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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짜기에 가을이 왔음은 산딸나무가 먼저 알려준다. 어느새 붉은색이 잎으로 전해지고, 덩달아 화살나무도 빨강으로 물들기 시작하면 곳곳에 산국이 노랑으로 맞불을 놓으며 골짜기는 가을이 시작된다. 밝은 햇살이 찾아온 산등성이에 산새들이 날아오르는 아침, 가을로 접어들면서 날씨가 싸늘해졌다. 어느덧 들판은 휑하게 변하면서 곳곳에 가을의 풍성함을 주던 흔적들로 가득하다. 널따란 들판에 곤포 사일리지가 뒹굴거리고, 비탈밭을 장식했던 들깨와 콩은 어느덧 꺼풀만 남겨져 있다.

황금들녘에 벼타작이 시작되었고, 비탈밭엔 여름을 견딘 밭작물을 거둬들이는 가을이 시작된 것이다. 황금들녘에 누런 벼가 있는가 하면, 비탈밭에 들깨가 있고 콩이 있었으며 수수와 동부도 영글어 갔다. 거대한 콤바인이 휘젓고 다니는 들판과 비스듬한 비탈밭에 혼자 선 할머니의 고된 몸짓이 대비되는 골짜기다. 옛날에는 동네 이웃들이 질펀한 돈 둑에 앉아 점심을 먹었었다. 

새벽부터 벼를 베고 허기가 질 즈음이면 동네 아낙들은 바빠졌다. 점심을 준비해 논으로 날라야 해서다. 노란 주전자엔 막걸리가 출렁거리고, 덩달이 강아지도 따라나섰다. 들판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다 불러 모았다. 지나는 이웃도 그냥 지날 수 없고, 기어이 숟가락을 들고 요기를 해야 지날 수 있는 점심상이었다. 온 동네 사람들이 다 모인 푸짐한 논밥상이 펼쳐진 것이다. 기억 속에 남아 있던 추억은 이제는 그리움으로 만족해야 한다. 

가을을 거두는 바쁜 손길들 
 
골짜기에 가을이 내려왔다. 곡식이 익어가는 들판엔 풍성함이 가득하고 멀리 골짜기에선 하얀 연기가 피어오르는 정겨운 풍경이다.
▲ 평화스러운 골짜기 풍경 골짜기에 가을이 내려왔다. 곡식이 익어가는 들판엔 풍성함이 가득하고 멀리 골짜기에선 하얀 연기가 피어오르는 정겨운 풍경이다.
ⓒ 박희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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웅장한 기계음을 따라 먼지가 하늘로 오르고, 작은 트럭이 따라나섰다. 콤바인이 털어낸 벼를 실어 운반할 트럭이다. 순식간에 콤바인인 황금들녘을 휑하게 만들었다. 봄부터 새싹을 틔웠고 여름비를 견뎌낸 벼가 가을이 되어 주는 보상이었다. 온 동네 사람이 모여 벼를 베고, 타작을 하던 일을 웅장한 기계가 순식간에 해결한 것이다.

과거에 온 동네 사람들이 모여 먹던 점심상은 이제는 근처에 들어선 뷔페에서, 가끔은 들녘으로 배달되는 중국음식으로 간단히 해결하고 만다. 거대한 농기계와 상관없는 사람들의 몸짓도 가을에 만나는 풍경이다.

가을들판에 할머니들의 발걸음을 잡아 놓은 건 들깨였다. 한치의 땅도 비워 놓을 수 없는 시골땅, 작은 땅에도 어김없이 들깨는 자리를 잡았었다. 널따란 들판을 지나 산 모퉁이를 돌아가자 유모차가 서 있다. 허리 굽은 할머니가 혼자 손으로 들깨를 털고 계신 것이다. 가족들은 없는 건지, 홀로 앉아 일을 하신다.

지나는 길에 만난 비탈밭에선 오래 전의 추억을 만나기도 했다. 비탈밭을 가득 메웠던 들깨를 터는 명장면, 오래 전에나 보았던 도리깨질을 만난 것이다. 비스듬한 산자락에서 펼쳐지는 아름다운 몸짓, 파란 포장지에 널어 놓은 들깨를 도리깨로 털고 있다. 한 남성이 도리깨를 잡고 어깨너머로 팔을 돌려 힘껏 내려치며 들깨를 털어내고 있었다.

조금은 서툰듯하지만 지는 해를 친구삼아 휘두르는 도리깨는 선명한 원을 그리며 돌아가고 있었다. 아직도 만날 수 있는 도리깨, 여기가 골짜기임을 실감하는 그리움의 만남이었다.

어렸을 적 어머님이 허연 수건을 머리에 얹고 나가시던 뒷모습이 떠오른다. 장마가 그치고 자그마한 텃밭에 들깨를 심기 위해서다. 농사는 때가 있는지라 잠시도 멈출 수 없다. 허연 수건으로 고단함을 털어내고 들어선 텃밭엔 고추가 몸집을 불렸고 옥수수가 잎을 나풀거렸다.
 
