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김석범 선생을 알게 된 것은 일본의 역사 소설가 시바 료타로의 <탐라기행>에서였다.

제주도의 현대사를 '인간의 비명으로 가득한 역사'라고 표현한 그가 김석범 선생의 대작 <화산도>를 읽고는, 섣불리 제주도의 현대사를 언급할 일이 아니라고 판단하던 대목이 인상적이었다.

"석버미!"

작품을 통해 사뭇 거인으로 생각하고 있던 김석범의 이름을 이렇게 정겹게 부른 사람은 다름 아닌 그의 아내 후쿠다 미도리의 조선인 여자 친구, 현문숙씨였다. 그리고 이런 분위기를 부러움의 시선으로 바라보던 일본인 시바 료타로는 약간의 소외감마저 느꼈다.

<화산도>가 오사라기 지로상을 받던 날, 그 자리에 참석한 시바 료타로가 김석범 선생의 오른쪽 눈에 붙어 있던 반창고에 대해 묻는다. 이유인즉슨 아사히 신문사로부터 오사라기 상 수상 소식을 들은 뒤, 선생은 혼자 축배를 들었다. 기쁜 마음 한쪽으로 맹렬하게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가라앉히지 못하고 돌아오는 길에 그만 자전거를 탄 채로 나뒹굴어 눈에 상처가 난 것이다.

"그게 무슨 분노인지 나 자신도 잘 모르겠습니다."

선생은 이렇게 말하고 입을 다물었다고 한다.

눈에 반창고를 붙이고 오사라기 지로상을 받는 김석범 선생의 모습이 신기루처럼 나타났다 사라지며 나는 <탐라기행>의 책장을 덮고 온라인 서점에서 <화산도>를 주문했다.

장편소설 <화산도>는 결코 독자에게 친절하지 않았다. 4.3이 일어나게 된 사회적 배경에 대한 끈질긴 관심이 없다면 책장이 쉽게 넘어가지 않는 무게감 때문이다.

<순이삼춘>(현기영)이 4.3의 한 가운데에 있다면 <화산도>는 태풍 전야와도 같은 서곡이라 할 수 있다. 주인공 이방근의 자살은 어쩌면 허무주의로 몇 번의 자살을 시도했던 선생 젊은 날의 자화상은 아닐까 하는 생각으로 마지막 책장을 덮었다.

그리고 오늘(4일), 언론 매체에서만 볼 수 있었던 김석범 선생을 강연회에서 직접 만나며 나는 뜬금없이 이방근의 부활을 상상했다.

큰사진보기
▲ 대담 형식으로 준비한 강연회 에는 이석문 제주특별자치도교육감(좌)이 함께 하였으며 김동현 문학평론가(우)가 사회를 맡았다.
ⓒ 고성미	관련사진보기

1925년생, 현재 나이 94세. 김석범 선생은 믿기지 않을 정도로 정정한 모습이었고 목소리 역시 카랑카랑했다.

선생의 기억은 그의 나이 열 서너 살, 일본에서 태어나 처음으로 제주도 땅을 밟던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며 눈시울을 붉혔다. 그 옛날, 기역 받침이 있었던 '한락산'과 '푸른 오름'과 '바닷냄새'를 기억하는 선생의 아스라한 시선 너머에, 제주 소년이 <어린 민족주의자>로 변신하던 생의 첫 충격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선생의 표현대로 당돌하고 건방진 <어린 민족주의자>는 서울을 통해 압록강을 건너 중경 임시정부를 찾아가겠다는 야무진 꿈을 꾸었다. 하지만 몇 년의 세월 속에서 현실은 <어린 민족주의자>를 다시 일본 땅으로 원위치시켜 놓고 말았다.

소년에서 청년이 된 그는 처음으로 절망적인 삶을 그리고 현실을 직시하게 된다.

인생은 과연 살만한 가치가 있는가? 허무주의에 빠져 여러 번 자살을 시도한 적도 있다. 혼자서는 도저히 살아갈 수 없을 것 같았던 그 혼돈의 시기에서 살아내기 위한 몸부림이 바로 <까마귀의 죽음>이었다. 이 소설 속에 방황하던 그의 청춘이 몽땅 들어있다고 회상한다.

"사람들은 묻는다. 제주도 본섬에서 4.3을 직접 경험하지도 않고 어떻게 4.3에 대한 소설을 쓸 수 있었는가? 라고."

