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70일 파업. 그 후 5년이 지났습니다. 이 시간에도 MBC 구성원들은 싸움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쫓겨나고, 좌천당하고, 해직당하고, 징계받으면서도 끊임없이 저항했습니다. 끝도 없이 추락하는 MBC를, 누구보다 가슴 아프게 지켜보면서도 싸움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이제 그만 '엠X신'이라는 오명을 끝내고, 다시 우리들의 마봉춘, 만나면 좋은 친구 MBC로 돌아오고 싶다고 말합니다.

<오마이뉴스>는 다시 싸움을 시작한 MBC 구성원들의 글을 열두 차례에 걸쳐 소개했습니다. 열세 번째 글은 김장겸 사장 해임 이후 손정은 아나운서가 보내온 글입니다. 

슬라이드 업무거부 선언하는 MBC 손정은-이재은 아나운서 MBC아나운서 27명이 김장겸 사장을 비롯한 경영진과 신동호 아나운서 국장 사퇴를 촉구하며 22일 오전 서울 마포구 상암동 MBC사옥앞에서 '방송거부-업무거부 돌입 기자회견'을 열었다.
업무거부 선언하는 MBC 손정은-이재은 아나운서MBC아나운서 27명이 김장겸 사장을 비롯한 경영진과 신동호 아나운서 국장 사퇴를 촉구하며 22일 오전 서울 마포구 상암동 MBC사옥앞에서 '방송거부-업무거부 돌입 기자회견'을 열었다. 권우성

파업 기간 동안 가장 많이 받았던 질문, "5년 동안 방송을 할 수 없는 상황에서 어떤 마음으로 MBC에서 버텼나요?"에 대한 답으로 시작해야겠다.

내가 입사했던 2006년, MBC라는 회사는 찬란했다. 잘 나가는 회사였다는 뜻이 아니라, 그 구성원들에게서 빛이 났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밤새워서 방송을 준비하고, 하루 종일 토론하고, 더 나은 방송을 만들려는 뜨거운 열기와 의지로 가득했다.

난 부족한 게 많은 어린 연차의 아나운서였지만, 선배들은 내 의견 하나도 소중히 여겼고 방송에 반영해줬다. 방송이 끝나면 바로 모니터링 회의를 하고, 새로 코너를 만들고 그것은 바로 방송으로 구현됐다.

"뉴스 스튜디오의 배경을 밝은색으로 바꿔보면 어떨까요?"
"트위터 실시간 의견을 뉴스에서 소개하면 어떨까요?"
"설날이니 모두 한복을 입고 그동안 코너 진행했던 게스트들과 대담을 해보는 건 어떨까?"
"아침에 간단한 체조하는 코너를 만들어볼까?"


회의 시간에 나온 대부분 의견은 모두의 동의를 거쳐 방송으로 만들어졌다. 뉴스, 시사교양, 라디오, 예능. MBC 구성원들은 대부분 이런 과정으로 프로그램을 만들어나갔기 때문에 '내가 MBC의 주인이다'는 생각을 저절로 갖게 됐다. 'MBC맨'으로서의 자부심. 그건 우리들의 빛나는 자산이었다. 아나운서국도 마찬가지였다. 서로 모니터링해주고 응원해주고 대소사를 함께하고. 그 당시엔 MBC를 떠날 수 있다는 생각을 아무도 하지 않았다. 우린 그저 함께 하는 게 즐거웠다.

 10월 25일 오후 서울시청 앞 서울광장에서 열린 언론노조MBC본부 주최 ‘MBC 파업콘서트-다시 만나도 좋은 친구’에서 아나운서들이 무대에 올라 그동안 아나운서국에서 벌어진 부당한 인사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10월 25일 오후 서울시청 앞 서울광장에서 열린 언론노조MBC본부 주최 ‘MBC 파업콘서트-다시 만나도 좋은 친구’에서 아나운서들이 무대에 올라 그동안 아나운서국에서 벌어진 부당한 인사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권우성

내가 너무 낭만적인 것일까? 미디어 환경이 크게 바뀌었고 MBC의, 지상파의 위상도 추락했지만 아직도 난 그때의 MBC를 잊지 못하고 오히려 그때 이상의 MBC를 만들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 당시에 함께했던 사람들이 돌아와 준다면 가능하다. 대부분 다른 부서로 쫓겨나거나 해직됐지만, 그들이 돌아와만 준다면. 오히려 더 강해지고 깊어졌을 그들이기에 더 멋진 방송을 할 수 있다는 희망. 그건 내가 버릴 수 없는 희망이었고, 그 생각이 나를 버티게 만들었다.  

