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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지 사람들에게 제주는 버려진 땅이었고 죄수를 보내는 유배지였다. 지금은 이익을 노려 자본이 몰려들지만 진정으로 제주를 위하는 이는 많지 않은 듯하다. 나 또한 제주 사람 눈에는 그렇게 비칠 수 있으리라. 그런 제주인의 한과 정서를 이해하려다 제주학에 빠졌고 도민이 됐다. 키아오라리조트를 운영하면서 제주가 진정한 미디어 리터러시 교육의 중심이 되게 하겠다는 각오로 한국미디어리터러시스쿨(한미리스쿨)을 설립했다. 제주는 오름의 섬인데 키아오라 바로 뒷산이 대수산봉이고 정상에는 봉수대가 있었기에 '수산봉수'라는 팻말을 발견하고 반가웠다. '수산봉수의 제주살이'는 제주학을 배경으로 내 일상에 사회적 발언을 실어 보내는 글이다.[기자말]
3일 이른 아침 제주4.3 유적지 사진을 찍으려고 성산 일출봉 근처 광치기해변 터진목 학살 현장에 들렀다가 근처 위령비 앞에 술을 치고 있는 한 할머니를 만났다. 이름은 정순자(76). '유족이냐'는 질문에 정씨는 "우리 할머니가 이 해변에서 총살당했다"고 답했다. 그의 할머니, 오남윤씨는 학살을 면하기 위해 일본으로 도피한 아들 정양필씨 대신 처형된, 이른바 '대살' 희생자였다. 
 
정순자씨는 아버지 대신 학살된 할머니를 추모하려고 3일 아침 ‘제주4.3 성산읍 희생자위령비’를 찾았다.
▲ 4.3 유족 정순자 정순자씨는 아버지 대신 학살된 할머니를 추모하려고 3일 아침 ‘제주4.3 성산읍 희생자위령비’를 찾았다.
ⓒ 이봉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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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살'은 학살을 면하려고 한라산 자락이나 일본 등으로 도피한 청장년들 대신 배우자나 어머니를 납치했다가 출두하지 않으면 처형하는 극악한 연좌제였다. 4.3 당시 성산포는 서북청년으로 구성된 특별중대가 주둔하면서 400여 명이 참살돼 죽음과 통곡소리가 끊이지 않았던 곳이다. 

'다크 투어리즘' 현장 그냥 지나치지 마세요

제주4.3은 <한겨레> 기자인 허호준씨가 최근 발간한 <4.3, 19470301-19540921 기나긴 침묵 밖으로>라는 책 제목이 말해주듯 7년여 장기간에 걸쳐 자행된 국가폭력이었다. 그러나 제주는 온통 동백과 유채꽃으로 뒤덮인 아름다운 관광지로만 인식돼 제주 곳곳이 학살의 현장임을 아는 관광객은 많지 않다.

400여 명이 희생된 성산 터진목 학살 현장도 일출봉 옆으로 펼쳐지는 일출을 보기 좋은 장소로 유명할 뿐이다. 4.3 유족들은 지금도 고통받고 있지만 그 또한 남의 일이 돼 갈 뿐 아니라 가해 세력의 후예들이 수시로 상처를 헤집는다. 정순자씨도 '4.3 때 학살 주범인 서북청년단이 4.3평화공원에 온다는데, 항의하러 가고 싶어도 다리를 수술해 가지 못 한다'며 분개했다.

정씨는 할머니가 학살된 뒤 아버지마저 '빨갱이'로 낙인 찍혀 23년 동안 귀국하지 못하는 바람에 고아처럼 살았다고 한다. '뭘 하고 살았느냐'는 질문에 "살아시난 살았쥬"라며 금세 눈자위가 벌개졌다. 어릴 때부터 해녀가 돼 평생 물질로 살았다고 한다.
 
일출봉이 보이는 광치치해변 터진목 학살 현장. 추모석에는 찾는 이가 많지 않은 듯 4월 3일 아침인데도 조화를 꽂는 용기가 비어 있다.
▲ 터진목 위령비 일출봉이 보이는 광치치해변 터진목 학살 현장. 추모석에는 찾는 이가 많지 않은 듯 4월 3일 아침인데도 조화를 꽂는 용기가 비어 있다.
ⓒ 이봉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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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때 가장 많이 쓰인 슬픈 말들

'살아시난 살았쥬'란 정씨의 말은 '살았으니까 살았지'라는 뜻의 제주어다. 살 상황이 아니었는데 구사일생으로 살았거나 어렵게 살아왔다는 얘기다.

이 말은 서귀포시 제주올레 여행자센터에서 하루 전날 배운 제주어여서 반갑기까지 했다. 제주올레 서명숙 이사장은 지난 3월 12일부터 일요일마다 8주 연속 제주어교실을 열고 있다. 
 
서명숙 이사장이 2일 제주올레 여행자센터에서 4.3 관련 제주어교실 강연을 하고 있다.
▲ 서명숙 이사장 강연 서명숙 이사장이 2일 제주올레 여행자센터에서 4.3 관련 제주어교실 강연을 하고 있다.
ⓒ 이봉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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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숨허라이."

