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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뜻 보면 세계가 다시 '열전의 시대'에 돌입한 듯합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야기된 우크라이나 전쟁이 곧 만 2년을 맞고, 하마스의 미사일 공격이 촉발한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팔레스타인 시민 살육도 끝날 기미가 안 보입니다. 여기에 더해 세계 유수의 국제문제 전문가들이 이구동성으로 다음의 유력한 전쟁 발발 후보지로 대만과 한반도를 꼽고 있습니다.

눈 떠 보니 이제까지 먼 지역, 남의 일로만 생각했던 전쟁이 바로 코앞에 다가와 있는 것 같아 살이 떨립니다. 어떡해서든 한반도에서 전쟁을 막고 평화를 꾀하는 게 가장 긴급한 과제임을 새삼 확인하는 새해 벽두입니다.

점증하는 한반도 전쟁 위기, 미국이 전쟁 막아주길 바라는 역설
 
지난 1월 30일, 북한이 서해상으로 순항미사일 여러 발을 발사했다고 합동참모본부가 발표한 날 서울역에서 시민들이 관련 뉴스를 보고 있다.
 지난 1월 30일, 북한이 서해상으로 순항미사일 여러 발을 발사했다고 합동참모본부가 발표한 날 서울역에서 시민들이 관련 뉴스를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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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협(전쟁)은 능력과 의도의 함수관계로 결정된다고 합니다. 능력이 있어도 의도가 없으면 전쟁 가능성은 떨어집니다. 반대로 의도가 있다고 해도 능력이 없으면 위협이 되지 않습니다. 세계 최대의 군사력 밀집 대치 지역인 한반도는 객관적으로 볼 때, 세계 어느 곳보다 위협 능력이 최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그동안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던 것은, 서로 의도를 제한해 왔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남북 당국 간 대화나 회담, 각종 합의가 바로 그런 역할을 해왔던 거죠.

그러나 윤석열 정권은 집권 이후 남북 사이에 적대적 의도를 제한하는 수단을 하나씩 제거하고 해체해왔습니다. '힘에 의한 평화'라는 어설픈 도그마를 앞세운 채 말입니다. 지금은 남북 간에 우발적인 충돌이 벌어져도 이것을 완화하거나 방지할 장치가 하나도 없게 됐습니다. 지난해 말 남북 간 모든 적대행위를 전면 중지하기로 한 9.19 군사합의를 파기한 것이 그 절정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미국이 쥐고 있는 전시작전권 환수를 주장해 왔던 진보권에서조차 한반도 전쟁 방지를 위해 기댈 곳은 전작권을 가지고 있는 미국밖에 없다는 역설적인 얘기가 나오고 있습니다. 우크라이나 전쟁, 가자 전쟁, 미중 패권 전쟁, 미국 내전(11월 대통령 선거전)이라는 4개의 전쟁을 동시에 치르고 있는 미국이, 한반도에서 또 하나의 전쟁이 터지는 걸 감당할 수 없으므로 적극적으로 전쟁 방지에 나설 것이라는 희망 섞인 분석과 함께 말입니다.

저도 비슷한 생각입니다. 한반도에서 위기 지수는 점차 높아지고 있지만, 미국의 작용으로 본격적인 전쟁이 벌어질 가능성이 크지 않다고 봅니다. 그렇다고 절대 안심할 상황은 아닙니다. 더 심각한 전쟁은 '보이지 않는 전쟁'이기 때문입니다. 자칫 잘못하면, 우리나라는 총칼을 앞세운 남북 간의 무력 전쟁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전쟁에 먼저 고꾸라질지도 모릅니다.

감염병, 인구소멸, 기후위기 등 보이지 않는 적이 더 큰 문제
 
1월 31일 오후 서울 용산구 국립중앙박물관을 찾은 어린이들이 이동하고 있다.
 1월 31일 오후 서울 용산구 국립중앙박물관을 찾은 어린이들이 이동하고 있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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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보이지 않는 전쟁이 뭐길래, 그렇게 호들갑을 떠느냐고 물을 수 있을 겁니다. 아주 쉽게 생각할 수 있는 게 2019년 초부터 3년 여 동안 우리를 꼼짝달싹하지 못하게 옥죄고 괴롭혔던 코로나 감염병입니다. 그거 이제는 다 끝난 일 아니냐고 할지 모르지만, 코로나가 끝났다고 역병이 완전히 종식된 건 아닙니다. 감염병 전문가들은 이구동성으로 무분별한 환경 파괴와 개발로 인해 발생하는 역병은 인간이 지금과 같은 성장·개발 지상주의에서 벗어나지 않는 한 새로운 형태로 끊임없이 출현할 것이라고 경고합니다.

우리나라가 지금 가장 크게 당면하고 있는 인구 감소 문제도 보이지 않는 전쟁의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파괴력이 전쟁과 감염병, 기아에 비할 바가 아닙니다. 인구 5000만 명의 나라가 2075년에는 지구상에서 '완전 소멸'할 것이라는 예측(영국의 인구학자 데이비드 콜먼 옥스퍼드대 교수)이 나오는 판이니, 원자폭탄보다도 무시무시한 '살인 무기'라고 해도 틀리지 않습니다.

