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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여름 가장 뜨거운 일터는 어디일까? 용광로가 타오르는 제철소를 떠올리겠지만 가장 많은 사람이 쓰러지는 곳은 바로 건설 현장이다. 둘의 차이는 폭염을 어떻게 관리하느냐, 즉 실내기온을 어떻게 측정하고 휴식시간을 주느냐, 쉼터가 제공되는가 하는 지점이다. 뜨겁던 태양이 물러가고 선선해지는 요즘, 한철 내내 폭염에 시달리던 누군가는 안도의 한숨을 쉴 것이다. 하지만 바로 지금이 폭염 대책을 논의할 때다. 그래야 늘어나는 폭염 죽음을 막을 수 있다. [편집자말]
아파트 건설 현장에서 한 노동자가 더위로 지친 체력을 보충하기 위해 마실 물을 챙겨가고 있다(자료사진).
 아파트 건설 현장에서 한 노동자가 더위로 지친 체력을 보충하기 위해 마실 물을 챙겨가고 있다(자료사진).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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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절 내리쬐는 태양열은 같은 온도를 내뿜지만, 장소에 따라 더 뜨겁고 더 오래 달궈진다. 온열질환 통계가 보여주듯 작업장, 일터가 특히 그렇다. 온·습도뿐 아니라 열로 달궈진 복사열도 복합적으로 작용한다. 어떤 재료를 손에 쥐고, 무슨 옷을 입고, 어디에 서있느냐에 따라 몸의 온도는 더 급격히 상승한다. 그러나 산업안전보건기준 규칙에 따른 '고열 작업'으로 분류되지 않으면, '고온 수치'가 의무적으로 측정, 즉 관리되지 않는다. 

<오마이뉴스>는 대법원 판결문 열람시스템을 통해 2014년부터 2023년 8월 현재까지, '폭염'을 검색 키워드로 각급 행정법원에서 다룬 폭염 노동을 다룬 산업재해 판결문 45건을 추려 분석했다. 판결문 속에는 해마다 여름철 사업장에 배포돼 '강력 권고' 되는 고용노동부의 폭염 온열질환 가이드로 막지 못하는 폭염 산재의 현실이 녹아 있었다.  

[사례1] 37도에 쓰러져 사망해도 '산재 아님'
모르타르 양생으로 열 급상승했지만 선풍기도 못 틀어


2015년 7월 30일, 한낮 최고기온이 37도가 넘는 폭염 속 아파트 건설현장. 구급대가 현장에 도착했을 때, 쓰러진 A씨의 웃옷은 동료들이 급히 부어놓은 얼음물로 흠뻑 젖어있었다. 발견된 지 5분 만에 사망했지만 A씨의 사인은 불명, '알 수 없음'. 병원으로 옮겨졌을 당시 그의 체온은 38도가 넘었다. 

하지만 근로복지공단은 A씨의 죽음을 산업재해(산재)로 인정하지 않았고 1심 재판부도 '고온 환경이 사망에 영향을 끼쳤다고 볼 수 없다'고 봤다. 반면 2심 재판부인 서울고등법원 제10행정부는 A씨가 사망 직전 다룬 작업의 재료에 주목했다.

"모르타르(시멘트+모래) 타설 후 양생되는 시간(2시간 정도)에 화학 작용으로 온도가 급상승하는 현상이 발생한다."
"모르타르 양생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크랙(갈라짐)을 방지하기 위해 선풍기를 틀지도 못한 채 작업을 했다." - 판결문 일부 

모르타르 작업 과정에서 온도가 급상승하는데 이것이 A씨의 사망에 영향을 주었다는 것이다. 이를 근거로 재판부는 "사망에 이르게 한 가장 중요한 원인은 고체온증"이라고 판단했다.

또 전문가는 사망 당일 작업환경의 특징, 고인 곁에 있던 사람들의 모습 등도 근거로 삼았다. 진료감정촉탁을 맡은 의료진은 특히 "작업 환경을 가장 공감할 수 있는 사람들로 생각되는 동료들이 차가운 물을 끼얹은 것을 보면 작업 환경이 고온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며 "종합적으로 판단할 때 열사병이 가장 가능성이 높은 사인이라고 판단된다"고 봤다. 

많은 폭염 사상자를 발생시키는 건설현장의 특징 중 하나는 발생시키는 작업들이 많다는 점이다. 박종국 경기도 노동정책전문관은 지난 8월 국회 토론회에서 "철근, 형틀, 타설, 방수... 다 고열을 발생시키는 작업들이다"라면서 "지상 온도가 35도라면 콘크리트를 측정했을 때 한 40도에 육박한다"고 전했다.
 
