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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이 겸재 정선의 계산정거도, 오른쪽이 천원권 지폐
▲ 계산정거도와 1000원권 지폐 왼쪽이 겸재 정선의 계산정거도, 오른쪽이 천원권 지폐
ⓒ 이정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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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현재 사용하고 있는 천원 권 지폐 전면에는 조선시대 인물이 그려져 있으며 퇴계 이황이라고 명문화 되어있다. 퇴계가 말년에 즐겨 썼다는 정자관을 쓰지 않고 왜 복건을 쓰고 있는지 아리송하다.

뒷면에는 진경산수화 한 폭이 그려져 있으나 화제나 그린 사람을 밝히지 밝히지 않고 있다. 때문에 이 그림이 도산서원을 그린 것이냐? 아니냐? 의견이 분분하다. 분명한 것은 리움 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보물585호 겸재 정선의 계상정거도(溪上靜居圖)라는 것이다.

그림을 자세히 살펴보면 겸재 정선이 그린 그림 하단에는 냇물이 찰랑거리고 나룻배가 메어있다. 안동댐이 축조된 지금이야 물이 차오를 수 있지만 겸재가 살아 있을 1700년대에도 그랬을까?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궁금하면 물어보는 것이 아니라 직접 가봐야 한다. 궁금증이 증폭되어 길을 나섰다.
 
눈을 이고 있는 청량산
▲ 청량산 눈을 이고 있는 청량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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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을 재촉하는 운무가 한폭의 수묵화처럼 아름답다
▲ 운무 봄을 재촉하는 운무가 한폭의 수묵화처럼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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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동강 줄기를 따라 도산서원 가는 길은 봄은 왔으나 봄 같지 않았다.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 "봄은 왔으나 봄 같지 않구나" 우리가 흔히 꽃샘추위를 일컬어 인용하는 이 말은 삼천리금수상산 우리 산하의 봄을 이르는 말이 아니다.

양가집 딸로 태어나 한나라 원제의 후궁으로 들어갔으나 모연수란 궁정화가의 농간 때문에 황제의 부름을 받아보지 못하고 흉노족 수장 호한야에게 시집간 왕소군의 심경을 당나라 시인 동방규(東方叫)가 읊은 소군원(昭君怨)이라는 제목의 시이다. 그럼 소군은 누구일까?

중국인들에게 회자되는 4대 미녀가 있다. 물속을 유유히 헤엄치던 물고기가 그녀를 바라보느라 헤엄칠 생각을 잊고 가라 앉아 버렸다는 침어(侵漁) 서시와 하늘을 날던 기러기가 날갯짓을 잊고 떨어졌다는 낙안(落雁) 왕소군, 밤하늘에 휘영청 걸린 달조차 숨어 버렸다는 폐월(閉月) 초선과 꽃조차 부끄러워 고개를 숙였다는 수화(羞花) 양귀비다.
 
봄을 재촉하는 운무가 자욱하다
▲ 운무 봄을 재촉하는 운무가 자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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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호반 자연휴양림에서 선성현으로 가는 부교를 밟을 때는 겨우내 얼어있던 안동호의 얼음이 갈라지는 소리가 들렸다. 봄이 오는 소리다. 하늘을 나는 초음속 전투기의 엔진음이 인공적인 소음이라면 '쩌어억' 하며 얼음 갈라지는 소리는 청아함이 메아리처럼 이어지며 건너편 호안에서 멎었다. 그 소리는 신비로움과 공포를 자아내게 했다.

도산서원에 도착하여 앞뜰을 바라보니 갈수기에 수심이 얕아진 안동호 유입지천에 냇물이 졸졸 흐르고 있었다. 이제야 계상정거도의 의문을 풀 수 있었다. 계상정거도(溪上靜居圖)는 한자 그대로 '냇가에서 조용하게 거한다'는 뜻이다. 안동댐 축조로 만수위 때는 냇물의 흔적이 없지만 갈수기에는 냇물이 드러났다. 강세황이 도산서원도에 몽천(蒙川)이라 기록한 바로 그 개천이다.