파업의 시작

내 기억의 시작은 약 석 달 전, 8월 17일로 거슬러 올라간다. 아나운서들이 5년 만에 한자리에 모였다. 2012년 파업 이후 지난 5년 동안 아나운서들은 심의국으로, 주조정실MD로, 라디오편성국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아나운서국 밖에 있던 사람들과 아나운서국 안에 있던 사람들과 5년 만에 재회해 다 같이 엘리베이터를 타고 회의실로 이동하면서, 낯설지만 뭉클함을 느꼈다.

2016년 3월, 아무 방송도 못 하고 무기력감에 휩싸여 지내던 나를, 회사는 사회공헌실로 발령냈다. 예정된 수순이었다. 나는 방송 프로그램이 없었기 때문에 어느 정도 예상했지만, 방송을 하고 있던 황선숙 아나운서와 차미연 아나운서를 아무 예고 없이 심의국과 경인지사으로 발령낸 것은 큰 충격이었다.

사회공헌실에서 지내면서 '5년 전부터 나가 계셨던 선배님들은 정말 힘드셨겠구나, 난 그분들의 마음을 10분의 1도 헤아리지 못했구나'라는 걸 깨달았다. 그런 생각을 하며 애써 잘 지내보려 노력했던 순간들이었다. 그때는 이런 날이 오리라고는 상상조차 못 했다.

우린 파업 전 '제작거부'에 동참하기로 결정했다. 지금의 경영진 아래서 더 이상 이런 뉴스를, 이런 방송을 계속할 수 없다는 것이 많은 아나운서들의 생각이었다. 우리의 결의는 그날 공고해지고 단단해졌다.

8월 18일부터 아나운서 27명은 제작거부(아나운서들에겐 '방송거부'라는 용어가 더 적합하다)에 돌입했다. 그리고 22일, 상암 MBC광장에서 기자회견을 열었다. 발등이 타버릴 것 같았던 뙤약볕 아래서 우리는 그동안 느꼈던 고통과 무력감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날 이후 인터넷 상에서 우리를 뜨겁게 응원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수많은 인터뷰를 거치면서 '아나운서국의 상황이 이 정도인 줄 몰랐다, 이제라도 진심으로 응원한다'는 글들이 쏟아졌다.

<뉴스타파>의 한 코너 '뉴스포차'를 찍던 9월 4일, <뉴스타파> 사무실 겸 '뉴스포차' 스튜디오에 찾아가 해직 기자 박성제 선배를 만난 날이 떠오른다. 박성제 선배는 '뉴스포차'의 MC다. 동기 허일후 아나운서와 나, 박성제 선배가 한 화면에서 방송하는 건 즐겁지만 슬픈 일이었다. MBC에서 아침뉴스 앵커와 뉴스 PD로 함께 뉴스를 만들어나갔던 모습이 아직 생생한데 지금은 아나운서·기자가 아닌 신분으로 MBC에 대해 성토하는 모습이었다. 우린 비교적 담담하게 그간 겪었던 일들을 이야기했지만 마음은 울고 있었다.

슬라이드  2012년 파업 당시의 손정은 아나운서
2012년 파업 당시의 손정은 아나운서권우성

'만나면 좋은 친구'로 돌아가기 위해

우리 아나운서들은 파업 기간 동안 집회도 열심히 했지만 총회를 열어 토론도 열심히 했다. 무너진 아나운서국의 재건을 위해 우린 지혜를 모아야 했다. 지혜를 모으는 과정에서 선배 아나운서들의 연륜과 식견에 감탄하는 일이 많았다. 저런 훌륭한 선배들이 아나운서국에 계시지 않아서 우리가 더 무너질 수밖에 없었구나. 바꿔 말하면 이렇게 훌륭하고 의식 있는 선배들이었기에, 지금의 경영진에겐 위협이 됐을 것이다.

슬라이드 MBC아나운서들 '침묵시위'
MBC아나운서들 '침묵시위'권우성

슬라이드  김범도, 신동진, 차미연, 허일후, 손정은, 강다솜, 이재은 등 언론노조MBC본부 소속 아나운서 28명이 10월 16일 오후 서울 서부지방검찰청에 신동호 아나운서 국장을 ’아나운서 퇴출, 배제, 부당전보 등 부당노동행위’로 고소했다.
김범도, 신동진, 차미연, 허일후, 손정은, 강다솜, 이재은 등 언론노조MBC본부 소속 아나운서 28명이 10월 16일 오후 서울 서부지방검찰청에 신동호 아나운서 국장을 ’아나운서 퇴출, 배제, 부당전보 등 부당노동행위’로 고소했다.권우성

10월 16일, 우린 또 한 번의 기자회견을 했다. 신동호 아나운서 국장을 부당노동행위로 고소한다는 기자회견이었다. 그가 국장으로 있었던 5년 동안 무려 12명의 아나운서가 퇴사했고, 11명의 아나운서가 다른 부서로 별다른 이유 없이 부당 전보됐다. 아나운서들은 처음에는 신동호 국장을 믿었다. 경영진의 요구에 떠밀려 어쩔 수 없이 행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몇 년이 지난 후에야 우리가 순진했음을 깨달았다. 10년, 20년 이상 같은 방에서 생활한 선배이자 후배가 저렇게 앞장서서 선후배 등에 칼을 꽂다니…. 우리는 이런 일이 다시는 일어나선 안 되고, 이런 사람이 다시는 아나운서국 역사에 등장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그를 고소했다.

