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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고니가 장남들에서 날아오르고 있다.
 큰고니가 장남들에서 날아오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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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왔다! 왔다! 드디어 왔다!"

조성희 장남들보전시민모임(이하 시민모임) 사무국장은 추임새를 넣듯 박자를 맞추며 읊조렸다. 세종시 한복판에 있는 장남들판을 다정히 거니는 흑두루미 한 쌍. 흑색 이마 위쪽부터 머리까지 어두운 홍색, 머리에서 목까지는 백색이다. 날개깃은 흑색 우비를 걸친 듯했다. 시민모임이 '장남이' '세종이'라고 이름 붙인 천연기념물이자 멸종위기종이다.

지난 11월 20일, 12월 4일 이틀간 시민모임 모니터링팀과 함께 세종시 연기면 장남들을 찾았다. 세종시 이응다리 앞쪽 96번 임시도로를 사이에 두고 금강과 마주한 배후습지이다. 예전에는 전월산과 원수산 등의 육지생태계와 연결된 드넓은 들판이었다. 하지만 세종 행정중심복합도시가 건설된 뒤 도로와 건물 등으로 단절됐고, 규모도 10분의 1 정도로 줄었다.

흑두루미, 큰고니, 큰기러기, 잿빛개구리매... 멸종위기종의 삶터
 
▲ [환경새뜸] 윤석열 정부가 위협하는 ‘살아있는 자연사 박물관’... 장남들을 가다 #큰고니 #흑두루미 #장남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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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남들을 둘러싼 빌딩을 배경으로 하늘을 날고 있는 새들.
 장남들을 둘러싼 빌딩을 배경으로 하늘을 날고 있는 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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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텅 빈 겨울 들녘'. 이런 익숙한 수사가 이곳에선 무색했다. 이날, 논두렁으로 들어가자 논바닥에서 낟알을 쪼아 먹는 200여 마리의 큰기러기 떼가 보였다. 검은색 부리에 주황색 띠가 선명한 멸종위기 야생생물 2급 조류이다. 모니터링팀이 다가가자 순식간에 날아올라 짙은 갈색 날개를 맘껏 펼치며 군무를 춘 뒤 다시 그 자리에 내려앉았다.

세종의 겨울 전령이자 진객은 큰고니이다. 논바닥에 모인 무리를 대충 셈하니 50여 마리다. 올해는 장남들에 100여 마리가 날아들었단다. 몸길이 140~165cm에 달하는 대형 조류이다. 몽골, 러시아 동북부 시베리아에 걸친 툰드라 지대에서 번식하고 초겨울에 남하해 겨울을 나는 멸종위기 야생생물 2급 조류이다. 흰 깃을 갖고 있어 과거에 '백조'로 불렸던 새다.
 
장남들에서 큰고니들이 논둑을 넘고있다.
 장남들에서 큰고니들이 논둑을 넘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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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기척 때문인지 한 마리가 논둑을 타고 넘자, 다른 큰고니들이 거위처럼 뒤뚱거리며 2~3열 종대로 이동했다. 먹이터에서 볼 수 있는 진풍경이다. 종다리가 울고 가창오리가 날았다. 후투티 2마리가 전깃줄에 앉아 주위를 살핀다. 천연기념물인 잿빛개구리매와 독수리는 높은 상공에서 선회했다. 논바닥을 서성이던 고라니는 우리를 멀뚱멀뚱 쳐다보다가 용수철처럼 튀었다.

"여긴 세종의 살아있는 자연사박물관입니다."

조 국장이 이렇게 말한 이유가 있다. 장남들은 국내 최대 규모의 금개구리 서식처이다. 이를 위해 2만여 평의 보존지구 안에서 논농사를 짓는데, 이게 이곳 생물다양성의 원천이다. 베어낸 벼의 밑동만 남은 논바닥에 속 빈 우렁이 껍데기가 뒹굴었다. 유기농의 흔적이다. 바닥에 흩어진 낟알들, 쓰러진 볏짚에도 나락이 가득 붙었다. 세종주민생계조합 농민들이 추수할 때 일부러 새 먹이를 남겨뒀다는 뜻이다.