미국 <뉴욕타임스>의 칼럼니스트 로스 다우서트도 지난해 12월 초 '한국은 소멸하는가?'라는 제목의 칼럼에서 우리나라의 인구 감소에 관해 "14세기 흑사병이 유럽에서 몰고 온 인구 감소를 능가하는 것"이라고 짚었습니다. 기후위기, 인공지능의 도전, 빈부 격차의 심화, 다극화와 자국 중심주의 대두도 우리의 삶을 송두리째 흔들어 댈 수 있는 '보이지 않는 적'들입니다.

일본의 외교 전략가 다나카 히토시는 <보이지 않는 전쟁>이라는 저서에서 "지금 세계 여기저기서 '보이지 않는 전쟁'이 일어나고 있다"라면서 "이 전쟁은 예전처럼 국가 간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고, 국가와 기업, 국가와 개인, 기업과 개인 사이"에서 전방위적으로 일어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 배경에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라는 이데올로기 대립의 소멸과, 그 대신 들어선 급격한 정보·기술의 발전 및 세계화가 도사리고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2016년 동시에 일어나면서 세계를 경악시킨 브렉시트와 도널드 트럼프의 미국 대통령 당선도 결코 '돌연변이'가 아니라 이런 보이지 않는 전쟁이 만들어 낸 필연적인 결과라는 얘기입니다. 바야흐로 세계는 다시 보이지 않는 전쟁에서 이기지 못하고 다시 '트럼프 시즌2'를 맞을 찰나에 있습니다.

'친구에겐 사랑을, 적에겐 증오를'?... 이런 리더십으로는 위기 돌파 못 해
 
윤석열 대통령과 한덕수 국무총리가 6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열린 국무회의에 입장하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과 한덕수 국무총리가 6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열린 국무회의에 입장하고 있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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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는 전쟁의 시대에서 견디고 이기려면 어떤 무기, 어떤 리더십이 필요할까요. 다나카는 정보(인텔리전스), 확신(컨빅션), 큰 그림(빅 피처), 힘(마이트)의 영자 앞 글자를 딴 'ICBM 전략론'을 제시합니다. 말장난처럼 보이지만 보이지 않는 적과 싸워 이기는 방법으로 충분히 고려해 볼 만한 요소들이 담겨 있다고 생각합니다.

안재원 서울대 인문학연구원 부교수는 "친구를 사랑하고 적을 미워하라"라는 '애친증적'(愛親憎敵)의 리더십에서 벗어나 '신중함의 리더십'을 택할 것을 제안합니다. 안 교수는 전쟁과 역병이 동시에 발생했던 그리스 페리클레스 시대의 리더십을 분석하면서, 페리클레스가 보이는 적인 스파르타와 싸움에서 애친증적의 리더십을 발휘해 효과를 냈지만 보이지 않는 적인 역병과 싸움에서도 같은 태도를 그대로 취하다가 폭망했다고 진단했습니다.

보이지 않는 적인 역병과 싸움에서는 광기로 돌변하기 쉬운 용기를 억누르고 설득과 소통을 앞세우는 '신중함의 리더십'을 행사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함으로써 자멸했다는 것입니다.

지금 윤석열 대통령의 리더십이 바로 친구를 사랑하고 적을 미워하는 애친증적의 리더십의 전형입니다. 국정의 가장 중요한 파트너인 제1야당 대표를 범죄자로 몰아치며 끊임없이 말살하려고 하는 모습, 집권 2년이 다 되도록 제대로 된 기자회견 한 번 하지 않는 대국민 불통과 무시의 자세, 총선을 앞두고 방송통신위원회·방송통신심의원원회를 앞세워 비판 언론의 입을 틀어막으려는 '망나니'짓에 애친증적의 리더십이 고스란히 녹아 있습니다.

굳이 다나카와 안 교수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윤 대통령이 보이지 않는 전쟁에서 필패할 것임을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보이는 적과 전쟁에서 그의 리더십이 효과를 발휘할 수 있을까 하면 그렇지도 않습니다. 역사적으로 국내 정치를 일상적인 내전으로 만들고 있는 지도자가 바깥의 적과 싸움에서 이겼다는 얘기는 들어본 바가 없습니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시민언론 <민들레>에도 실립니다.


태그:#보이지않는전쟁, #윤석열리더십, #애친증적, #신중함, #국내외정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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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논설위원실장과 오사카총영사를 지낸 '기자 출신 외교관' '외교관 경험의 저널리스트'로 외교 및 국제 문제 평론가, 미디어 평론가로 활동하고 있다. 한일관계를 비롯한 국제 이슈와 미디어 분야 외에도 정치, 사회, 문화, 스포츠 등 다방면에 관심이 많다. 1인 독립 저널리스트를 자임하며 온라인 공간에 활발하게 글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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