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아침에 개쩌는 남자가 된 사나이가 있다. 2022년 5월, 미국프로골프(PGA) 챔피언십에서 가장 주목받은 선수는 타이거 우즈였다. 그가 챔피언십 둘째 날, 첫 홀 두 번째 샷을 날리는 장면이 여러 통신사와 신문사를 통해 대대적으로 보도됐다. 갤러리 코앞에서 샷을 치는 우즈의 모습은 끝내주는 그림이었으니까 말이다. 우즈가 골프채를 휘둘렀을 때 뒤에 늘어선 갤러리들이 저마다 폰을 꺼내들어 그의 샷을 담으려 한 건 자연스런 일이다.
 
그날 사진이 보도되고 예상치 않은 반응이 불거져 나왔다. 골프채를 휘두른 우즈보다 그 뒤의 어느 갤러리에게 관심이 쏟아졌다. 수많은 갤러리가 폰을 높이 들고 그의 샷을 찍으려 하는 가운데, 오로지 한 사내만이 폰을 보지 않고 있었다. 사내는 우즈가 그러했듯 맨 눈으로 날아가는 공을 지켜보고 있었다. 두 손으로 미켈롭울트라 맥주를 꼭 쥐고 있는 채였다.
 
골프를 좋아하는 중년 사내 마크 라레틱이 미켈롭 가이로 거듭난 순간이었다.
 
절대쌍교 포스터

▲ 절대쌍교 포스터 ⓒ 노바미디어

 
사라지는 낭만, 그를 가장 잘 살린 영화
 
이 짧은 이야기는 현대사회에서 빠르게 사라지는 가치를 주목하게 한다. 바로 낭만이다. 미켈롭 가이가 주목받은 건 다름 아닌 낭만 때문이다. 소실되어가는 낭만을 간직한 사내, 우리는 그런 모습을 매우 오랜만에 보았으므로 그에게 환호했다. 그렇다면 낭만이란 무엇인가. 수많은 갤러리들에겐 없고 미켈롭 가이 마크 라레틱에게 있었던 낭만이란 도대체 무어란 말인가.
 
현실세계의 법칙에 얽매이지 않는 태도를 우리는 낭만이라고 부른다. 때로는 감상적으로, 때로는 이상적으로, 이해관계에 구애받지 않고 살아가는 광경을 낭만이라 말한다. 공백을 허용하지 않는 건 권력만이 아니다. 가치도 마찬가지다. 낭만이 비운 자리는 다른 가치가 채우게 마련이다. 낭만이 사라진 자리에 들어선 것, 그건 바로 이익과 합리성이다.
 
우즈의 샷을 폰에 담은 이들은 그 광경이 제 안구와 뇌를 거쳐 사라지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리하여 폰 안에 담아 때때로 꺼내보길 원했다. 누가 그를 가리켜 잘못이라 할 수 있을까. 선택일 뿐이다. 합리적인 선택 말이다. 그러나 낭만을 아는 이라면 그 순간을 담지 않는 이가 누리는 것을 담은 이가 영영 맛보지 못할 걸 안다. 낭만이란 그런 것이다. 무용하고 아름다운 것, 이 시대 소실되어 멸종위기에 놓인 것, 그러나 그럴수록 가치 있는 것 말이다.
 
<절대쌍교>는 홍콩영화가 정점에 있던 1992년 나온 무협영화다. 감독은 <무간도> 시리즈를 비롯해 수많은 홍콩영화에 주조연으로 출연한 배우 증지위다. 제작, 연출, 배우 등 영화산업의 여러 면모를 가리지 않고 소화하는 여러 홍콩영화인처럼 증지위 또한 그와 같은 길을 걸었다. 제작자로는 <금지옥엽>을, 감독으로는 <최가박당> 시리즈를 성공시킨 그다. <절대쌍교>는 아쉬움을 남긴 <오복성 2> <안락생포>에 이어 증지위가 제 감독으로서의 자질을 시험대에 올렸단 점에서 의미 깊은 작품이다.
 
절대쌍교 스틸컷

▲ 절대쌍교 스틸컷 ⓒ 노바미디어

 
폼생폼사, 멋이 없다면 홍콩영화가 아니지!
 
<절대쌍교>는 당대 홍콩영화가 담뿍 품고 있던 가치, 즉 낭만이 서려 있는 작품이다. 흔히 1980년대부터 1990년대에 이르는 홍콩영화를 두고 낭만성이 극대화되어 있다고들 평하는데, 이는 당대 홍콩영화가 멋있는 영화를 찍는 데 혈안이 되어 있었던 탓이다. 즉, 그 시절 홍콩영화는 멋이 있었다. 관객들은 멋이 있어서 홍콩영화를 좋아했고, 멋을 기대하고 홍콩영화를 소비했다. 멋이 없는 영화, 그건 홍콩영화가 아니었다. 때문에 수시로 설득력이 떨어지거나 지나치게 자기중심적이고 유치한 작품이 나오기도 하였으나 그조차도 멋없고 잘 만들어진 영화보다는 나은 취급을 받았다. 그것이 다시 그대로 홍콩영화의 낭만을 이루었다. 그런 시절이었다.
 
무협은 그중에서도 낭만성이 특화된 장르다. 왜 아니겠는가. 무협의 세계관은 관이 다스리는 속세와 무인들이 살아가는 무림으로 세계를 나누어 이해한다. 영토가 나뉘어 있는 것이 아니다. 같은 영토 아래 속세와 무림이 공존하는 것이다. 황제 이하 관료들이 다스리는 관과 무림 사이엔 서로 개입하지 않는 관무불가침의 약속이 지켜지고 있다. 수많은 무협 작품이 이를 깨는 상황을 소재로 삼고 있으나 어디까지나 예외적 상황의 문학적 활용일 뿐이다.
 
