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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할아버지 전두환은 학살자"라며 광주에 내려가 정성껏 열사의 묘비를 닦고, 5.18 유가족 앞에서 무릎꿇고 사죄하는 전두환의 손자라니! 전두환은 끝까지 자신의 죄를 인정하지 않은 채 세상을 떠나 그의 속죄를 기다리는 모든 이들을 허탈하게 만들었다. 그렇기에 진심으로 사과하는 전우원의 모습은 발뺌하던 생전 전두환의 모습에 대비되어 더욱 의미심장해 보였다. 

전우원의 예기치 않은 등장은 전두환의 사망과 함께 묻혀가던 그의 과보를 다시 수면 위로 끌어 올렸다. 일가와 측근들에 대해서도 주목하게 만들었다. 정당치 못한 검은 돈의 물질적 풍요를 누리는 일을 뼈저리게 부끄러워하는 이가 있음에 다행스러웠다. 죄값을 치르고 떳떳하게 살고자 하는 의지가 큰 용기를 불러왔음에 감사했다. 과연 이 용기의 파장이 어디까지 퍼져 나갈지 기대하며 이런저런 생각들로 두서없을 때인 지난 5월, 시의적절한 책이 출판되어 반가웠다.
 
전두환의 마지막 33년 - 그는 왜 무릎 꿇지 않았는가, 정아은(지은이)
 전두환의 마지막 33년 - 그는 왜 무릎 꿇지 않았는가, 정아은(지은이)
ⓒ 사이드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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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정아은 작가의 <전두환의 마지막 33년>이다. 작가는 2013년 장편소설 <모던하트>로 한겨레문학상을 수상하며 작가로서 활동을 시작했다. 전두환의 통치기간인 1980년대에 초등학교 시절을 보낸 그는 불안과 비밀스런 공기에 휩싸여 인간에 대한 호기심을 키웠다고 한다. 그 호기심은 성인이 된 후 사회와 국가, 권력과 정치와 역사에 대한 고민과 탐구로 이어졌고 누구보다 전두환이란 인물에 집중하기에 이르렀다.

작가의 질문 "전두환은 왜" 

작가는 이 책을 통해 전두환 시대를 파헤치며 두 가지 본질적 물음에 대한 답을 구한다. '전두환은 퇴임 후 사망 때까지 33년간 왜 한번도 무릎꿇지 않았는가?'와 '우리 사회는 왜 그를 단죄하지 못했는가?'이다. 전두환 시대를 산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자연스럽게 떠올렸을 법한 질문이기에 강도 높은 흡입력으로 독자를 책 속으로 빨려 들어가게 만든다.

첫 번째 질문의 답을 찾기 위해 작가는 <전두환 회고록>과 <전두환 육성 증언>을 참고하고 육사 출신들을 인터뷰했다. 그리고 분석해 낸 전두환의 성품적 기질을 '특별한 가벼움'이라 칭했다. 자신의 죄를 직면하면서도 그는 평생 심각함, 고뇌, 죄책감의 수렁에 빠지지 않았다. 그저 현상의 표면에 머무르며 극미량의 감정을 느끼다가 즉시 빠져나가는 능력, 즉 '가벼움'을 장착했기 때문이라고 저자는 진단한다.

실제로, 권력에 눈 먼 전두환은 자신의 야망에 걸림돌이 되는 국민들을 용공세력이나 부랑자와 범죄자들이라 낙인 찍어 타자화한 후 12.12쿠데타와 광주학살, 삼청교육대 등 보통 사람이라면 차마 하지 못할 일들을 서슴없이 저지르고도 개의치 않았다. 폭력으로 권좌를 꿰찼기에 불안과 두려움을 피할 수 없었을 텐데도 결코 반성하지 않았다. 전두환의 이런 심리적 특징을 인간의 발달과정을 들어 분석해 낸 저자의 설명이 일리 있어 보인다.
 
"... 사춘기 시절의 사람은 '나'를 중심으로 세상을 바라본다... 그리고 어른이 되어 정신의 성숙을 이루면서 알게 된다... 세상을 전체로서 볼 능력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어른'에게 찾아오는 것은 '겸손'이라는 미덕이다. 그리고 겸손이라는 귀한 미덕을 얻기 위해 필히 통과해야 하는 것은 '자기 성찰'이다. 인간은 '나'의 못남, 비겁함, 동물성, 한계와 처절하게 대면할 때에야 비로소 '타인'을 깊이 있게 들여다 보고 연민할 수 있다... 전두환에게는 이런 과정이 일어나지 않았다. 그는 평생 사춘기 소년으로 살았다. 자신을 중심에 놓고 '나는 옳고 너는 그르다'고 확신하며 뜻한 일에 망설임 없이 덤벼 들었다... 능력의 차원에서 '안되는 것'과 윤리적 차원에서 '안되는 것'을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으로 평생을 살았다." (196쪽)
29일 대구 팔공산 동화사에서 고 전두환씨의 삼우제가 열리고 있다. 2021.11.29
 29일 대구 팔공산 동화사에서 고 전두환씨의 삼우제가 열리고 있다. 2021.11.29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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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질문 '왜 우리 사회는 그를 단죄하지 못했는가'의 답을 구하기 위해 저자는 시대적 상황을 면밀히 살폈다. 무엇보다 8년의 통치기간 동안 전두환 덕분에 정계와 언론계의 고위직에 오른 인사들이 넘쳤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곳곳에 제 세력들을 심어두었는데 어찌 그의 단죄를 당당히 외칠 수 있겠는가. 그 중에서도 권력을 견제해야 할 언론이 가장 심했다고 한다. 