이 질문은 일본에서 <화산도>를 발표했을 때도 똑같이 돌아왔었다. 그들이 추구하는 사소설(私小說)의 그 반대편에 <화산도>가 있었기 때문이다. 체험하지 않은 것을 체험한 것처럼 써야 했던 고뇌는 상상 곧 이미지네이션(Imagination)을 낳았고 결국 이것이 <화산도>의 소스가 되어 주었다.

"집필 과정에서 나는 커다란 허구의 세계를 공중에 띄워놓고 나를 거기에 집어넣었다. 상상력은 현실을 돌파하는 힘이 되어 주었고 그 힘이 <화산도>를 만들어 주었다. 따라서 체험하지 않고도 20년이 넘는 세월 속에서 장편을 써낼 수 있었다. 하지만 거짓의 무대를 만들어서는 안 된다. 허구와 거짓은 다르기 때문이다."

<화산도>는 정치 소설이다. 반면, 사소설을 정통으로 내세우던 일본 문학계는 그의 소설에 대하여 순수예술에 반한다며 깍아내렸다. 하지만 그는 순수예술인 체하는 그들에게 이렇게 일침을 날린다.

"너희가 말하는 순수예술이란 정치 사회에서 도망치기 위해 문학을 빙자한 것에 불과하다."

그는 현실을 넘어서 이겨내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순수문학이라고 정의한다.

'4.3정신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선생은 한마디로 일축한다.

"친일파를 중용한 이승만 정부를 부정하는 것이 나의 4.3정신이며 친일파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4.3 정신을 계승할 수 없다!"

그리고 이것은 "4.3 평화공원의 제1관에 누워있는 백비를 일으켜 세워 정명해야 한다"는 선생의 단호한 주장과 연결된다.

큰사진보기
▲ 제주 4·3 평화공원의 제1관 원형의 천장 아래 누워있는 4·3 백비 백비(白碑)란 비문 없는 비석을 이른다. 아직 정명(正名)되지 못한 역사이기에 하얀 관처럼 아무 것도 새겨지지 않은 채 4·3의 진정한 해결을 기다리며 서있기를 거부하고 누워있다. <사진제공 : 제주 4·3 평화공원>
ⓒ 고성미	관련사진보기

"언젠가 이 비에
제주 4.3의 이름을 새기고
일으켜 세우리라.
4.3백비
이름 짓지 못한 역사
Unnamed Monument
백비(白碑). 어떤 까닭이 있어 글을 새기지 못한 비석을 일컫는다.
'봉기, 항쟁, 폭동, 사태, 사건' 등으로 다양하게 불려온 '제주 4.3'은
아직까지도 올바른 역사적 이름을 얻지 못하고 있다.
분단의 시대를 넘어 남과 북이 하나가 되는 통일의 그 날,
진정한 4.3의 이름을 새길 수 있으리라.
-백비 앞에 새겨진 설명문-

과거 이승만과 박정희 그리고 전두환으로 이어진 그들의 막강한 권력 속에서 제주도민은 4.3의 기억을 말살당했다. 지난 50년 동안 아픈 기억을 묻어 놓고 살아야 했던 그 살벌한 시기에 선생은 일본 땅에서 <화산도>를 집필하며 소설이라는 형식으로 저항할 수밖에 없었다.

선생의 일관된 주장은 행동으로도 나타난다. 그의 현재 국적은 남한도 북한도 일본도 아닌 조선족으로 남아있는 것이다. 이데올로기의 회오리바람 속에서 그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고 조선족으로 남아있어야 했던 그의 고독한 생애는 오로지 하나의 점, 바로 분단된 조국의 평화 통일로 향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4.3은 제주도에서 일어났지만, 결코 제주도만의 역사는 아니다. 그것은 통일을 지향하는 우리 대한민국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4.3을 어떻게 정명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곧 '해방 이후의 역사를 우리가 어떻게 평가해야 하는가?'로 이어지며 선생은 그사이에 화두처럼 <혁명>이라는 단어 하나를 징검다리로 놓아둔다.

<화산도>의 도입 부분에 등장하는 "도청 건물 위에서 기세 좋게 펄럭이고 있는 성조기"의 상징은 친일파를 청산하지 않았기 때문에 비롯되었던 4.3의 단초였으며 그것은 지나간 70년의 역사보다 더 아프게 2018년 현재까지 강정마을 미군기지로 이어짐을 통탄한다.

큰사진보기
▲ 2013년 강정마을 해군기지 공사현장 "올 해가 4·3의 70주년인데 작년 강정마을에 미군함 여섯 척이 들어왔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이는 그 옛날 4·3이 비롯되었을 때 이미 제주에 미군이 침투했기 때문이며 더 나아가 해방 후 친일파를 청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강연 중에서-
ⓒ 고성미	관련사진보기

태평양 너머에서 들어온 외적,
제주의 너머에서 들어온 외적,
이에 대한 단죄가 없는 한
4.3은 강정마을의 미군기지처럼 또 다른 형태로 우리 민족을 잠식해 갈 것이다!

