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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세상에 상서로운 기운이 용솟음친다는 갑진년 청룡의 새해를 이런 어처구니없는 뉴스와 함께 시작해야 한다는 게 서글프다. 이러다 우리 사회가 극단적인 갈등과 반목으로 두 쪽 났던 작년을 그리워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대한민국에서 퇴행의 끝을 보려면 아직도 먼 걸까.

또다시 전두환이라는 이름이 소환됐다. 지난해 말엔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대규모 추모 행사를 열어 눈살을 찌푸리게 하더니, 해를 넘기자 이젠 대놓고 '전 대통령'이라는 직함을 뒤에 붙이라는 공식적인 지침까지 하달됐다. 그것도 국민의 세금으로 운영되는 공영방송에서 벌어진 일이다.

'전두환 호칭 통일해야?' 언론 자유 부정하는 폭거 
 
지난 2021년 11월 29일 대구 팔공산 동화사에서 고 전두환씨의 삼우제가 열리고 있다.
 지난 2021년 11월 29일 대구 팔공산 동화사에서 고 전두환씨의 삼우제가 열리고 있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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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전두환의 호칭은 '씨'가 아니라 '전 대통령'으로 통일해달라."

지난 4일 한국방송(KBS)의 내부 통신망에 김성진 통합 뉴스룸 방송 뉴스 주간의 이름으로 발송된 내용이다. '전 대통령'은 존칭이 아니라 11대, 12대 대통령을 지냈던 사람에 대한 지칭일 뿐이라는 사족도 달았다. 그는 "김일성을 주석으로 부르고, 김정일은 국방위원장, 김정은은 국무위원장으로 부르는데, 전두환만 씨로 사용하는 건 이치에 맞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딱히 새삼스럽진 않다. 지난 2021년에도 그가 유사한 주장을 쏟아낸 적이 있다. 당시 김 주간은 사내 게시판에 "전두환씨, 김정은 국무위원장, 김일성 주석, 이순자씨, 이설주 여사. 우리 뉴스에서 쓰는 호칭입니다. 이런 호칭을 사용하는 이유에 대해 책임있는 분의 답변을 요청드립니다"라고 쓴 바 있다. 

호칭 사용 문제는 편집권에 해당하는 문제로 기자들이 토론과 합의를 거쳐 정해지는 게 상식이다. 상급자의 일방적인 지시로 결정될 사안도 아니려니와 기자에게 상명하복을 강제하는 건 언론의 자유를 부정하는 폭거다.

지난해 말 '정권의 낙하산'이라는 조롱 속에 박민 사장이 취임한 직후 그는 뉴스 주간으로 발령받았다. "공영의 가치보다 정파성과 정실주의를 앞세워 국민의 신뢰를 잃었다"는 사장의 취임사를 받들어 '뉴스 정상화'에 나선 첫 일성이 전두환이라는 이름 석 자인 걸까. 지금의 KBS에선 전두환에게 '전 대통령'이라는 호칭을 쓰는 게 공영의 가치를 실현하는 일이 됐다.

취임 직후에도 그는 뉴스룸 기자들의 입길에 올랐다. 별다른 이의 제기 없이 오랫동안 관행적으로 사용된 외교 용어를 수정하라는 느닷없는 지시를 내렸다. '한중일'을 '한일중'으로, '북미 관계'를 '미북 관계'로 국가의 순서를 바꾸라는 내용이었다.

외교적으로 득이 될 게 없는 바보짓이라는 건 삼척동자도 안다. 중국보다 앞에 불린다고 일본이 감사해할 일도 아닐뿐더러 그런다고 미국이 우방 대한민국을 위해 안보 태세를 더 강화할 일도 없다. 되레 갑작스러운 호칭 변화로 우리를 향한 중국과 북한의 적대감만 높일 뿐이다.

긁어 부스럼인 줄 알면서도 서슴지 않고 행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중국과 북한을 적으로 돌려서 얻는 이득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세대와 성별을 넘어 중국과 북한에 대한 혐오 정서가 광범위하다는 점을 십분 활용한 정치적 결정이라고 본다. 철저히 '국내용'이라는 이야기다.

참고로, 지금 고등학생들의 중국과 북한에 대한 선호도는 물어보나 마나다. 열에 여덟아홉은 중국이 세계에서 가장 싫어하는 나라라고 답하고, 남과 북이 통일을 이뤄야 한다고 생각하는 비율은 채 30%를 넘지 않는다. 그나마 당위적인 응답일 뿐, 간절함을 찾아보긴 어렵다.

'책임 있는 분'도 아니고 주제넘은 일인 줄도 알지만, 역사 교사로서 김성진 주간이 요청한 2021년 호칭 사용 이유에 대해 답변할 책임을 느낀다. 사견이므로 얼마든지 반론이 있을 줄 안다. 토론을 거쳐 합의에 이르는 과정이 성숙한 민주주의 사회로 가는 길이라고 믿고 있다.

