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레드헌트>의 한 장면
하늬영상
이 과정에서 당시 주최 측은 절충안을 제안했다. 영화 시작할 때 자막으로 '이 다큐는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라는 문구를 넣자고 한 것이다. 하지만 사실을 바탕으로 하는 다큐의 특성을 부인하는 문구는 치욕적이었다. 감독은 절대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런 식으로 상영을 구걸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후폭풍은 강하게 이어졌다. 심사위원과 자원봉사자들이 사퇴하고 폐막일 수상자가 수상을 거부하면서 행사는 얼룩졌다. 이 여파는 다음해까지 이어지며 1998년에는 행사 자체가 열리지 못했다. 이후 1999년 감독에게 정중한 사과를 하고 작품을 제대로 상영하는 것으로 매듭지어졌다. 조성봉 감독은 "당시 프로그래머 역할을 했던 큐레이터가 제주 출신으로 사학을 전공한 분이었는데, 아버지가 서북청년단 출신이라고 했다"면서 영화와 묘하게 연관성이 있었던 사람이었다고 회고했다.
국가보안법 이적표현물이 될 뻔한 영화부산영화제 상영 후 3개월 뒤 내사를 벌이던 경찰은 1998년 1월 감독을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체포했다. 경찰은 '감독이 적어도 사회주의자이고 그래서 북에서 주장하는 똑같은 논리로 4.3항쟁을 미군정과 이승만의 분단정책에 반대해서 봉기한 정당한 항쟁으로 표현했다'면서 영화를 '이적표현물'로 규정했다.
연행 48시간이 지나자 경찰은 구속영장을 청구했다. 감독은 동시에 영장실질심사를 청구하는 것으로 맞대응했다. 결론은 불구속이었다. 감독은 영장담당 판사 앞에서 "4.3사건이 정당한 항쟁이었고, 학살의 책임이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에게 있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이게 "본인이 이미 혐의사실을 인정하고 있고, 증거 인멸 및 도주의 우려가 없다"고 판단되면서 불구속 수사로 진행된 것이었다.
이는 또 다른 논란으로 작용했다. 앞서 1997년 10월 인권영화제에서 <레드헌트>를 상영한 당시 서준식 인권영화제 집행위원장이 11월 국가보안법 위반 등의 혐의로 영장실질심사 없이 구속됐기 때문이었다. 영화를 만든 사람은 불구속이 됐는데, 상영한 사람은 구속된 것이었다.
서울지법 서부지원은 1999년 9월 "영화와 시나리오를 검증한 결과 사회 통념상으로 미뤄볼 때 이적표현물로 판단키 어렵다고 결론지었다"며 서준식 위원장의 국가보안법 위반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2003년 5월 대법원의 확정 판결이 나면서 <레드헌트>는 국가보안법의 이적표현물 굴레에서 벗어났다. 4.3 항쟁의 진실을 드러내는 과정은 이토록 험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