두 시간에 걸친 강연을 마무리하는 선생의 목소리에 힘이 주어졌다.

큰사진보기
▲ 제주북초등학교 제주북초등학교(교장 박희순)와 제주특별자치도교육청(교육감 이석문)은 제주 4.3 70주년을 맞아 『화산도』의 작가 김석범 선생을 초청, 제주북초등학교에서 특별 강연을 개최하였다. 2018년 4월 4일 오후 4시~6시까지
ⓒ 고성미	관련사진보기

큰사진보기
▲ 제주북초등학교가 4.3에 특별한 이유 박희순 교장은 "4.3의 도화선이 된 3.1절 기념식 발포사건이 벌어졌던 곳이 바로 관덕정과 제주북교이다. 따라서 4.3의 역사를 말할 때 이 두군데를 빼놓을 수 없다."고 강조하며 "4.3 70주년을 맞이하며 당시의 현장이었던 제주북교에서 교사 및 도민들과 함께 4.3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이야기하는 자리가 중요한 의미가 될 것이라 생각해서 이곳에서 강연회를 개최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학교 옆으로 관덕정의 지붕이 보인다.
ⓒ 고성미	관련사진보기

큰사진보기
▲ 자작나무숲 대표 우상인의 아코디온 연주 외할아버지도 4.3으로 대전 형무소에서 돌아가셨다며 눈시울을 적신 우상인 대표는 <봄날은 간다>와 <잠들지 않는 남도>를 연주하였다.
ⓒ 고성미	관련사진보기

큰사진보기
▲ <잠들지 않는 남도> 의 아코디언 연주를 듣는 김석범 선생
ⓒ 고성미	관련사진보기

큰사진보기
▲ "학생들아 고맙다. 니들하고도 깊이있는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선생은 강연 도중 학생의 질문을 받고 그들과 깊이있는 사상적 토론을 하고 싶은 강한 열망을 내미치기도 했다.
ⓒ 고성미	관련사진보기

큰사진보기
▲ 강연을 마치고 청중과 단체사진
ⓒ 고성미	관련사진보기

큰사진보기
▲ 마지막 촬영을 마치고 <날카로운 눈매, 냉철한 지성인>의 모습이 상징이던 선생이 이렇게 말랑말랑한 표정에 함박 웃음을 지을 수 있었던 이유는 한 세기를 등에 짊어지고 왔던 그의 의무? 책임?을 어느 정도는 내려 놓았기 때문이 아닐까. 이제 나머지는 우리의 몫으로 가져오자.
ⓒ 고성미	관련사진보기

마치며

대담형식으로 마련된 강연은 예상대로 순조롭게 진행되지는 않았다. 김석범 선생의 청력이 약해 질문을 제대로 알아들을 수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제한된 시간 속에서 선생이 우리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가, 그의 기억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래서 그의 기억은 일본에서 태어나 처음으로 제주 땅을 밟았던 십대 소년으로부터 청년기를 거쳐 그의 문학이 틀을 잡아가던 때로 80년의 시공을 넘나들었다. 사회자는 선생의 이야기 흐름을 교통 정리하고 혹시라도 이해하지 못할 청중을 위하여 부연설명을 덧붙이며 나름 애를 썼지만, 솔직히 나는 그런 선생의 모습이 더 좋았다.

선생의 나이 94세. 정상적인 대화가 불가능하다 해도 이상할 것 없는 최고령의 석학으로부터 듣는 강연은 어떤 의미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커다란 복'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4.3 정신을 강조할 때 쩌렁쩌렁하게 울리던 그의 목소리에 강당은 한순간 침넘어가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정도로 고요했고 젊은 학생들과 사상토론을 하고 싶다고 말할 때의 그 열정이 고스란히 느껴지기도 했다. 그의 사고는 여전히 피 끓는 젊음으로 가득했다.

4월 6일 4.3 소설의 두 거장인 김석범과 현기영 작가의 만남을 서울 광화문 분향소에서 마련한다고 한다. 한 세기의 역사를 온 몸으로 받아내온 김석범과 현기영 두 인물을 가까이에서 보고 그들의 육성을 들을 수 있는 만남의 자리를 많은 분들께 권하고 싶다.

큰사진보기

▲ 김석범의 저작 <화산도> 전12권/ 보고사/ 2015년 10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