멸종위기종 36종... 생태계 먹이사슬이 살아있다
 
조성희 장남들보전시민모임 사무국장
 조성희 장남들보전시민모임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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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 국장과 함께 모티터링하던 유경숙씨가 논둑길을 걷다가 깃털이 한 무더기 빠져있는 곳 앞에서 멈췄다. 혈흔이 남겨진 뼈도 있었다. 도심 속의 섬처럼 고립됐지만, 생태계의 먹이사슬이 왕성하게 살아있는 야생의 공간이라는 징표였다. 조 국장이 말했다.

"와~ 이건 흰꼬리수리나 말똥가리가 사냥한 흔적이네요. 희생양은 멧비둘기인가? 삵과 같은 야생동물은 통째로 먹는데, 뾰족한 이 깃털 끝을 보세요. 맹금류는 깃털을 이렇게 뽑은 뒤 영양분이 풍부한 내장부터 먹거든요. 금개구리를 보존하려고 논농사를 유지하는데, 풍부한 먹이 때문에 많은 조류들이 이곳을 찾습니다. 최상위 포식자인 독수리나 황조롱이 같은 맹금류들도 많죠. 또 이곳은 그해 태어난 어린 삵들의 사냥 연습터입니다."

조 국장은 이어 "유기농 농사를 짓고 있어서 멸종위기종인 대모잠자리 등 곤충류도 많고, 들쥐와 같은 설치류, 삵과 너구리 등 다양한 생명들이 공존하는 완벽한 생태계를 이루고 있다"면서 "멸종위기종과 천연기념물도 36종이나 된다"고 말했다.

장남들의 동쪽 끝에 있는 부들 논으로 다가갔다. 부들로 둘러싸인, 그리 크지 않는 물웅덩이다. 20일, 큰고니들이 아침 일찍 잠자리를 털고 다른 곳으로 이동했다. 하지만 인기척에 놀란 청둥오리가 날았다. 쇠물닭, 흰눈썹뜸북이 등 다양한 새들이 물속이나 물가에서 놀고 있었다.

"아, 저거, 저거... 긴발톱할미새! 노랑할미새와 발 색깔이 달라요. 쟤는 검은색인데, 노랑할미새는 핑크색. 와, 대박이네!"

이날 새 이름을 줄줄이 대면서 모니터링을 하던 이경호 대전환경운동연합 사무처장은 카메라 셔터를 누르며 입으로는 감탄사를 날렸다. 이 처장은 지난 11월 15일 열린 한 포럼에서 발제하면서 "지난 96년에 이곳에 왔을 때 100여 종의 조류를 발견했다, 우리나라를 통틀어서 하루에 100여 종의 새를 만날 수 있는 곳은 아마도 이곳이 유일할 것"이라고 평가한 바 있다. (관련 기사 : "세종보 물 채우면 멸종위기 '흰수마자' 절멸할지도" https://omn.kr/26fek)
 
장남들에서 야생동물들이 어울려 뛰어놀고 있다.
 장남들에서 야생동물들이 어울려 뛰어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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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보 재담수와 96번 도로... 이곳의 평화 위협

하지만 이 도심 속 야생의 공간을 위협하는 요인도 산재해 있다. 이 처장은 지난 포럼에서 장남들과 합강습지 인근의 철새 등 조류의 증감 추세를 보여주는 모니터링 자료를 제시하면서 윤석열 정부가 인근에 위치한 세종보를 재담수하려는 것에 대한 우려를 쏟아냈는데, 이날도 비슷한 말을 반복했다.

"제가 이곳의 조류를 27년 동안 모니터링을 해왔는데, 2018년부터 조류가 급속도로 증가했습니다. 그때부터 세종보 수문을 전면 개방했죠. 이곳의 명물인 큰고니는 보에 물을 가득 채워뒀을 때인 2018년 이전에 9마리 관찰됐어요. 그런데 지난해에 42마리, 올해엔 62마리, 아니 최근 보니까 100여 마리로 늘어났어요."

