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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 잃은 엄마의 복수 대상이 된 '뜻밖의' 인물들

[그 시절,우리가 좋아했던 영화] 방은진 감독의 장편 데뷔작 <오로라 공주>

21.07.04 11:54최종업데이트21.07.04 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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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에서는 끔찍한 일이지만 사실 영화에서 '복수'만큼 편한 소재도 드물다. 일단 이야기의 개연성을 만들기가 비교적 수월하고 관객들을 설득하기도 편리하다. 다소 자극적인 표현방식도 '복수'라는 주제가 들어가면 관객들의 이해를 구할 수 있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2000년대 초, 중반까지 복수라는 소재가 금기시되던 시절이 있었다. 칸영화제 심사위원 대상에 빛나는 박찬욱 감독이 대놓고 '복수'라는 소재로 3부작 영화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특히 여성의 복수를 담은 영화는 더욱 만들기 힘들었다. '복수3부작' 중 최고의 걸작으로 꼽히는 <올드보이>의 열풍이 채 가시기도 전에 박찬욱 감독이 여성을 주인공으로 한 복수 3부작의 마지막 영화를 차기작으로 만들겠다고 선언했기 때문이다. 여기에 외국에서도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이 여성 주인공을 앞세운 복수 액션 영화 <킬빌>이 2003년과 2004년에 걸쳐 개봉됐다. 자칫 여설픈 여성복수극을 만들었다간 두 명장의 작품과 비교될 수밖에 없었다.

그런 가운데 2005년 용감하게 여성의 복수를 소재로 삼은 영화를 만든 여성 감독이 있었다. 바로 <301 302>로 1995년 청룡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던 방은진 감독이었다. 그리고 90년대를 풍미했던 최고의 여성가수 엄정화가 주연으로 합류해 한 아이의 엄마였던 평범한 여성의 잔혹한 복수를 다룬 영화 <오로라 공주>가 탄생했다.
 

<오로라공주>는 <용의자X>,<집으로 가는 길> 등을 연출한 방은진 감독의 장편 데뷔작이다. ⓒ 시네마 서비스

 
로맨틱 코미디에 특화된 여성배우의 파격변신

끼가 많은 가수가 연기에 도전한다거나 노래 잘하던 배우가 음반을 발표해 가수와 배우를 겸업하는 경우는 많지만 엄정화처럼 두 가지를 동시에 시작하는 경우는 흔치 않다. 엄정화는 1993년 영화 <바람 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를 통해 배우로 데뷔하면서 OST <눈동자>가 들어있는 1집을 동시에 발표했다. 하지만 영화가 흥행에 실패한 반면에 <눈동자>는 많은 사랑을 받으면서 엄정화는 대중들에게 가수로 더 많이 기억됐다. 

이후 엄정화는 <배반의 장미>, <포이즌>, <몰라>, <페스티벌>, <다 가라> 같은 히트곡을 연이어 발표하며 90년대 중·후반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최고의 여성 솔로가수로 이름을 날렸다. 물론 중간중간 드라마 <자매들>과 <폴리스>, 영화 <마누라 죽이기> 등에 출연했지만 배우로서는 확실한 대표작을 만나지 못했다. 그렇게 배우의 이미지가 점점 지워질 때쯤 엄정화는 유하 감독과 다시 한 번 손을 잡고 영화 <결혼은, 미친 짓이다>에 출연했다.

<결혼은, 미친 짓이다>를 통해 배우로서 존재감을 되살린 엄정화는 <싱글즈>, <어디선가 누군가에 무슨 일이 생기면 틀림없이 나타난다 홍반장>같은 로맨틱 코미디 장르에서 강세를 보였다. 이는 황정민과 출연한 옴니버스 영화 <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일주일>까지 이어졌다. 그렇게 배우 엄정화의 이미지가 밝고 명랑한 로맨스 배우로 굳어지고 있던 2005년, 그녀는 <오로라 공주>를 통해 끔찍한 연쇄 살인범으로 변신을 시도했다.

딸을 잃은 슬픔으로 세상을 향한 복수를 하는 외제차 딜러 정순정을 연기한 엄정화는 <오로라 공주>를 통해 백상예술대상 여우주연상 후보에 오르며 연기력을 인정받았다. 하지만 <친절한 금자씨>와 3개월 간격으로 개봉한 <오로라 공주>는 전국 94만 관객에 그치며 흥행에서는 큰 재미를 보지 못했다(영화관입장권통합전산망 기준). 물론 <친절한 금자씨>와 <오로라 공주>는 '여성의 복수'라는 소재만 같을 뿐 두 영화가 가진 매력은 전혀 다르다. 

<오로라 공주> 이후 다양한 캐릭터를 연기할 수 있는 배우로 성장한 엄정화는 2012년 <댄싱퀸>으로 백상예술대상 여우주연상, 2014년 <몽타주>로 대종상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며 배우로 성공적인 커리어를 써 내려 갔다. 이후 가수 활동이 뜸했던 엄정화는 작년 프로젝트그룹 환불원정대의 맏언니로 활약하며 건재를 과시했다. 가수로도 배우로도 정점을 찍은 엄정화는 대한민국 연예계 최고의 여성 엔터테이터로 불리기에 손색이 없다.