천원 권 화폐의 배경은 퇴계 이황이 그의 고향 토계에 낙향하여 저술에 진력할 때의 완락재의 모습이다. 청량산에서 출발한 뒷산은 병풍처럼 쳐져 있고 앞에는 몽천이 졸졸 흐르는 평화로운 완락재. 그곳이 도산서원이 생기기전 완락재(玩樂齋)다. 지금도 완락재는 서원 안에 있다.

퇴계와 겸재는 170년 정도 세대차가 나는 인물이다. 그러하니 퇴계가 주자서절요서를 집필할 때 직접 실사 그림을 그렸을 리는 없을 테고 겸재가 경산현감과 포항현감으로 부임 받았을 때 이곳을 방문하여 그렸을 것이라 유추해볼 수 있다.
 
낫놓고 기역자 모르는 사람이 있듯이 도산서원 우물에서 우물 정자를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우물 정(井)자를 상징적으로 표현했다
▲ 도산서원 우물 열정 낫놓고 기역자 모르는 사람이 있듯이 도산서원 우물에서 우물 정자를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우물 정(井)자를 상징적으로 표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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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내
▲ 도산서원 원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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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판
▲ 도산서원 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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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산서원과 도산서당 일원을 둘러보았다고 도산서원을 다 보았다고 하면 도산서원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개울 건너에 있는 시사단에서 도산서원을 바라보아야 도산서원을 다 보았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시사단은 아무에게나 허하지 않는다. 안동호의 잠수교 세월교가 드러나는 갈수기가 행운이다. 그렇잖으면 차로 40분가량을 우회해야 찾아볼 수 있다.

우리가 궁궐이나 절집, 또는 사적지에 갔을 때 어느 방향을 보고 서 있느냐에 따라 주객이 달라진다. 경복궁을 일예로 들어보자. 광화문을 등에 두고 근정전 현판을 바라보았을 때는 임금을 배알하는 객이 된다. 반대로 임금만 앉을 수 있는 어좌를 등지고 남산을 바라보았을 때는 신하를 내려다보는 주가 되는 느낌이다.
 
무량수전을 등지고 바라본 소백산맥 줄기
▲ 부석사 무량수전을 등지고 바라본 소백산맥 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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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집도 마찬가지이다. 무량수전 현판을 마주보고 바라보았을 때는 경배하러온 중생이 되지만 배흘림기둥을 등지고 바라보았을 때는 아스라한 소백산맥 줄기를 바라볼 수 있으며 안양루 가파른 계단을 헐떡이며 올라오는 중생을 내려다보게 된다.
 
도산서원 앞에 있는 작은 동산
▲ 시사단 도산서원 앞에 있는 작은 동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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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산서원 맞은 편 개울건너 작은 동산이 시사단(試士壇)이다. 1792년 정조임금이 퇴계 이황의 학덕과 유업을 기리는 뜻에서 도산별과를 신설하여 시험을 치르게 하였다. 왕도 한양이 아닌 지방에서 과거시험을 치르게 하는 것은 특별한 예외다. 그것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것이 시사단이다.
 
시사단에서 바라본 도산서원
▲ 도산서원 시사단에서 바라본 도산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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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단에서 바라보니 도산서원이 한눈에 들어왔다. 역시 계산정거도와는 다르다. 천원 권 화폐에 그려진 그림은 도산서원이 아니라 완락재였다는 것을 재확인 시켜주었다. 또한 겸재 사후에 조성된 시사단에 겸재가 오를 수도 없었고 드론이 없던 그 시절에 겸재가 바라본 눈높이는 시사단이 아니라 낙동강 건너 월란정사 쪽에서 부감법으로 바라본 시야 각(角)이다.

태그:#도산서원, #계산정거도, #퇴계이황, #안동호, #청량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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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事實)과 사실(史實)의 행간에서 진실(眞實)을 캐는 광원. 그동안 <이방원전> <수양대군>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소현세자> <조선 건국지> <뜻밖의 조선역사> <간신의 민낯> <진령군> <하루> 대하역사소설<압록강>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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