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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 전 어느 날 문득 사무실을 벗어나 스터디카페(독서실과 카페를 결합한 공간)라는 곳에서 글을 쓰고 싶었다. 디지털 문명보다는 아날로그 문화에 익숙한 나이에 일명 스터디카페를 찾았다.

영어 선생이라고 눈으로 보는 영어 표현엔 익숙하지만 손가락까지 함께 움직이며 멀티 정보를 처리하는 신문물과의 만남에 두려움이 앞섰다. 찾아간 카페의 키오스크가 한참 위에 설치되어 있어서 돋보기안경으로는 글자가 흐렸다. 단추를 몇 번 눌러도 '작동 오류' 문자만 튀어나왔다.

결국 키오스크 작동법을 몰라 남들이 가본다는 스터디 카페에서 자판기를 두드리며 글을 쓰고 싶은 내 모습을 그려내지 못했었다. 그 후론 딸래미 덕분에 기계 사용법을 익혔다.

동네 햄버거집 키오스크에 도전하는 학생들

오늘은 말랭이마을 어머님들의 한글 공부 날, 지난주에 다음과 같은 공지문을 내걸었었다.

"어머님들께. 다음 주는 어머님들의 희망 사항대로 '키오스크(무인주문기계)'가 있는 상점에 가서 직접 주문을 해볼 거예요. 카드나 현금 모두 가능하고요, 1만 원 이내로 드시고 싶은 거 주문할 거예요. 은행의 ATM(입출금 기계)이나 상점의 키오스크 정도는 사용할 줄 아셔야 진정한 멋쟁이가 되시는 거예요."

그렇게 지난 19일도 변함없이 동네 글방 학생들의 환대를 받으며 글방에 입장했다. 반장 어머님 구령에 따라 인사를 나눈 뒤, 지난주 숙제였던 '모시떡'을 주제로 한 글을 발표하는 시간이 되었다.

이제는 '앞에 나와서 발표하는 것쯤이야'라며 자신 있게 당신들의 글 작품을 소개한다. 모시풀로 떡 해먹기, 부침하기, 모시대로 옷 만들기까지 당신들의 어릴 적 경험을 말했다. 쑥떡보다 맛있다느니, 양반네님들이 좋아했다느니, 배고픈 시절 모시 잎으로 만든 개떡 송편떡이 최고라느니, 끝도 없이 옛날얘기가 쏟아졌다.

뒤이어 시 한 편과 그림책 들려주기 수업이 끝나고 모두 동네에 있는 L햄버거집을 찾았다. 전날 젊은 주인장에게 동네 글방 얘기를 전하며 키오스크 작동법을 익히는 수업이니 도와달라고 요청했다. 아들 같은 또래 주인장의 밝은 미소와 점잖은 언행이 맘에 들었다.

"어머님들, 지금부터 한 사람씩 오셔서 사장님의 설명을 들을 거예요. 일단 메뉴판을 보시고 드시고 싶은 상품을 맘속으로 고르세요. 한 사람이 기계를 작동할 때 다른 분들은 옆에서 잘 들어보세요. 기계가 엄청 똑똑해서 어렵지 않게 어머님들도 다 할 수 있어요."

첫 번째 주자, P어머님이 나오셔서 팥빙수를 시키고 싶다고 했다. 모니터 화면의 첫 글자 '여기에서 주문하세요'라는 표시가 순식간에 사라져서 순간 '오메?' 하며 당황하기 일쑤. 사장님의 침착한 지시대로 어머님들은 검지손가락에 신경을 바짝 곤두세웠다.
 
말랭이마을 똑순이 어머님들이 손가락을 떠네요.
▲ 키오스크 현금결제하는 J어머님 말랭이마을 똑순이 어머님들이 손가락을 떠네요.
ⓒ 박향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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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아이 말 배우듯, 화면 하나하나 설명을 놓칠세라, 배우고자 덩달아 뛰는 가슴 부여잡고, 신발 속에선 발가락을 둥둥거리며 주문에 필요한 과정을 온몸으로 따라갔다. 어머님들이 조금만 지체해도 후딱 말과 손이 튀어 나가니, 글자 읽고 상품 찾을 시간이 부족했다. 그래도 10명 어른의 주문을 일일이 도와주며, 결제 방법 후 주문서 배출까지 전 과정을 지켜보는 재미가 즐겁기만 했다.

