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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은 김대중 대통령에게 있어 '죽음'과 관련 깊은 달이다. 14년 전 2009년 8월 18일은 김대중 대통령이 서거한 날이고, 50년 전 1973년 8월 8일은 일본 도쿄에서 발생한 납치사건으로 인해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 당시 미국의 개입으로 목숨을 건질 수 있었던 김대중은 8월 13일에 석방됐고, 수장당할 뻔했던 극한의 위기 상황을 증언했다. 이 사건이 바로 그 유명한 '김대중납치사건'이다.

김대중납치사건은 한국현대사와 한일관계에 있어 매우 큰 영향을 줬다. 1972년 10월 17일 특별선언 및 비상조치 등으로 시작된 유신정권은 이 사건을 통해서 큰 위기에 처했다. 그동안 계엄령 등 유신 정권의 강도 높은 억압조치로 인해 숨죽이고 있던 국내 민주화세력도 이 사건을 통해 자극을 받아 활성화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사건 이후 해외에서 반유신여론은 급속하게 퍼져나갔다.

그런데 유신 정권은 국내외적인 저항과 압박에 유연하게 대응하기 힘들 정도로 경직돼 있었다. 그결과 유신 정권에 대한 민심이반은 심화됐다. 저항은 다양한 영역에서 나타나기 시작했으며 민중항쟁인 부마항쟁까지 발생했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1979년 10.26사태가 발생하게 된 것. 결국 유신정권 초기에 발생한 김대중납치사건은 유신정권 붕괴에까지 영향을 줬다.

이러한 김대중납치사건에 대한 연구는 그동안 8월 8일 납치 전후 과정, 구명과정, 사건 처리 과정 등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물론 아직도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은 사실들이 있긴 하지만 이러한 연구를 통해 상당히 많은 내용들이 확인됐다. 그런데 정작 이 사건 발생의 기본 배경이 되는, 유신 직후 이뤄진 김대중 1차 망명 활동에 대한 연구는 그동안 전혀 이뤄지지 않았다.
 
신간 '김대중 1차망명과 반유신 민주화운동' 표지.
 신간 '김대중 1차망명과 반유신 민주화운동' 표지.
ⓒ 연세대학교 김대중도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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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점에서 연세대학교 김대중도서관이 김대중납치사건 50주년을 맞아 이 사건의 배경이 되는 김대중 1차 망명 활동의 내용과 성격을 분석 정리한 <김대중 1차망명과 반유신민주화운동>(연세대학교 출판문화원 펴냄)을 출간한 것은 의미가 크다. 이 책은 김대중이 1972년 10월 18일 일본 도쿄에서 유신반대성명을 발표하면서 시작된 일본과 미국에서의 반유신민주화운동의 성격과 내용을 분석한 것이다.

이 책은 3개의 주제로 구성돼 있다. '제1차 망명기 김대중의 미국에서의 활동'은 류상영 연세대학교 국제학대학원 교수가 집필했으며, '김대중의 제1차 망명기 일본 활동의 의미-정계 및 언론계를 중심으로'은 정근주 호쿠세이가쿠엔대학교 교수가 집필했다. '김대중의 1차망명활동과 한민통 구상'은 필자가 집필했다.
  
김대중, 미국과 일본에서 반유신 여론형성에 큰 역할을 하다

유신 선포 바로 다음날인 10월 18일에 발표한 성명에서 김대중은 "박정희 대통령의 이번 조치는 통일을 말하면서 자신의 독재적인 영구집권을 목표로 하는 놀랄만한 반민주적인 조치다"라고 유신 선포를 비판했다.

이날 김대중의 유신반대성명은 국내외를 통틀어서 최초로 나온 반유신 행동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김대중은 1971년 7대 대선 과정에서 '이번에 정권교체를 하지 못하면 앞으로 영구집권의 총통제가 올 것'이라고 주장했었는데, 당시에 이미 박정권의 의도를 꿰뚫어보고 있었기 때문에 유신 선포 직후에 바로 행동에 나설 수 있었다.

김대중은 일본과 미국을 오가면서 반유신투쟁을 이어갔다. 미국은 한국에 가장 큰 영향을 주는 국가이고 일본은 아시아지역에서 미국의 가장 중요한 전략적 파트너였기 때문에 미국의 대한정책 전환을 목표로 한 김대중의 입장에서는 일본도 중요했다.

그래서 김대중은 미국·일본의 리버럴 성향의 정치인·언론인·지식인 등을 만나서 유신체제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한국의 민주화가 미국과 일본의 국가이익에도 필요하다는 점을 설명했다.

