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이비젼
내가 장진 감독을 처음 본 것은 어떤 TV오락프로의 <헐리웃 리포트>란 코너에서였다.(나중에 기억을 더듬어보니 ‘좋은 친구들’인걸 기억해냈다) 그는 그 코너에서 아주 태연자약하게(?) 잠실의 놀이공원을 디즈니랜드로 둔갑시키면서 빙글빙글 웃고 있었다. “뭐야? 꽤 실없는 녀석인데 그래?”하고 바라보던 그가 생각하던 웃음의 미학은 어느 쯤에 있길래 이렇게 뻔뻔스럽나 의아해했던 기억이 난다.

그런 그가 대학로에서는 꽤 알아주는 극작가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불과 몇 달 지나지 않아서였다. 더구나 실없다고 생각했던 그가 저 유명한 연극 <택시 드라이버>의 연출자라는 것에 또 한번 놀라고 말았다.

그것도 모자라 그는 대학로가 몹시도 비좁았는지 마침내 영화계에 뛰어들었다. 그가 맡은 첫 장편영화는 <기막힌 사내들>. 연극과 영화라는, 한 데 버무리기 껄끄러웠던 두 요소를 적절히 섞어 만든 이 영화는 그가 처음 대중에게 선보인 ‘장진’식 유머의 신호탄이었다.

그가 가진 이력 때문인지 그의 영화에 다수 출연하고 있는 배우들 또한 그의 연출력에 매료되었거나 무조건적으로 신봉하게 된 대학로 출신이 많다. 그 중에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신하균, 정재영, 임원희, 류승범이란 배우를 오로지 ‘장진’ 덕택으로 만날 수 있게 된 것이다.

‘장진’식 유머는 종종 반대되는 상황의 반목에서 출발한다. <간첩 리철진>에서 남으로 넘어온 간첩이 택시를 타고 가다 강도들에게 공작금을 털리는 대목이나 <기막힌 사내들>에서 사건이 일어나는 곳마다 우연히 나타나는 인물이 용의선상에 오르는 부분은 모두 의지적 인간과 우연한 사고가 맞딱뜨리게 되는 전형적인 상황극을 연출한다.

그가 제작과 각본을 쓴 <묻지마 패밀리>는 이러한 ‘장진’식 유머가 빛을 발하는 작품이다. 제목만 봐도 굉장한 자신감이 넘쳐흐른다. 이른바 장진 감독이 거느리고 있는 ‘맨파워’를 과감하게 보여주겠다는 결의일텐데, 이러한 자신감의 근거는 영화 속에서 찾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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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 등장하는 단편 <사방에적>은 우연한 상황과 대치되는 각각의 인물들이 가진 사연들이 교묘하게 맞물려 여러 인간들을 의지를 조롱하고 있다. 모텔에 투숙한 810호 남자는 외도한 애인에게 수면제를 먹여 재운 후 그녀의 몸에 휘발유를 붓고는 불을 붙이려고 한다. 이제 불만 붙이면 끝나는 일이다. 그런데, 하필이면 고장난 라이터가 말썽.

그가 카운터에 성냥을 부탁하는 사이, 앞방에는 조폭들이 들어서고 불륜현장을 덮치기 위해 경찰을 대동하고 나타난 남편과 두목을 죽이기 위해 킬러는 810호를 방문하는, 복잡한 것 같지만 하나도 억지스럽지 않게 관객을 웃기기 위한 하나의 ‘상황극’을 기막히게 연출해낸다. 익숙하다는 듯 장진의 장기가 고스란히 살아나는 단편이다.

또, <내나이키>라는 단편은 앞의 <사방에적>과는 조금 성격이 다른 에피소드이다. 영화는 한 남자의 내레이션으로 시작하는데, 80~90년대를 살았던 남자아이라면 누구나 갖고 있었던 ‘나이키’ 신발에 대한 동경을 재미나게 그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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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적으로 억압받고 경제적으로 어려웠던 80년대, 중학생 명진은 같은 반 반장이 갖고 있는 나이키 신발이 늘 부럽다. 그러나, 택시운전을 모는 아버지와 늘 돈에 쪼들리는 어머니, 전교 1등을 꿈꾸는 큰 형과 학교의 ‘짱’이 되고 싶어하는 작은 형, 그리고 할머니와 함께 사는 명진에게 그 꿈은 요원할 뿐이다. 돈을 모아 사보려고 했지만, 그마저도 동네 나쁜 형들한테 빼앗기고 만다.

정말 안 어울린다고 생각했던 80년대 교복을 입은 모습만으로도 그 시대에 있을법한 고교생의 ‘아우라’가 그대로 베어나오는 듯한 학생 신하균, 정재영의 껄렁한 행동을 확인하는 순간, 배꼽을 움켜쥐지 않을 수 없다. 또 얼굴 자체가 캐릭터인 큰 형 임원희와 작은 형 류승범도 이 영화를 지탱하는 보편적 정서를 유감없이 드러나게 해준다.

그러나, 마지막으로 소개되는 <교회누나>라는 에피소드는 끝 부분에 등장할 나름대로의 반전을 숨기기 위해서였는지 처음부터 멜로 형식을 취하고 있다. 첫 휴가를 나온 남자는 교회를 다닐 적에 짝사랑했던 누나가 시집을 간 것이 못내 아쉽기만 하다. “누나, 행복해?” 하며 묻는 남자에게서 쓸쓸함을 발견한 누나는 마음이 있으면서도 누나, 동생했었던 학창 시절의 틀을 깨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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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종일관 화면이 한 템포씩 바뀌며 어딘가 의뭉스럽기까지 한 두 남녀 사이의 알싸한 추억을 수채화처럼 아름답게 그리고 있는 까닭은 다름아닌 이 영화가 보여주려고 하는 숨은 반전과 맞닿아 있다.

이렇듯 <묻지마 패밀리>는 세 편의 에피소드를 통해서 맛깔스러운 이야기들을 보여주고 있다. “이래도 안 웃을래?”하는 ‘장진’식 유머가 원기를 회복하는 순간이다. 그를 맹종하다시피 따라온 ‘수다 패밀리’의 아기자기한 난장판에 같이 동참하실 의향은 없으신지?

덧붙이는 글 <묻지마 패밀리> / 감독 박상원(사방에적)
박광현(내나이키) 이현종(교회누나)/ 주연 류승범 임원희 신하균
정재영/ 99분 / 2002 / 아이비젼/ 15세 이상 관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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