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70일 파업. 그 후 5년이 지났습니다. 이 시간에도 MBC 구성원들은 싸움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쫓겨나고, 좌천당하고, 해직당하고, 징계받으면서도 끊임없이 저항했습니다. 끝도 없이 추락하는 MBC를, 누구보다 가슴 아프게 지켜보면서도 싸움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이제 그만 '엠X신'이라는 오명을 끝내고, 다시 우리들의 마봉춘, 만나면 좋은 친구 MBC로 돌아오고 싶다고 말합니다.

<오마이뉴스>는 다시 싸움을 시작하는 MBC 구성원들의 글을 싣습니다. 바깥에서 다 알지 못했던 MBC 담벼락 안의 이야기를 들어주세요. 여덟 번째 글은 세월호 참사 당시 목포MBC에서 세월호를 취재했던 박영훈 기자의 글입니다.  

슬라이드  2014년 4월 16일 세월호 참사 사고
2014년 4월 16일 세월호 참사 사고해양경찰청 제공

아주 오래 전 어느 날 도심의 골목길에서 한편의 시(詩)를 만났다.

'밤늦게 귀가할 때마다 나는 세상의 끝에 대해 끝까지 간 의지와 끝까지 간 삶과 그 삶의 사람들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로 시작한다. 식당에 딸린 작은 방 한 칸에서 함께 살아내야 했던 가족. 식구들 가슴 위로 쥐가 돌아다니고 아침녘 밥손님들이 들이닥치기 전에 제각기 직장으로 공원으로 술집으로 뿔뿔이 흩어지는 탈출의 나날을 견뎌내며 속삭이듯 내뱉은 시인의 고백에 쭈그려 앉아 한참을 울었다. '나를 닮아 있거나 내가 닮아 있는 힘 약한 사물을 나는 사랑한다' (김중식 '食堂에 딸린 房 한 칸' <황금빛 모서리> 인용)

어떤 날은 '그날'이 되기도 한다. 머릿속에 지워지지 않는 문신처럼 박힌 그 날. 보도부 책상에 앉아 아침 회의를 준비했다. 제보 전화가 오고 속보 자막이 나오고 첫 보도를 하고 사무실을 나서 선박을 빌려 타고 출발할 때에도 몰랐다. 화창한 봄날이 '그날'이 될 줄은.

바다는 수면을 다리미질 해놓은 듯 평온했다. 맹골수로 해역 안 멀리 배가 보였다. 아니다. 정확히 표현하면 배의 머리만 보였다. 인근 섬마을에서 구조 나온 소형 어선들이 뱃머리를 가운데 두고 빙빙 돌고 있었다. 해경 구조 인력들도 빠른 물살만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슬라이드  16일 오후 진도 인근 해역에서 침몰한 여객선 '세월호' 승객에 대한 수색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16일 오후 진도 인근 해역에서 침몰한 여객선 '세월호' 승객에 대한 수색작업이 진행되고 있다.해양경찰청 제공

2014년 4월 16일 그날 아침

'전원구조' 보도가 나왔다는 걸 타고 있던 선박 위에서 전해 들었다. 선수만 남긴 채 모두 잠겨 물살에 떠밀리고 있는 대형 선박에서 언제 어떻게 누가 그 많은 승객을 구했을까, 이해가 되지 않았다.

참사가 난 맹골수로는 물살이 세기로 이름 높은 내 고향 서거차도의 앞바다다. 구조된 승객들은 서거차도 옮겨진 뒤, 다시 서거차도에서 배로 1시간 이상 걸리는 진도 팽목항으로 이송됐다. 고향 분들에게 전화했다. 대략 몇 명이 구조됐는지. 그리고 참사 해역에서 서거차도를 거치지 않고 바로 진도 팽목항으로 이송된 승객들이 없다는 사실도 알게 됐다. 초기 '전원 구조 오보'는 사고 해역에서 서거차도로 옮겨진 승객의 수와 이 승객들이 서거차도에서 진도 팽목항으로 이송된 수를 중복으로 계산해 빚어진 것이었다. 

세월호 참사 발생 당일 목포MBC 기자 전원은 세월호 참사 취재에 투입됐다. 사고 해역으로, 구조된 승객들이 도착하는 서거차도로, 구급차가 집결한 팽목항으로, 서해지방해양경찰청으로, 목포해양경찰서로, 나머지 2명은 보도부장과 함께 사무실에서 제보와 뉴스특보 등을 챙겼다. 기자들의 초기 취재 내용은 제보 등 창구가 다양한 데다 해경의 공식 확인이 제대로 안 돼 현장별로 조금씩 다른 부분도 있었다.

10명이 안 되는 목포MBC 보도부 기자들은 다른 결과물들에서 답을 찾기 위해 노력했고, 오류를 바로 잡아 나갔다. 현장 보도와는 별도로 당시 목포MBC 보도부장 등이 지역MBC뉴스를 총괄하고 있는 부서인 MBC 보도국 전국부에 "전원구조가 아니니 확인하라"고 수차례 알렸다. 하지만 무슨 까닭인지 우리의 목소리는 허공의 메아리였다.

세월호 전원 구조 오보 세월호 침몰 당일, MBC에서 처음으로 세월호 전원 구조 오보가 나간 후 다른 언론사들도 '전원 구조' 오보를 내게 된다.
세월호 전원 구조 오보세월호 침몰 당일, MBC에서 처음으로 세월호 전원 구조 오보가 나간 후 다른 언론사들도 '전원 구조' 오보를 내게 된다.MBC

'전원구조 아니다' 외면하더니... '그러고 나니 행복하니?'