김일성 '주석'과 김정은 '국무위원장', 리설주 '여사'를 존칭으로 여기는 이는 없다. 1991년 노태우 정부 때 체결된 남북기본합의서의 정신에 따른 관례적 호칭일 따름이다. 남북기본합의서에는 '남과 북은 상대방의 체제를 인정하고 존중하며(제1조), 상대방의 내부 문제에 간섭하지 아니한다(제2조)'고 명시되어 있다.

우리가 중국의 시진핑 뒤에 주석을 붙이고, 러시아의 푸틴을 대통령으로 부르는 게 그들을 존경해서가 아닌 것과 같은 이유다. 상대국의 지도자를 호명할 때 사용하는 국제적인 프로토콜일 뿐이다. 현재 전쟁을 벌이고 있는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조차도 언론 등에서 상대국의 지도자를 거론할 땐 직책을 붙인다.

물론, 공식적일 때 그렇다는 것이지, 일상에서 호칭을 덧붙이는 경우는 거의 없다. 수업 시간엔 그냥 김일성이고 김정은이다. 직제가 개편되어 직책의 이름이 바뀌었다고 설명하는 경우는 있어도, 그들의 이름 뒤에 굳이 주석과 국무위원장을 붙여 부른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전두환 '전 대통령'? 존칭 여부를 떠나 가당찮은 일

전두환은 다르다. 대한민국의 영토 내에서, 내란을 일으켜 헌법을 유린하고 국민을 학살한 죄로 사형 선고가 내려진 인물이다. 사법적 판단은 물론, 역사의 준엄한 평가도 일찌감치 내려졌다. 비록 대통령의 사면으로 단죄당하진 않았으나 전직 대통령에 대한 예우는 박탈당했다.

그를 '전 대통령'으로 호칭하도록 강제하는 건 편집권 침해 문제를 넘어서는 중대한 사안이다. 호칭을 뭐로 부르든 개인의 자유일 테지만, 언론 등에서 공식적으로 통일해서 사용하는 건 사법적 정의를 조롱하고 역사적 평가를 부정하는 짓이다. 전두환은 전 재산이 29만 원뿐이라며 법원이 선고한 추징금조차 내지 않고 죽을 때까지 버텼던 자다.

그런 그를 '전 대통령'이라 부르는 건 존칭 여부를 떠나 가당찮은 일이다. 더욱이 12.12 군사 반란을 소재로 한 영화 <서울의 봄>이 역대 최고의 흥행 가도를 달리고 있는 지금, 느닷없이 전두환을 두둔하고 나선 KBS 임원진들의 어이없는 행태에 분개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아이들조차 그들이 '매를 버는' 이유를 당최 모르겠다며 아우성친다.

누구는 영화 <서울의 봄>에 맞선 극우 세력의 도발이라며 의미를 부여하지만, 단언컨대 너무 나간 해석이다. 호칭 하나 바꾼다고 해서 평가가 달라질 리 만무하다. 그렇다면, '갈라치기'에 전두환을 활용하려는 것은 아닐까. 
 
전두환 2주기 추모식이 2023년 11월 23일 오후 서울 광화문네거리 동화면세점앞에서 육사총구국동지회, 전국구국동지연합회 주최로 열렸다.
 전두환 2주기 추모식이 2023년 11월 23일 오후 서울 광화문네거리 동화면세점앞에서 육사총구국동지회, 전국구국동지연합회 주최로 열렸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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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지 세력을 결집하고 정치에 대한 혐오를 부추기는 양수겸장의 전략이다. 정치 혐오는 정치인에 대한 불신으로 비화해 결국 양비론으로 귀결된다. 국민의 정치적 효능감이 사라진 공론의 장에서 극우 세력이 득세하는 건 동서고금을 통해 숱하게 증명된 바다.

사실 전두환의 호칭 문제가 불거졌을 때, 순간 '동료 시민'이라는 용어를 들먹인 한동훈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의 모습이 떠올랐다. 전두환을 '씨'라고 부르는 사람과 중국에 대한 외교를 강조하는 사람, 우방인 미국과 일본을 미워하거나 북한을 주적으로 여기지 않는 사람은 '동료 시민'의 자격이 없다고 보는 것 아닐까. 그들이 말하는 '동료 시민'의 반대말은 얼마 전까지 '공산 전체주의 세력'이었다가 지금은 '운동권 세력'으로 바뀐 듯하다. 

초록은 동색이라지만, 우리 사회의 모든 분야가 이토록 순식간에 무너져내릴 줄은 미처 몰랐다. 민주주의란 본디 허약한 제도라는 사실을 깨닫는 데 우리는 너무 비싼 수업료를 내고 있다. 풀어진 신발 끈을 다시 동여매자. 대한민국에서 퇴행의 끝을 보려면 아직도 멀었다.

태그:#김성진방송뉴스주간, #전두환호칭, #KBS박민사장, #서울의봄, #동료시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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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미뤄지고 있지만, 여전히 내 꿈은 두 발로 세계일주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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