딸 죽음에 관련된 사람 모두가 복수의 대상
 

<오로라공주>의 백미는 역시 로맨틱 코미디에 특화된 배우였던 엄정화의 파격변신이었다. ⓒ 시네마 서비스

 
흔히 복수영화에서 복수의 대상으로 지목되는 인물은 주인공의 불행을 만든 원인제공자에게 몰리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친절한 금자씨>에서는 금자의 아이를 유괴한 백선생(최민식), <올드보이>에서는 '말이 너무 많아서' 누나를 죽게 한 오대수(또 최민식), <악마를 보았다>에서는 약혼녀를 죽인 장경철(계속 최민식)이 복수의 대상이었던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오로라 공주>에서 정순정(엄정화 분)이 생각하는 복수의 범위는 훨씬 광범위하다.

정순정은 딸의 죽음에 간접적으로 영향을 끼쳤다고 생각하는 사람 모두를 복수의 대상으로 삼았다. 민아(이지수 분)를 데리러 가는 길에 발생한 접촉사고에 욕설을 퍼부으며 시간을 끈 장명길(박효준 분), 가게에 홀로 남겨진 민아를 내쫓고 나가버린 나재근(김용건 분)과 최신옥(현영 분), 돈이 부족하다고 민아를 도로 한복판에서 내리게 한 택시기사 박달수(김익태 분), 민아가 따르는 유치원 언니를 구박하는 계모(유혜정 분)가 모두 정순정의 복수대상이다. 

영화 시작 5분 만에 살인을 저지르는 정순정은 최신옥과 나태곤, 박달수를 잇따라 살해한다. 그리고 범행 현장마다 오로라 공주 스티커를 남긴다. 이혼한 남편이자 민아의 아빠 오성호 형사(문성근 분)에게 보내는 메시지다. 경찰이면서도 유괴범으로부터 딸을 지키지 못한 오형사에게도 책임이 있다는 의미다. 오형사는 전 부인을 쫓으면서도 딸을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이 점점 깊어진다.   

정순정은 유괴 살인범에게 보호관찰을 받게 만든 김우택 변호사(장현성 분)를 크레인에 매달고 공개인질극을 벌인다. 결국 정순정은 경찰에게 체포되지만 보호관찰 판정이 내려지고 오형사가 성경책 속에 숨겨 반입시킨 흉기로 살인범 홍기범(박성빈 분)을 살해한다. 그리고 모든 복수를 끝낸 정순정은 마지막으로 자신의 목을 그어 버린다. 딸의 죽음에 있어 가장 큰 책임이 있는 자신을 용서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오로라 공주>의 우울한 분위기를 더욱 극대화해 준 것은 영화 내내 흘러 나오는 어둡고 우울한 분위기의 음악들이다. <오로라 공주>의 음악 감독은 베이시스 출신의 가수 겸 피아니스트 정재형이 맡았다.

피해자이면서 가해자였던 복수의 대상들
 

<오로라공주>에서 현영이 연기한 최신옥은 민아에게 친절을 베풀지 않았다는 이유로 복수의 대상이 된다. ⓒ 시네마 서비스

 
<오로라 공주>에서 정순정에게 살해 당하는 인물들은 복수극에서 매우 독특한 위치에 있다. 주인공 정순정 입장에서는 딸을 죽음으로 내몬, 죽어 마땅한 나쁜 사람들이지만 '제3자의 시선'에선 꼭 그렇지만은 않다. 하지만 정순정의 분노는 이미 상식의 범위를 뛰어 넘었고 민아의 유괴 살인사건에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5인은 복수의 대상이 된다.

영화 시작 5분 만에 가장 먼저 살해 당하는 배연희는 관객들이 가장 끔찍해 하면서도 통쾌해 하는 피해자다. 화장실에서 양딸에게 아무렇지도 않게 손찌검을 하고 태연하게 전화를 받고 웃는 장면을 보면 관객들도 덩달아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 결국 정순정에 의해 가장 먼저, 가장 잔인하게 살해 당한다.

불륜커플 나재근과 최신옥은 매장에 있던 민아를 쫓아내고 문을 잠그고 외출한 죄로 살해 당한다. 물론 어린 아이를 혼자 밖으로 쫓아내고 나가버린 것은 매정한 일이지만 그렇다고 이들이 죽을 죄를 저지른 것은 결코 아니다. 제비 연기에 특화된 김용건은 말할 것도 없고 연기 경험이 많지 않던 현영도 상당한 열연을 펼쳤다. 특히 현영은 어머니뻘 되는 식당 아주머니에게 반말을 하며 성질을 부리는 연기를 통해 악녀 연기에 상당한 재능을 보였다.

그 밖에 택시비가 부족한 민아를 길거리로 내몬 택시기사 박길수는 차에 탄 채 언덕에서 굴러 떨어져 사망한다.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영화 오로라 공주 방은진 감독 엄정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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