목포MBC 취재진은 세월호 참사 당일 언론사 중 가장 먼저 맹골수로 해역에 도착했다. 현장에 나가 있는 자사 기자를 부르는 게 너무나도 당연했지만, 당시 MBC 보도본부 책임자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지역을 가장 잘 아는 목포MBC 취재진 누구도 서울의 취재 기자와 카메라 기자들이 정확히 어디에 배치됐는지 알 수가 없었다. 당시 MBC 보도본부의 콘트롤타워는 박근혜 정부의 청와대처럼 무너져 제대로 작동을 하지 않았다.

3년여가 지났다. 나는 세월호 취재 기간 아직도 정확히 그 의중을 모르는 어떤 타의(他意)로 보도부를 떠났다가 얼마 전 다시 돌아왔다. 그사이 부패한 권력에 의해 강요된 우여곡절을 겪은 세월호는 상처투성이가 돼 육지로 옮겨졌다. 하지만 침몰 원인조차 여전히 속 시원히 밝히지 못하고 있다. 진상 규명과 처벌은 말할 것도 없다. 내가 본 참사 당일 뱃머리만 남긴 세월호 주변을 빙빙 돌던 모습으로부터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슬라이드 "죽은 방송 MBC"
"죽은 방송 MBC"이희훈

슬라이드  2014년 5월 7일 오후 서울 여의도 MBC 앞에서 열린 세월호 침몰사고 실종자 무사귀환과 희생자 추모 및 MBC 규탄 국민촛불집회.
2014년 5월 7일 오후 서울 여의도 MBC 앞에서 열린 세월호 침몰사고 실종자 무사귀환과 희생자 추모 및 MBC 규탄 국민촛불집회.이희훈

슬라이드 "MBC는 어디까지 갈 것인가" 세월호참사 희생자/실종자/생존자 가족대책위와 국민대책회의 회원들이 2015년 1월 8일 상암동 MBC사옥앞에서 'MBC 보도행태 규탄 및 선체인양 촉구 기자회견'을 열었다.
"MBC는 어디까지 갈 것인가"세월호참사 희생자/실종자/생존자 가족대책위와 국민대책회의 회원들이 2015년 1월 8일 상암동 MBC사옥앞에서 'MBC 보도행태 규탄 및 선체인양 촉구 기자회견'을 열었다. 권우성

변하지 않은 건 또 있다. 아니 더 악랄하게 변한 게 있다. 공영방송을 망가트린 MBC 보도본부의 책임자들은 최근 MBC 세월호 전원구조 오보의 책임이 자신들이 아닌 언론노조 소속 조합원 기자들에게 있다며 실명까지 거론하는 비난 성명을 냈다. 세월호 유족들을 비난하고, 조롱하고 세월호 진실을 알리려는 뉴스를 외면한 자들이, 평생 사죄를 해도 모자랄 자들이 내 탓이 아니라고 일선 기자들에게 책임을 돌리며 손가락질을 하고 있다. 나는 묻는다. '그러고 나니 행복하니?'

고백하건대 세월호 참사 이후 나는 보도를 잘 할 자신이 없어졌다. 슬픔을 정면으로 응시할 자신이 사실은 없다. 그럼에도 한 가지는 분명히 알고 있다. 불의의 시절에도 누군가는 반드시 기록해야 한다는 것을. 영화 <공범자들>을 혼자 봤다. 가장 먼저 현장에 달려갔던 내가, 기자라는 내가 잘했다면, 어떻게 달라졌을까, 어두운 영화관에서 소리 없이 눈물을 흘렸다. 여전히 부끄럽고 미안하고 죄스럽다. 2014년 4월 16일 '그날'을 더 이상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은 그 날'로 남겨두어선 안 된다.

슬라이드  8일 오후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방송독립 연대파업 출정식’이 파업중인 언론노조 MBC본부와 KBS본부 조합원들을 비롯한 언론노조 조합원들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8일 오후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방송독립 연대파업 출정식’이 파업중인 언론노조 MBC본부와 KBS본부 조합원들을 비롯한 언론노조 조합원들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권우성

오래 전 어느 날 만났던 시(詩)를 파업길에서 다시 만났다. 미수습자가 모두 수습되고 진상 규명이 명백히 이뤄진 세월호와 국민의 품에 안긴 MBC를 생각했다. 

'......나를 닮아 있거나 내가 닮아 있는 힘 약한 사물을 나는/ 사랑한다 철로의 무덤 너머엔 사랑하는 西海가 있고/ 더 멀리 가면 中國이 있고 더더 멀리 가면 印度와/ 유럽과 태평양과 속초가 있어 더더더 멀리 가면/ 우리집으로 돌아오게 된다 세상의 끝에 있는 집/ 내가 무수히 떠났으되 결국은 돌아오게 된, 눈물겨운.'

 목포MBC 박영훈 기자
목포MBC 박영훈 기자박영훈

* 박영훈 기자는 1997년에 목포MBC 보도부 기자로 입사했습니다. 2014년 7월 뚜렷한 이유 없이 목포MBC 전략사업부로 전보됐다가 올해 3월 목포 MBC 보도부로 돌아왔습니다. 2015년 목포MBC지부 노조위원장을 역임했으며, 현재 전국MBC기자회장입니다.

MBC 총파업 목포 세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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