이는 말하지 말고 침묵하라는 뜻의 제주어다. 사람은 숨을 쉬며 말을 해야 하는데 숨을 속으로 삼키라는 당부다. 제주도민들은 강요된 침묵의 세월을 반세기 넘게 살아왔다. '4.3 때 부모가 죽었다'는 말만 해도 '폭도 새끼'로 몰려 연좌제가 작동하던 인고의 반세기였다.

1948년 발발한 제주4.3 사건은 인구 10%인 3만 명이 희생된 '대학살극'인데도 나라가 '국가공권력에 의한 대규모 민간인 희생'이라고 인정한 것이 2003년이었다. 그리고 20년, 제주4.3을 왜곡하는 집권여당과 정부 당국자의 발언이 이어지고 악랄한 가해자였던 '서북청년단'을 계승하겠다는 무리가 제주에 다시 나타났다.

산으로 가도 안 가도 죽음은 가까이 있었다

"여기 시민 몬딱 죽는다게. 글라 글라 산으로 가게. 애기들 재기재기 업으라."
(여기 있으면 모두 죽는다. 가자 가자 산으로 가자. 애기들 빨리빨리 업으라.)


대부분 사람이 '산사람'이 되고 싶어 산으로 간 게 아니라는 사실이 말 속에 들어있다. 살려면 우선 산으로 도피할 수밖에 없었던 절박한 상황을 말해준다. 
 
제주어 강연을 경청하고 있는 수강생들. 강연 뒤 한 수강생은 “올레길 걸으러 제주 왔는데 올레길이 달리 보일 것 같다”고 말했다.
▲ 서명숙 강연 청중 제주어 강연을 경청하고 있는 수강생들. 강연 뒤 한 수강생은 “올레길 걸으러 제주 왔는데 올레길이 달리 보일 것 같다”고 말했다.
ⓒ 이봉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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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 이신 사람이나 곱으로 댕기지 무사 곱으레 댕기느냐?"
(죄 있는 사람이나 숨으러 다니지 왜 숨어 다니느냐?)


이렇게 생각하고 마을에 남은 사람들도 대개 학살을 면치 못했다.

"혼저 글라. 혼저 글라. 오렌 허난 재기 안 가민 두드려 분다게."
(빨리 가자. 빨리 가자. 오라고 하니까 빨리 안 가면 때려버린다.)


서북청년단이나 군경이 집합하라고 하는데 빨리 안 가면 팬다는 뜻이다. 그러나 모인 사람들은 군경 가족을 빼고는 학살된 이가 많았다.

"죽어신디 어떵항 이추룩 사람 말소리 들어점신고."
(죽었는데 어떻게 이토록 사람 말소리가 들리지!)


등에 업힌 아이만 총에 맞아 죽고 자신은 살아남은 어머니가 한 말이다. 총에 맞아 자신이 죽은 줄 알았는데 아이만 죽고 뜨거운 피가 등을 적셔 상황을 알게 되는 슬픈 사연이다.
 
서귀포시 제주올레여행자센터는 숙박을 할 수 있고 올레 답사 정보도 제공한다.
▲ 제주올레여행자센터 서귀포시 제주올레여행자센터는 숙박을 할 수 있고 올레 답사 정보도 제공한다.
ⓒ 이봉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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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의 아름다움은 슬픔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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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명숙 이사장은 제주도를 한 바퀴 도는 올레길을 구상하면서 '다크 투어리즘(dark tourism)'도 겸하도록 가능하면 4.3 유적지를 지나가게 설계했다고 한다. 그는 노벨문학상을 탄 오르한 파묵을 인용하면서 '모든 풍경의 아름다움은 슬픔에 있다'고 강조했다. 그의 조국인 튀르키예 또한 제주도 못지않은 기구한 역사를 겪었다.

서 이사장은 저서 <제주올레여행>에서 제주올레를 걷고 또 걸으며 깨닫게 됐다고 한다. '걸어서 다녀보지 않고서는 그곳을 안다고 결코 말할 수 없음을. 두 발로 발도장을 찍은 곳만이 온전한 내 것이 된다는 것을.' 
 
4.3 주요 유적지. 중산간지대 말고 해안지대는 거의 다 올레길로 연결된다.
 4.3 주요 유적지. 중산간지대 말고 해안지대는 거의 다 올레길로 연결된다.
ⓒ 허호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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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 이사장은 이북 출신인 서북청년단과 제주도민들의 언어가 소통이 힘들 정도로 달랐던 점도 더 많은 희생을 초래한 원인으로 본다. 같은 언어를 쓰는 민족이라는 동질감이 약해 더 무자비하게 대했다는 설명이다. 그는 활발한 저술 등을 통해 제주어와 제주의 독자적인 문화를 소개한 공로로 지난 2월 제주대에서 명예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덧붙이는 글 | 시민언론 민들레에도 실렸습니다.


태그:#제주4.3, #제주어강연, #제주올레서명숙, #한미리스쿨, #키아오라리조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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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제주 키아오라리조트 공동대표, 한국미디어리터러시스쿨(한미리스쿨) 원장, MBC저널리즘스쿨 교수(초대 디렉터)로 일하고 있습니다. 글쓴이는 조선일보 기자, 한겨레 경제부장, 세명대 저널리즘스쿨 초대원장(2008~2019), 한겨레/경향 시민편집인/칼럼니스트, KBS 미디어포커스/저널리즘토크쇼J 자문위원, 연합뉴스수용자권익위원장 등을 역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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