비탈밭에서 도리깨로 깨를 털고 있다. 오래전 기억속에서나 만날 수 있는 도리깨를 골짜기에서 만났다. 반가움과 그리움이 겹쳐지는 추억 속의 도리깨다.
▲ 추억의 도리깨질 비탈밭에서 도리깨로 깨를 털고 있다. 오래전 기억속에서나 만날 수 있는 도리깨를 골짜기에서 만났다. 반가움과 그리움이 겹쳐지는 추억 속의 도리깨다.
ⓒ 박희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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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는 깨를 심어 기름을 짜야 자식들에게 나눠줄 수 있고, 그걸 5일장에 내다 팔아 가용돈을 얻을 수도 있었다. 고단한 여름비를 견디고 영근 들깨는 살림살이의 소중한 밑천이었다. 처음에 그 누가 깨를 심기 시작했고, 이렇게 작은 알갱이에서 기름을 짤 줄 알았던 걸까? 가끔, 고단한 어머님 대신 원망을 받았던 게 들깨의 존재였다. 

그 시절 가을이 되면 고개를 숙인 벼를 베었다. 벼가 마르고 타작을 할 즈음, 집안의 큰 재산인 소의 힘을 빌려야 했다. 벼를 운반해 벼타작을 하고 남은 볏짚은 바깥마당에 쌓았다. 이엉을 엮어 초가지붕을 새로 해야 했고, 군불을 지펴야 했으며 소의 배를 불려야 했다. 거대한 가마솥에 소죽을 끓이며 사랑방을 데웠야 했으니 그게 가족과 마찬가지였던 소와 사람이 함께 살아가는 지혜였다. 나중에 소를 팔아 학비와 가용돈을 마련하기 위함이었다. 

다시 현재, 콤바인이 지나온 들녘엔 벼를 털고 난 볏짚이 누워 있다. 이웃들과 함께 앞마당에서 해결하던 일들이 논바닥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한겨울 땔감이 되고 소의 먹이가 되던 볏짚, 초가지붕을 덮는 요긴했던 볏짚이 이젠 소의 먹이로만 만족해야 한다. 들깨의 흔적과 실하게 영글었던 수수와 콩도 알맹이를 주고난 줄기가 버려진 듯이 비탈밭에 누워있었다. 오래전엔 땔감으로 요긴했던, 가을날의 선물 같은 것이었는데.  

가을의 흔적이 곳곳에 누워있다 

시골집 마당에 쌓여있던 볏짚에 대한 추억은 사라지고, 이젠 거대한 기계가 돌돌 말아 농촌의 새 모습으로 자리 잡았다. 추수를 하고 난 들판에 새 풍속도를 만들어 내고 있는 곤포 사일리지(梱包 Silage)이다. 가지런히 포장한다는 곤포(梱包)에, 곡물이나 볏짚을 밀폐 후 발효시겨 만든 숙성 사료라는 뜻의 사일리지가 합성된 곤포 사일리지(梱包 Silage)다. 벼를 수확하고 난 볏짚을 장비로 묶고 발효제를 살포하여 일정한 기간 숙성하면 발효된 소의 먹이가 되는 것이다. 
 
동네 이웃이 모여 하던 가을 걷이, 거대한 농기계가 대신하고 있다. 콤바인이 대신하고, 트럭이 실어내는 가을걷이다. 다시는 만날 수 없는 오래전 가을날의 추억은 그리움으로만 남아 있다.
▲ 가을 들판엔 콤바인이 바쁘다 동네 이웃이 모여 하던 가을 걷이, 거대한 농기계가 대신하고 있다. 콤바인이 대신하고, 트럭이 실어내는 가을걷이다. 다시는 만날 수 없는 오래전 가을날의 추억은 그리움으로만 남아 있다.
ⓒ 박희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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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콤바인이 들판을 누비며 벼를 털어냈고, 트럭은 열심히 벼를 운반했다. 논 바닥에 널브러진 볏짚은 어느새 하얗게 포장되어 완연한 가을임을 알려준다. 곤포사일리지가 농촌의 새로운 풍경으로 자리 잡은 산간에는 벌써 하얀 서리가 내렸고, 서리 내린 비탈밭에는 모든 것을 내어준 계절의 껍데기들이 한가하게 누워있다. 제 할 일 다한 껍데기를 보며 기억을 더듬는 것은 남아 있는 그리움을 추억하고 싶어서인가보다. 

가을이 익어가는 비탈밭엔 그러나 아직도 할 일이 남아 있다. 푸른 배추는 실한 고갱이를 안고 제철을 기다리고 있고, 굵직한 무도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다. 서서히 김장철이 돌아오면, 과거 온 골짜기에 벌어졌던 오래 전의 잔치는 또 벌어질 수 있을까.

서서히 사라져가는 듯한 시골풍경을 아쉬워하는 것은, 오래전에 만났던 풍경은 오간 데 없고 잔잔한 과거 기억마저 가물가물해지면서다. 썰렁한 바람만이 지나고 있는 골짜기, 모든 것을 내주고 남은 가을 흔적들만이 그럼에도 오는 가을을 기쁘게 맞이하고 있다. 

태그:#가을, #가을걷이, #벼타작, #들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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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희무렵의 늙어가는 청춘, 준비없는 은퇴 후에 전원에서 취미생활을 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글을 쓰고 책을 읽으면서, 가끔 색소폰연주와 수채화를 그리며 다양한 운동으로 몸을 다스리고 있습니다. 세월따라 몸은 늙어가지만 마음은 아직 청춘이고 싶어 '늙어가는 청춘'의 글을 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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