젝트는 긴급히 종결됐다. 그러나, 연구 프로젝트는 그렇게 종결됐지만(1980년), 연구결과는 30년이 넘도록 미발표 상태다(2018년). 연구는 수행하되, 결과는 비공개! 왜 그랬을까? 
 
연구방법의 비인간성 때문이었을 것이다. 연구가 아무리 흥미롭고 의미있고 유익할지라도, 연구대상자를 비인간적으로 취급하는 연구는 연구윤리에 저촉되는 까닭에 함부로 진행해서는 안 된다. 이는 나치의 잔혹한 생체실험 이후 무겁게 강제되는 연구윤리 규정이다. 이러한 연구윤리 규정에 비추어볼 때 뉴바우어 박사의 연구 프로젝트는 연구대상(일란성 쌍둥이 아기들)이 이유도 모르는 채 평생 겪을 고통에 대해 아무런 배려도 대책도 없이, 연구자의 이익만을 중심으로 하여 설계된 연구임에 틀림없었다.   

생체실험
 
그런데, 이 다큐멘터리가 제작될 무렵 연구 책임자 뉴바우어 박사는 이미 별세한 뒤여서 만날 수 없었는데, 연구에 참여했던 조교들 두 명이 인터뷰에 응해주었다. 그중 한 명 나타샤 조세프위츠는 이 쌍둥이 실험에서 '유전 vs. 양육'의 요인 중 유전의 강력한 힘을 발견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 결과에 대한 논문이나 저서가 발표되지는 않았다고 말했다. 모름지기 인간이란 자신의 유전과 태생적 특질을 뛰어넘어 성공하고 싶어하는데, 유전적 힘이 더 강하다는 연구결과를 그대로 발표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고 덧붙였다. 
 
또다른 연구조교 로렌스 펄만은, 자신이 세 쌍둥이의 가정을 각각 방문할 때마다 "다른 집에 너의 형제가 자라고 있어"라는 실언(?)을 할까봐 매순간 긴장했어야 했다고 회고한다. 그는 그것이 '연구 금기사항' 중 하나여서, 그걸 위반했다면 그때 연구직 일자리를 잃었을 것이라며, 쑥스럽게 웃었다. 그리고 세 쌍둥이의 생모는 정신질환을 갖고 있었는데, 로렌스는 세 쌍둥이 실험을 포함해 모든 쌍둥이 실험이 계획적으로 정신질환자의 자녀들을 연구대상으로 선택한 건 아니라고 강조했다. 
 
다큐멘터리 <어느 일란성 세 쌍둥이의 재회>에는 세 쌍둥이 중 두 명(바비&데이비드)이 번갈아 등장해 자기들의 기막힌 경험을 소상히 들려준다. 19년 만에 만나 몹시 기뻐했던 것, 셋이 함께 놀러다니며 즐거웠던 사연, 세 양아버지 중 데이비드의 아버지가 서로 다른 환경에서 자란 세 청년을 심리적으로 포용해주었던 일, 세 쌍둥이가 동업하는 식당을 찾아온 손님들이 유쾌한 세 쌍둥이를 좋아했다는 사실 등. 
 
그래서 "음, 그런데 왜 유쾌한 청년 세 명 중 한 명, 에디는 등장하지 않지?" 하는 궁금증이 일어난다. 궁금증은 꽤 오랫동안 풀리지 않다가, 한 시간쯤 영화가 흘렀을 때 해소된다. 에디는 요절했다. 헌데 그의 죽음은 사고사나 자연사가 아니었다. 에디는 셋 중 가장 섬세한 성품을 지녔으며, 세 쌍둥이의 재회 자체에 기대가 컸으며, '부벌라(이디시어: 사랑, 포옹, 뽀뽀)'라는 별명을 지녔던 데이비드의 아버지를 참 좋아했다. 그리고 세 쌍둥이 사이에 다툼이 생겨 동업을 중단했을 때는 에디가 제일 크게 낙담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사랑 많았던 '부벌라'마저 돌아가셨다. 결국 에디는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인생의 신비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어느 일란성 세 쌍둥이의 재회> 스틸 컷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어느 일란성 세 쌍둥이의 재회> 스틸 컷Netflix
 
이제 다큐멘터리는 후반부에서 에디의 죽음과 그 원인을 집중탐구한다. 세 쌍둥이 모두 분리불안에 시달렸고, 소년기에는 신경정신과의 도움이 필요했던 위험한 시기를 겪었다. 이는 세 쌍둥이가 생모의 정신병력을 물려받은 증거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정신병력이 에디의 경우는 청년기를 지나면서까지 지속되었지만('조울증' 진단을 받음), 나머지 두 명에게는 지속되지 않았다. 

유전자가 똑같은 일란성 쌍둥이인데 어째서 그 같은 차이가 발생한 것일까? 다큐멘터리는 에디 아버지의 양육태도가 평생토록 에디를 불안하게 했다는 점을 지적한다. 다른 아버지들에 비해 에디 아버지는 더 엄격했고, 보수적이었다. 그는 양아들과 대화할 때 다정다감하지 않았다. 사랑 많았던 데이비드의 양아버지 '부벌라'와 대조되는 모습을 지녔다. 허나, 다큐멘터리는 이 차이점을 아주 조심스럽게 거론한다. 아버지가 군인 출신에다 보수적이고 엄격하며 불친절한 양육태도를 지녀서 그 아들이 자살했다!? 이렇게 단순히 일반화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기 때문이다. 
 
가만 보면, 개인의 삶을 건강하게 형성하고 건전한 상태로 유지해주는 요인은 '유전&양육'이란 요인 외에도 허다하게 많다. 거기에 삶의 우연적 요소까지 끼어들 테니 '한 개인의 미래를 예언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과업에 다름 아니다. 그러므로 사실상 "유전이냐, 양육이냐" 양자택일을 시도하거나 권고하는 건 별 의미가 없을 수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때때로 '유전이냐, 양육이냐' 사이에서 양자택일을 하려 하고, 이를 일반화하려 하며, 이를 통하여 개인의 미래를 좀 더 확정적으로 예언해보려 한다. 최소한 유전과 양육 사이, 비중의 크기와 무게라도 분간해보고자 한다. 
 
이는 생의 신비, 인간실존의 신비를 신비의 차원에 그대로 놓아두려 하지 않는 결정론적 관점 및 태도라고 말할 수 있다. 인간실존의 신비를 낱낱이 파헤쳐, 나중엔 그 신비를 구체적으로 조절할 능력을 갖추고자 의도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히틀러 집권기 생체실험에 참여했던 나치 의사들이 그랬다. 일제시대 마루타 실험을 주관했던 과학자들이 그랬다. 그리고 어쩌면 쌍둥이 연구 프로젝트의 뉴바우어 박사도 그랬을지 모르겠다.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어느 일란성 세 쌍둥이의 재회 생체실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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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서: 외로운 사람들을 위한 정치수업(위즈덤하우스), 해나 아렌트의 행위이론과 시민 정치(커뮤니케이션북스), 박원순의 죽음과 시민의 침묵(지식공작소), 환경살림 80가지(2022세종도서, 신앙과지성사)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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