그렇다면 무림의 세계는 어째서 낭만적인가. 전근대 세계관에서 생산은 대부분 영토에 귀속되게 마련이다. 영토와 그곳에서 거둬지는 조세는 황제의 것이다. 말하자면 무림은 생산물에 개입하지 않는다. 무림이 다루는 것은 무예, 그리고 명예, 의와 협 따위의 것이다. 말하자면 속세에서 사라져 가는 것들이 무림인들의 관심이다. 무용하지만 아름다운 것, 즉 낭만과 무협물이 붙어 다닐 밖에 없는 이유다.
 
절대쌍교 스틸컷

▲ 절대쌍교 스틸컷 ⓒ 노바미디어

 
오로지 멋, 무조건 낭만... 그런 시대가 있었다
 
<절대쌍교>는 그 낭만에 집중한 작품이다. 1960년대 쓰여 선풍적인 인기를 끈 고룡의 동명 무협소설을 원작으로, 강소어(유덕화 분)와 화무결(임청하 분)의 비틀린 관계를 다루었다. 원작에선 두 사람이 전대 무림고수의 관계 때문에 찢어져 길러진 쌍둥이로 등장하지만, 영화는 이를 바꾸어 강소어는 무림고수들의 자식으로, 화무결은 간택돼 길러진 제자로 등장시켜 연인으로 풀어간다.
 
영화는 누명을 뒤집어쓰고 10대 악인으로 몰려 숨어사는 전대의 고수들 가운데서 길러진 강소어가 성인이 되어 첫 무림 출두를 하는 이야기를 담아낸다. 천하의 고수들을 불러 모아 절대고수를 뽑는 무림대회에 소어아가 출전하게 된 것이다. 그는 제 출생의 비밀과 엮여 있는 이화궁 수제자 화무결과 일대 대결을 치르게 되고, 그를 견제하는 무림맹주의 아들 강옥랑(오진우 분) 등의 위협을 받게 된다. 그 가운데서 소어아와 화무결은 서로에게 끌림을 느끼고 사랑의 힘으로 모든 난관을 격파해 나가는 것이 <절대쌍교>의 줄거리가 되겠다.
 
단언컨대 훌륭한 영화는 못되는 작품이다. 앞선 작품들에서도 노출된 부족한 연출력으로 끝내 감독의 길을 포기하게 되는 증지위는 여기서도 역량부족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장면과 장면 사이 널을 뛰는 분위기와 늘어지고 서두르길 반복하는 편집이 영화를 무협소설 빨리보기 쯤으로 여기게끔 한다. 그리하여 명성 높은 원작과 어마어마한 출연진을 갖추고도 <절대쌍교>는 당대 무협영화의 걸작, 이를테면 <소오강호> <신용문객잔> <백발마녀전> <동사서독> 사이에 둥지를 틀지 못하게 되었다.
 
절대쌍교 스틸컷

▲ 절대쌍교 스틸컷 ⓒ 노바미디어

 
2024년 한국영화는 무엇을 품었는가
 
그러나 <절대쌍교>는 독특한 매력을 지녔다. 이 영화가 지닌 모든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낭만성 만큼은 단단히 붙들고 있는 것이다. 고룡의 원작 자체도 그렇거니와, 영화에서 남녀관계로 설정된 두 주인공은 온갖 위험에도 불구하고 서로에 대한 마음을 지켜낸다. 가진 것 없는 사내를 위하여 당대 일류 문파의 후계자인 화무결은 기꺼이 제 경력의 단절을 각오한다. 소어아 또한 그 마음에 응답하여 목숨을 걸고 그녀를 지키려 든다. 성공과 명예, 대단한 비급도 그들에겐 중요치 않다. 시아버지는 며느리를 위하여 제 모든 것을 기꺼이 내놓고, 스승은 제자를 위하여 위험을 무릅쓴다.
 
오로지 이익을 위해 도의를 저버린 악당들은 무참한 최후를 맞이한다. 제 억울함을 감당하며 꿋꿋이 살아간 의인들은 마땅한 대접을 받는다. 현실사회에선 좀처럼 달성되지 않는 정의로움이 <절대쌍교>의 세계 속에선 쉬이 이뤄진다. 여전히 홍콩무협으로부터 매력을 느끼는 관객들이 있는 이유다. 이 장르가 죽지 않고 생명력을 발휘하는 이유다.
 
<절대쌍교>는 그래서 적어도 멋을 간직하고 있다고 평할 만하다. 그와 같은 가치를 가진 작품이라면 시간이 흘러도 나름의 생명력을 지켜낼 수 있음을 알게 한다. 그렇다면 2024년 한국영화는 과연 어떤 가치를 가지고 있는가. 전 세계 작은 문화들을 집어삼켜 몸집을 키우는 할리우드와 빠르게 변화하는 문화계의 흐름에 대항하여 오늘의 한국영화가 가졌다 자부할 수 있는 가치는 무엇인가. 이에 대한 답변이야말로 시간의 엄혹한 세례로부터 한국영화를 지켜내는 무기가 되어줄 테다.
덧붙이는 글 김성호 평론가의 브런치(https://brunch.co.kr/@goldstarsky)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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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영화평론가.서평가.기자.3급항해사 / <자주 부끄럽고 가끔 행복했습니다> 저자 / 진지한 글 써봐야 알아보는 이 없으니 영화와 책 얘기나 실컷 해보련다. / 인스타 @blly_kim /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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