이 처장은 "큰고니의 특성상 물에 들어갔을 때 목을 길게 빼면 바닥에 발이 닿을 정도의 깊이인 수심 1m 정도가 서식하기 좋은 환경"이라면서 "4m 높이의 세종보 수문을 닫는다면, '너, 더 이상 이곳에 오지 마라' '나가라!'라는 뜻과 같다"고 우려했다.

그래서였다. 조 국장과 이 처장은 한화진 환경부 장관이 내년 4월에 완료할 예정인 세종보 수문정비 상황을 둘러보려고 세종보 좌안 둔치에 왔을 때, 환경단체들과 함께 차를 막아서면서 기습 피켓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관련 기사 : "죽은 세종보 좀비처럼 되살린다? 장관님 정신 차리세요" https://omn.kr/26kuc  )
 
장남들과 금강을 가로지는 96번 도로.
 장남들과 금강을 가로지는 96번 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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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 중앙공원을 공사하려고 임시로 건설한 96번 도로도 장남들의 평화를 위협하고 있다. 금강과 장남들 사이에 난 이 도로는 폐쇄를 전제로 3km 구간에 걸쳐 건설한 도로이다. 하지만 세종시와 개발업자들은 이곳의 교통 수요량을 과다 추산하면서 존치하자는 주장을 펴고 있고, 환경단체들은 이에 맞서고 있다.

조 국장은 "광활했던 장남들이 도시 개발로 점점 줄어들었고, 저 녹색 펜스를 친 구간만 보존지역으로 남아있는데 96번 도로가 존치되거나 확장된다면 이곳은 금강과는 단절된 섬처럼 고립될 것"이라면서 "당초 계획처럼 도로를 폐쇄하거나, 사람과 자연이 공존하면서 안전하게 이동할 수 있는 할 수 있는 길로 만드는 게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100여 명의 시민이 자발적으로 나선 까닭

모니터링을 마치고 유경숙씨가 조 국장과 상의하면서 작은 노트를 펼쳐 들고 2시간 넘게 장남들을 다니면서 본 야생동물들의 종과 수효를 적기 시작했다.

"청둥오리는 100마리 정도였죠? 묵논에 있던 큰고니는 50마리 정도였던 것 같습니다. 오늘은 큰기러기가 논에 앉지 않고 상공으로 지나가기만 했어요. 고라니도 10마리 정도 있었던 것 같네요. 붉은머리오목눈이, 논병아리, 흰뺨검둥오리, 말똥가리도 있었죠."

100여 명의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구성한 자원봉사조직인 시민모임은 지난 5년여 동안 사비와 시간을 털어서 이곳의 자연보존 활동을 벌여왔다. 매주 월요일에 만나서 조류와 양서파충류, 식물 분포 조사를 해왔고, 쓰레기 수거와 철새 먹이주기 등의 활동도 병행해 왔다.

조 국장은 "이곳은 시민들이 보존하는 지역이기에 맘대로 훼손할 수 없다는 메시지를 전달하려고 긴 호흡으로 생물종 다양성을 확인하기 위한 모니터링 활동을 해왔다"고 말하면서 지난 5년간 이들이 확인한 생물들을 기록해 온 '네이처링' 주소를 보내줬다.
 
장남들보전시민모임은 지난 5년간 확인한 생물들을 ‘네이처링 앱’에 올려왔다(네이처링 앱 갈무리)
 장남들보전시민모임은 지난 5년간 확인한 생물들을 ‘네이처링 앱’에 올려왔다(네이처링 앱 갈무리)
ⓒ 네이처링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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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처링'에는 지금까지 94명이 참여해서 올린 2938건의 사진과 동영상이 빼곡했다. 94종의 조류와 136종의 곤충 등 시민모임이 관찰한 생물은 총 522종에 달했다. 시민들이 장남들의 흙길을 걸으며 벽돌을 쌓듯이 사진을 찍어 만든 '온라인 자연사 박물관'이었다. 시민모임이 도심 속의 섬처럼 고립돼 가는 야생의 공간을 지키겠다고 나선 까닭, 이곳에 가면 알 수 있다. (관련 기사 : 세종시에 큰고니 50마리... "두 눈을 의심했다" https://omn.kr/21yn2)

태그:#장남들, #장남들판, #큰고니, #고라니, #세종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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