 
미국 망명 시기 강연회 홍보자료.
 미국 망명 시기 강연회 홍보자료.
ⓒ 연세대학교 김대중도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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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이 접촉해서 지지를 이끌어낸 주요 인사들을 살펴보면 미국에서는 케네디 대통령의 동생으로 미국 민주당의 거물급 인사인 에드워드 케네디 상원의원, 에드윈 라이샤워 하바드대 교수, 로버트 스칼라피노 버클리대 교수 등이 있다. 일본에서는 자민당 내 비둘기파로 불리운 A.A연구회를 이끌고 있던 우쓰노미야 도쿠마 중의원, 사회당의 덴 히데오 참의원 등이 있었다. 그리고 일본의 대표적인 진보적 시사잡지인 <세카이>(世界)의 야스에 료스케 편집장 등도 김대중의 활동을 지지했다.

김대중은 언론과의 인터뷰와 기고활동도 활발하게 했다. 미국에서는 <뉴욕타임스>에서 김대중의 기고문이 게재됐으며, <크리스천 사이언스 모니터> <댈러스타임스헤럴드> 등과 인터뷰를 했다. 일본에서는 TBS, <세카이>, <주간 아사히>, <선데이 마이니치>, <주간 포스트> 등의 언론과 인터뷰를 했으며 외신기자 클럽 등에서 기자회견을 하기도 했다. 이와 같은 활동은 반공을 이유로 한국의 독재정권을 지지하는 미국과 일본의 대한정책 전환을 목표로 한 것이다.
   
1차망명 시기 김대중이 그레고리 헨더슨에게 보낸 편지.
 1차망명 시기 김대중이 그레고리 헨더슨에게 보낸 편지.
ⓒ 연세대학교 김대중도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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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해외 민주인사들과 함께 반유신 민주화운동 조직을 만들다

뿐만 아니라 김대중은 미국과 일본에 있는 한인들을 조직해서 반유신 민주화투쟁의 동력을 확보하고자 했다. 김대중은 미국과 일본에 거주하는 한인 민주인사들과 긴밀하게 소통하고 때로는 치열하게 논쟁을 하기도 했다.

그는 '대한민국 절대지지' '공산주의 반대' '선민주 후통일' 등의 운동원칙을 내세웠고 이를 관철시켰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결성된 반유신민주화 운동 단체가 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약칭 한민통)였다.

미국 한민통은 1973년 7월 6일 준비위원회가 구성됐고, 일본 한민통은 8월 4일 김대중과 재일 한인운동가들의 합의에 의해 8월 13일 발기대회, 8월 15일 선언대회를 하기로 했다. 그러나 8월 8일 납치사건이 발생해 김대중은 자신이 주도적으로 조직한 한민통의 활동을 하지는 못했다. 그럼에도 당시 김대중과 해외 한인들 사이의 결합은 큰 의미가 있다.

우선 조직 명칭에서 알 수 있듯이 김대중은 전쟁·분단·독재와 평화·통일·민주주의 사이의 역사적·국제적 관계를 중시했다. 그리고 그는 한민통을 국내외를 포괄하는 조직으로 규정했는데 이는 국내와 해외 역량의 연대와 결합을 목표로 한 최초의 민주통일운동단체라는 점에서 역사적 의미가 크다. 또한 한민통은 한국 민주화에 관심을 갖는 미국과 일본의 주요 인사 및 단체 등과 연대와 소통을 통해서 한국 민주화운동의 외연확장에 큰 역할을 했다.

유신 정권은 한민통의 활동에 큰 부담을 느꼈다. 특히 강력한 억압을 통해 국내에서의 저항을 사실상 제압하고 있던 유신 정권 입장에서는 해외에서의 한민통의 활동에 큰 부담을 느꼈다. 미국 한민통은 한국에 가장 큰 영향을 주는 미국을 중심으로 활동했기 때문이며, 막강한 조직력을 갖추고 있던 일본 한민통은 당시 아시아에서 가장 국제화된 도시인 도쿄를 기반으로 활동해 미국·유럽 등지로 반유신 여론 형성에 상당한 역할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1차망명 시기 김대중의 친필서신.
 1차망명 시기 김대중의 친필서신.
ⓒ 연세대학교 김대중도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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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납치사건은 왜 발생했는가?

이처럼 김대중은 1차 망명 기간 중에 미국 일본의 주요 인사 및 한인 민주화운동가들과의 소통과 연대를 통해 한국 민주화운동의 외연 확장에 성공했다. 이는 유신 정권으로서는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다. 특히 강력한 억압으로 국내에서의 저항을 억누르고 있던 유신정권은 성공적인 김대중의 망명 투쟁 활동에 크게 당황했다. 결국 유신 정권은 김대중의 활동을 막기 위한 대책을 내놓기 시작한다.