건설현장은 작업의 특성상 열을 발생시키는 작업이 많고 폭염에 그대로 노출되는 환경 때문에 노동자의 실제 열 스트레스를 측정하는 온열지수 측정이 시급한 작업장 중 한곳이다(자료사진).
 건설현장은 작업의 특성상 열을 발생시키는 작업이 많고 폭염에 그대로 노출되는 환경 때문에 노동자의 실제 열 스트레스를 측정하는 온열지수 측정이 시급한 작업장 중 한곳이다(자료사진).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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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례2] "콘크리트 굳기 전에"... 31도 폭염에도 쉼없이 작업

달궈진 작업장에서 생명을 구하는 것은 적절한 휴식시간과 수분 충전 등의 조치다. 하지만 정해진 기간에 작업을 끝내는 게 최우선인 건설현장에서는 찾아보기 어렵다. 

2013년 6월 충남 천안 공사현장에서 지붕 바닥 미장을 진행하던 B씨(60)는 31도를 웃도는 폭염에도 콘크리트가 굳기 전 작업해야 한다는 이유로 쉼없이 일했다. 그는 사망 전 48시간 중에서 무려 34시간 30분 동안 미장 작업을 했다. 사인은 뇌출혈이었지만 근로자복지공단과 1심 재판부는 산재로 인정하지 않았다. 

이어진 항소심 재판에서 의료진은 "31.9도의 폭염에 콘크리트가 굳기 전 미장 작업을 해야 해서 작업이 매우 긴박하게 진행됐을 것"이라고 봤다. 재판부도 고인의 '사라진 휴게 시간'에 지적했다. 재판부는 "콘크리트 양생 시간은 온도에 영향을 크게 받고, 양생 시간이 줄수록 미장공들의 작업은 휴게시간 없이 빠르게 진행된다"고 봤다. 

[사례3] 아침 8시에 숨진 노동자... 원인은 28도 웃돈 열대야

문: 열대야 속 작업 중 사망에 이를수도 있는지요?
답: 그렇습니다. 고온 노출에 따른 심근경색 위험도 증가를 보고하는 연구들이 많습니다.


2020년 7월 오전 7시경, 폐기물 수거트럭 위에서 쓰러진 채 발견된 청소노동자 C씨. 급히 병원으로 옮겨져 심폐소생술을 받았지만, 1시간여만인 오전 8시께 사망했다. 인력이 부족해 2명이 하던 일을 혼자 해온 그는 새벽 2시께부터 오후 1시까지 1일 평균 360곳에서 재활용폐기물을 수거했다. 1회 수거량만 10kg에 달했다. 

사망 당일 밤 최고기온은 28.1도, 최저기온은 27도로 열대야 기준 25도를 웃돌았다. 하지만 C씨의 휴게시간은 조식시간 60분을 제외하고는 특별히 없었다. 의료진은 평소 고인이 심장질환을 앓고 있었지만, "작업 중 폭염 노출이 심혈관 질환의 급성 악화에 영향을 끼쳤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고 답했다. 항소심 재판부의 결론도 동일했다.  
 
폭염노동으로 인한 폭염사망을 기후위기 시대의 불가항력적인 비극으로 접근해서는 안 된다. 온열지수를 측정하고 그에 따라 적절한 휴식과 수분을 제공해야 한다.
 폭염노동으로 인한 폭염사망을 기후위기 시대의 불가항력적인 비극으로 접근해서는 안 된다. 온열지수를 측정하고 그에 따라 적절한 휴식과 수분을 제공해야 한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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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례4] 선선한 여름 실내에서 뇌출혈 사망... 거기엔 에어컨이 없었다

문 : 망인이 폭염 및 급작스러운 기온 차에 노출된 것은 업무상 스트레스를 가중했을 가능성이 있는지요?
답 : "유해한 작업환경(온도 변화, 폭염)에 노출된 경우이고, 이는 업무상 스트레스를 가중시켰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2020년 7월 20일, 한 공기업의 경기도지역본부 자재창고 안 사무실 테이블에서 의식을 잃은 입사 27년차 사무직 노동자 D씨. 그는 쓰러진 지 6일 만에 숨졌다. 사인은 뇌출혈. 

사고 당시 일일 최고기온은 30도에 미치지 않아 그리 높지 않았다. 하지만 항소심 재판부는 고인의 사무실에 냉난방 시설이 없었고 그로 인해 외부 온도 변화에 그대로 노출될 수밖에 없었다고 봤다. 자재창고 안은 바깥 기온이 높지 않다고 해도 상당히 높은 기온이 형성되었으며 이러한 급작스러운 기온 차에 D씨가 노출돼 사망했다는 결론이었다. 