저자는 전두환이 단죄 되지 않은 또 다른 이유로 의사결정권을 지닌 사회 지도층이 제 역할을 충실히 해내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당시 정치인도, 국회의원도, 검사도, 판사도 그 누구도 그의 무릎을 꿇리기 위해 사적이익을 희생하며 나서지 않았다는 것이다. 특히 당시 검사는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며 불기소 처분을 했다가 정치지형에 따라 몇 개월 뒤 다시 기소하는 촌극까지 벌였다고 하니 씁쓸할 뿐이다.

김대중 당선인이 김영삼 대통령을 설득해 전두환을 투옥 22개월 만에 특별사면한 조치도 단죄가 되지 못한 주요 원인으로 본다. 잘못을 인정하지도, 용서를 구하지도, 죄값을 다 치르기도 전에 범죄자에게 구원이 내린 것이다. 저자의 표현대로 현대사를 곱씹을 때마다 탄식하게 만드는 내내 아쉬운 장면이다. 저자는 김대중의 그 선택은 1987년 야권 대선 후보 단일화 실패에서 기인하므로 결국 전두환의 때이른 사면은 김영삼과 김대중의 공통의 죄과였다고 해석한다.

전두환에게서 자유롭지 않은 사회

저자가 내린 분석들을 따르다 보면 자연스레 현재로 시선이 돌려진다. 현 정권은 주요 요직에 제 사람만을 심고 있지 않는지, 사회지도층이란 사람들이 소신껏 제 역할에 충실하고 있는지, 언론은 제대로 권력을 견제하고 있는지, 정치인들의 야합에 역사의 중요한 일들이 오판되고 있지나 않은지... 전두환이 남긴 병폐로부터 여전히 자유롭지 못한 것 같아 답답해지는 심정을 피할 수 없다.

한가지 더 저자가 주목한 점은 전두환을 찬양하거나 그 시대를 낭만적으로 보는 현상이었다. 저자는 구체적으로 누가 왜 그 시절을 그리워하는가를 파고 들며 자본주의의 발달 과정에 따라 변화하는 사회문화적 상황을 근거로 현상의 기저에 놓인 심리를 파악해 낸다. 그리고 이런 잘못된 현상을 교육과 정책으로 바로잡지 못해 증폭되어갈 경우 그 끝에 발생할지도 모를 변종에 대해 우려를 표한다. 

마지막으로 저자는 전우원의 등장을 작은 희망의 파장으로 해석한다. 범죄, 나태함, 이기심, 미움, 적대감이 팽배한 사회에 균열을 가져올 수 있고, 감정, 느낌, 정서, 무의식으로 불리는 비언어적 영역에 영향을 미쳐 어느 순간 법과 제도를 바꿔놓을 수도 있지 않을까 희망한다.

쇳덩이 같은 전두환을 철저히 분해해 들여다 본 저자 덕분에 나도 함께 전두환이라는 인간의 모습에 가까이 접근해 볼 수 있었다. 저자가 인간에 대한 이해가 깊고 상상력이 뛰어난 소설가였기에 가능했던 일로 보인다. 많은 이들이 이 책을 꼭 읽어보았으면 좋겠다. 그 이유는 정병설 교수의 추천사에 명백하게 잘 담겨 있으므로 여기에 옮겨 본다.
 
" '전두환을 읽어내는 일은 한국을 읽어내는 일이다.' 저자는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국 정치사를 복원했다. 이승만부터 박근혜에 이르기까지 역대 대통령의 성격을 분석했고, 그것을 정치 환경과 연결해 정치사적 인과 관계의 흐름을 밝혀 서술했다. 이 책을 읽으면 과거와 오늘의 대통령은 물론 내일의 이상적 대통령까지 보인다. 미래 한국의 민주주의로 가는 도중에 이 책은 꼭 거쳐가야 하는 환승역이다."

전두환의 마지막 33년 - 그는 왜 무릎 꿇지 않았는가

정아은 (지은이), 사이드웨이(2023)


태그:#전두환, #전우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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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면서 궁금한 게 많아 책에서, 사람들에게서 답을 찾아가는 여정을 즐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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