유신 정권 입장에서는 외부잡음이 없이 김대중의 활동을 막는 것이 최선이었다. 이를 위한 최선의 방안은 김대중이 투쟁을 포기하고 자진 귀국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부인 이희호 여사를 통해 김대중에 대한 회유와 협박을 시도했다.

그런데 이것은 실패했다. 김대중은 회유와 협박에 굴복할 생각이 없었고 이희호 역시 유신 정권에 협조할 생각이 없었다. 이희호는 김대중에게 국내 일은 걱정하지 말고 민주화투쟁을 지속할 것을 당부하기까지 했다. 그래서 김대중의 자진귀국은 이뤄지지 않았다.

이와 같은 배경에서 1973년 8월 8일 일본 도쿄에서 납치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김대중은 미국의 개입으로 죽음의 문턱에서 살아돌아올 수 있었다. 이는 매우 충격적인 사건이며 당시 유신 정권이 김대중의 망명활동에 큰 부담을 느끼고 있었음을 보여주기도 한다. 당시 한일 양국 정부는 정치결착을 통해서 사건의 진실을 은폐했다. 훗날 민간의 여러 활동을 통해 사건의 진상이 많은 부분 밝혀졌지만 아직도 몇가지 사실에 대한 결정적 증거가 부족한 이유도 이 때문이다.

이 사건은 유신 정권의 위기를 초래했다. 유신 선포 직후 억눌려있던 국내의 민주화운동세력은 이 사건을 계기로 점차적으로 활성화됐다. 그리고 해외의 한인민주화운동세력은 납치사건에서 드러난 유신 정권의 반민주적·반인권적 속성을 강조하면서 반유신 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서게 됐다.

그 과정에서 미국·일본의 주요 인사들과의 네트워크도 형성돼 한국 민주화를 위한 국제연대활동이 본격화됐다. 그래서 강고해보였던 유신 정권도 결국 국내외의 압박을 견디지 못하고 무너지게 됐다. 
  
1차망명 시기 이희호가 김대중에게 보낸 편지.
 1차망명 시기 이희호가 김대중에게 보낸 편지.
ⓒ 연세대학교 김대중도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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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1차 망명활동의 역사적 의미
  
이처럼 역사적 의미가 큰 김대중 1차 망명 투쟁의 내용과 성격을 다룬 연구서 <김대중 1차망명과 반유신민주화운동>의 출간은 여러 면에서 의미가 크다. 이 책은 유신 정권 초기 미국과 일본에서 이뤄진 김대중 망명활동의 내용과 성격을 1차 사료에 근거해서 분석한 최초의 연구서라는 점에서 학문적인 의미가 크다.

또한 이 책은 망명시기 김대중과 해외 한인운동가들 사이의 소통과 논쟁을 다양한 사료를 통해서 치밀하게 분석해 양측의 입장을 객관적으로 밝혀내는 데에 성공했다. 김대중은 한민통의 결성 과정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지만, 납치사건으로 인해 정작 활동을 하지는 못했다. 그래서 해외 한인민주화운동 연구에서 김대중 관련 내용은 많이 누락돼 있었는데 이 연구는 이러한 문제점을 해소하는 데에 중요한 기여를 했다. 그래서 이 책은 한국 민주화운동사 연구의 외연을 확장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전체적으로 보면 김대중의 1차망명활동은 한국 민주화운동의 국제화와 외연확장에 결정적인 공헌을 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김대중은 미국인과 일본인을 상대로 한 국제연대 활동을 전개했고 해외 한인들의 역량을 국내 민주화운동의 동력으로 삼으려고 하는 등 한국 민주화운동의 지평을 크게 확장했다.

같은 김대중의 활동은 그 이후 한국 민주화운동 전개 과정에 큰 영향을 줬다. 그래서 이러한 내용을 정리 분석한 이 연구서는 학문적인 의미가 크다.

덧붙이는 글 | 사회학 박사이며 김대중 연구자입니다. <김대중과 중국>(연세대학교 출판문화원, 2023)의 공저자, <김대중 1차망명과 반유신민주화운동>(연세대학교 출판문화원, 2023)의 공저자이며 김대중 재평가를 위한 김대중연구서 <성공한 대통령 김대중과 현대사>(시대의창, 2021)를 썼습니다.


김대중 1차 망명과 반유신 민주화 운동

류상영, 정근주, 장신기 (지은이), 연세대학교출판문화원(2023)


태그:#김대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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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학 박사이며 연세대학교 김대중도서관에서 사료연구 업무를 담당하고 있습니다. 김대중에 대한 재평가를 목적으로 한 김대중연구서인 '성공한 대통령 김대중과 현대사'(시대의창, 2021)를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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