오늘 우리는 상암 MBC 1층 로비에서 공정방송 정상화를 위한 복귀선언을 한 후, 함께 아나운서국으로 올라갔다. 아나운서국 입구에 있는 Pride of MBC라는 글씨가 보였다. 한때 MBC의 자부심을 가지고 방송했던 때가 있었는데... 저 글자는 저렇게 빛나고 있지만 우린 지금까지 어둠 속에 살았었구나.

MBC 아나운서 “좋은 방송으로 보답하겠다” MBC 노조 소속 아나운서 조합원들은 15일 오전 서울 마포구 MBC 사옥 로비에 모여 업무 복귀에 앞서 공정방송 실현을 위한 결의를 다졌다.
MBC 아나운서 “좋은 방송으로 보답하겠다”MBC 노조 소속 아나운서 조합원들은 15일 오전 서울 마포구 MBC 사옥 로비에 모여 업무 복귀에 앞서 공정방송 실현을 위한 결의를 다졌다.유성호

이제 우리는 '빛나는 MBC의 자부심'으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 기쁨은 잠시 접어두고, 무너진 아나운서국을 재건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 우리는 정신 바짝 차리고 더 방송을 잘해야 하고, 언론인으로서의 소명을 다해야 하며, 만나면 좋은 친구로 시청자에게 다가가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철저히 준비하고, 노력해야 함을 알고 있다.

앞으로도 해결해야 할 문제는 산적해 있지만, 그래도 내가 사랑했던 MBC의 모습을 다시 볼 수 있으리란 생각에 가슴이 벅차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충분히 감사하다. 

그동안 힘들 때마다 상상했던 모습이 있다. 해직 언론인들이 돌아오는 그날이다. 이용마, 정영하, 박성호, 박성제, 최승호, 강지웅. 이들이 상암 MBC 앞에서 복귀 기자회견을 하고 우리 품으로 돌아오는 날. 이제 그날이 머지 않았음을 느낀다.

그리고 모든 기자와 피디, 아나운서, 엔지니어들이 제자리를 찾고 예전처럼 신명나게 방송을 시작한다면 우린 예전보다 더 멋진 방송을 시청자들에게 보여주게 될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MBC엔 존경할 만한 선배님들이 정말 많다. 그야말로 '정말' 많다. 이들이 방송을 시작한다면, 우린 '만나면 좋은 친구'가 될 수 있다. 반드시 우릴 응원해주신 시청자들께 보여드리고 싶다. 변화된 MBC, '진짜' 기본과 원칙을 지키는 MBC의 모습 말이다.

아나운서국으로 복귀하는 손정은 아나운서 전국언론노동조합 MBC 본부가 총파업을 잠정 중단하고 업무 복귀를 시작한 15일 오전 서울 마포구 MBC 사옥 로비에서 경영진의 부당한 인사 전보로 아나운서국을 떠났던 손정은 아나운서가 본연의 업무를 하기 위해 다시 아나운서국으로 출근하고 있다.
아나운서국으로 복귀하는 손정은 아나운서전국언론노동조합 MBC 본부가 총파업을 잠정 중단하고 업무 복귀를 시작한 15일 오전 서울 마포구 MBC 사옥 로비에서 경영진의 부당한 인사 전보로 아나운서국을 떠났던 손정은 아나운서가 본연의 업무를 하기 위해 다시 아나운서국으로 출근하고 있다. 유성호

* 손정은 아나운서는 2006년 MBC에 입사해 <피디수첩> <일밤-신입사원> 진행, <뉴스데스크> 앵커, 라디오 <새벽이 아름다운 이유> <보고 싶은 밤> DJ 등 MBC의 대표적인 간판 아나운서로 활약했습니다. 하지만 2012년 파업 참가 이후 방송에서 배제됐고, 2016년 3월 사회공헌실로 부당전보 됐습니다. 그리고 2017년 11월 15일, 약 21개월 만에 아나운서국으로 복귀했습니다.

손정은 MBC 총파업 어게인 MBC 마봉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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