산다는 것은 '한 편의 시를 짓는 것'

글방 선생이라고 꼬박꼬박 몫을 챙겨주시는 어머님들. 이번에도 시원한 팥빙수와 불고기 햄버거를 당신 손으로 주문하면서 학습의 가치를 몸소 체득하셨다. 낭독 시
'만일 내가 인생을 다시 산다면'을 나눈 후 가장 많이 나온 말은 '여행'이었다.

평생 부부끼리 여행 한 번 하지 못했다고 울먹거리는 K어머님. 이제라도 운전을 배워 남은 평생 아픈 남편과 차로 여행하고 싶다는 J어머님. 주문서를 옆에 끼고 햄버거, 치킨, 팥빙수, 오징어튀김 등 나온 음식들을 드시면서 가까운 동네 마실이라도 멋진 여행 같은 느낌이라고 입을 모았다.
 
지역 방송 출연으로 알아보는 이가 늘었다고 겸연쩍, 그래도 좋다고 말씀하시네요.
▲ 키오스크 카드결제하는 C어머님 지역 방송 출연으로 알아보는 이가 늘었다고 겸연쩍, 그래도 좋다고 말씀하시네요.
ⓒ 박향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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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띵동' 소리에 주문번호 확인, 프론트에서 각자의 음식을 받아가세요.
▲ 키오스크 주문번호 확인하며 기다리는 어머님들 '띵동' 소리에 주문번호 확인, 프론트에서 각자의 음식을 받아가세요.
ⓒ 박향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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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봄에는 핸드폰 사용법을 알려드렸는데, 그 후로 단톡에 글을 남기기까지 하셨다. 키오스크 사용법을 배우셨으니 손주들과 나들이하면서 당신 손으로 손주들이 먹고 싶어 하는 음식을 주문해 주실 것이다. 연배가 비슷한 친정엄마에게도 이 기계 작동법을 알려드려야 겠다 생각하면서 다음에 무얼 배우고 싶은지를 물었다.

"은행에 가서 돈을 넣을 줄만 알지, 기계로 뺄 줄을 몰라. 언제 그거 한 번 가르쳐줘요."

비밀번호를 알아야 인출하는 ATM기계 사용법. 얼마나 글방 선생을 믿고 있으면 자연스럽게 의심 없이 알려달라고 하실까 싶어, 어머님께 농담을 던졌다.

"제가 어머님 통장 다 비우면 어떡하실려고요~"
"아이고, 그러면 어쩌. 남의 물건 탐할 사람이 우리 집에 연탄을 기부허겄는가."


그러고 보니 작년 겨울에 말랭이마을에서 유일하게 연탄을 사용하는 J어머님께 연탄 300장을 기부했다. 두 해 동안 살아보니 이 어머님이야말로 동네에서는 가장 귀한 어머니. 매월 열리는 동네 골목잔치의 모든 먹거리를 장만하고, 동네 사람들의 의견을 조율하신다. 그러면서도 20년째 아픈 남편 부양에는 신앙의 힘으로 이겨내신다 했다.

'산다는 것은 한 편의 시를 짓는 것'이라는 말 한마디가 생각났다. 어쩌다 인연 한 줄이 생겨나 사방팔방으로 씨줄 날줄 짜인 하얀 모시포 같은 고귀한 인연들이 되어갈까.

시인 나딘 스테어는 85세 되던 해에 '만일 내가 인생을 다시 산다면'이라는 시를 썼다 한다. 나이만 보면 우리 말랭이 마을 어머님들은 청춘 그 자체이다. '무엇을 더 바라기보다 있는 것을 잃지 않는 것이 더 중하제'라고 한 어머님의 귀한 말씀이 오늘의 화면에 채워진다.

만일 내가 인생을 다시 산다면 - 나딘 스테어

​만일 내가 인생을 다시 산다면
이번에는 더 많이 실수하리라
느긋하고 유연하게 살리라
그리고 좀 더 철없이 굴리라
되도록 심각해지지 않고
보다 많은 기회를 놓치지 않으리라
(하략)

태그:#키오스크, #군산말랭이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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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과 희망은 어디에서 올까요. 무지개 너머에서 올까요. 오는 것이 아니라 '있는 것'임을 알아요. 그것도 바로 내 안에. 내 몸과 오감이 부딪히는 곳곳에 있어요. 비록 여리더라도 한줄기 햇빛이 있는 곳. 작지만 정의의 씨앗이 움트기 하는 곳. 언제라도 부당함을 소리칠 수 있는 곳. 그곳에서 일상이 주는 행복과 희망 얘기를 공유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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