재판부는 "유해한 작업환경(온도변화)에 노출되는" 업무로 사망에 이르렀다고 적시했다. D씨 역시 지난 4월 25일 1심 선고로 사망한 지 3년 뒤에야 '산재가 맞다'는 인정을 받았다. 

[사례5] '33도 폭염' 공사장의 지하 실내공간은 그늘 아니다

2013년 8월, 낮 최고기온 33도의 폭염 속 형틀목공으로 지하 7m 아래 공사현장에서 일하다 사망한 E씨(55). 사업주는 "지하 복공판 그늘에서 자율 휴식 시간이 있었고 과다 노동이 아니었다"고 항변했고 근로복지공단도 산재 불승인했다. 

그러나 사고 당시 물과 그늘 수준을 살핀 법원은 산재라고 보았다. 재판부는 "사업주가 언급한 복공판 그늘은 고온다습한 환경에서 더위를 피할 만한 충분한 휴식 공간으로 보기 어렵고" "지하 7m 근무지 주변에 식수 등 탈수 현상에 대비한 수단이 제공됐다고 볼 정황도 없다"고 지적했다. 

또 재판부는 "평년 기온과 습도를 훨씬 웃도는 고온 다습한 환경에서 휴무일 없이 6일 연속 야외 업무를 수행했고, 사건 전날부터는 결원 상태에서 형틀 목공 업무 일체를 수행해 업무 부담이 적지 않았다"며 이런 조건들이 E씨의 죽음에 영향을 주었다고 결론내렸다. E씨가 후송된 병원 의료진도 고온의 환경이 심근경색 발병의 원인이 될 수 있다고 봤다. 의료진은 "습도가 높으면 땀 분비가 원활하지 않아 체온을 줄이기 위해 피부로 많은 혈액을 보내야 하는 심장에 과부하가 생길 수 있다"고 적었다.  

독일의 '온도 조절'은 작업장 건축 때부터
"26도 넘으면 곧장 조치, 35도 넘으면 비워라" 
 
   
"쉽게 말해서 양철판 위에서 작업한다고 보면 됩니다. 기온이 30도가 넘으면 발밑에서 열이 올라오고, 철근에서 또 열이 올라옵니다. 15cm, 20cm 철근 메고 이동하는데, 몸 움직일 틈도 없이 뜨거운 양철판과 싸우는 고통을 겪습니다. (중략) 현장에서 일사병, 열사병으로 병원에 많이 실려가는데, 뉴스에는 80분의 1정도가 나오는 것 같아요." - 30년 경력의 철근 노동자 장석문씨

해외에선 달아오르는 폭염에 대비한 실내·외 고온 노출 노동에 대한 대응책을 마련해놓고 있다. 고온 노출 노동에 대한 미국의 대응책은 안전보건공단 국제협력센터에서 2021년 7월 발간한 국제동향 소식지에도 등장한다. 사업주가 온열지수(WBGT) 측정으로 노동자의 여름철 고온 노출 수준을 계산할 수 있게 한 방안이 대표적이다. 

한편 해당 소식지는 "한국의 경우 대부분 작업에서 온열지수는 기상청의 더위 체감 지수를 활용하면 되지만 벌목, 청소 등 옥외작업, 건설업, 조선업 등의 경우 작업장 환경에 따라 온열지수 변화가 크므로 여름철 작업 전 온열지수를 별도 측정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실내 노동의 경우, 독일의 지침이 대안으로 제시되기도 한다. 독일은 실내 작업장의 온도 관리를 작업장 건물을 건축할 때부터 적용하는 규칙이 있다. 안전보건공단이 지난해 발간한 '폭염 한파 건강장해 예방조치 개선방안 연구'에 제시된 독일 산업안전보건법에 따르면 "작업장을 설치할 때 고용주는 승인된 기술규칙에 따라 여름 열 보호를 위한 구조적 요구 사항이 충족되도록 해야 한다"고 전했다. 

'이로운 실내 온도'에 대한 정의도 담겨 있다. 독일 산업안전보건법은 "인체의 열균형이 균형을 이룰 때 건강에 이로운 실내 온도가 존재한다"면서 "인간의 열 발생은 작업 강도에 다른데 열 방출은 공기 온도, 공기 습도, 공기 속도, 열복사 및 의복에 따라 달라진다"고 적시했다. 실내 온도 상승 시 곧장 조절 조치를 취해야하는 기준선은 '26도'였다. "실내 공기 온도가 35도초과하면 초과된 시간 동안 실내는 비어 있어야 한다"는 명시적 규정도 뒀다.
     

태그:#폭염, #건설, #물류, #고용노동부, #청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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