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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출신인 김영희 한국전쟁민간인학살유해발굴 자원봉사자(민족문제연구소 진주지회 회원).
 교사 출신인 김영희 한국전쟁민간인학살유해발굴 자원봉사자(민족문제연구소 진주지회 회원).
ⓒ 윤성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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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이념의 동물이다. 생각이 다를 수 있다. 하지만 생각과 이념이 다르다는 이유로 국가폭력에 의해 만행을 저지르는 것은,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일이다."

"무엇보다 지금까지 발굴한 장소를 '교육현장'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하는 게 제 목표인데 쉽지가 않다."


한국전쟁 민간인 학살 유해발굴 공동조사단 자원봉사자인 김영희(59. 경남 진주)씨가 한 말이다. 학교 교사 출신인 그는 대학(원)에서 역사를 공부했고, 창원마산 진전면 여양리 민간인 학살 현장을 발굴한 고 이상길 교수(경남대)의 제자로서 뜻한 바가 있어 자원봉사자로 나섰다.

고 이상길 교수는 여양리 민간인 학살 현장을 발굴하다 관계 기관으로부터 받았던 비용이 부족하자 개인 연구비를 들여 마무리했다. 김영희씨의 자원봉사도 스승의 가르침을 잇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진주 명석고개 발굴 현장을 비롯해 여러 군데를 찾아 돕기도 했다. 또 국가에 의해 저질러진 한국전쟁 민간인 학살의 진실을 알려야 한다는 생각에 관련 기사를 진주 <단디뉴스>에 오랫동안 연재해오고 있다.

무엇보다 관심을 갖는 부분은 '현장 교육'이다. 민간인 학살이 교과서에 다루어져야 하고, 후세를 위해 교육을 해야 다시는 이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는 "전국 대부분 학살지는 발굴을 하고 나면 흔적을 찾아볼 수 없게 되지만, 탄광 등이었던 여양리 현장은 보존할 수 있다"며 창원유족회와 창원시가 더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했다.

다음은 9일 김영희씨와 나눈 대화 내용이다.
  
"학살지서 쏟아져 나온 장난감 구슬에 울음바다 되기도"
 
김영희 한국전쟁 민간인 학살 유해발굴 공동조사단 자원봉사자.
 김영희 한국전쟁 민간인 학살 유해발굴 공동조사단 자원봉사자.
ⓒ 김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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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학살지 발굴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가 있나.


"2014년 2월 시민단체 후원으로 '한국전쟁 민간인학살 유해발굴 공동조사단'이 결성됐다. 1기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가 노무현 대통령 시기 설립됐다가 이명박 정권 때 폐지되고, 박근혜정부를 거치면서 법적인 절차나 윤리적 도리조차도 외면받던 시절이다.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주관한 공동조사단 1차 발굴을 진주 명석고개에서 하면서 참석하게 됐다. 한국전쟁 민간인학살에 대한 내용이 국사책에 서술돼 있지 않다. 교사로서 제가 가르치는 아이들에게라도 알려야겠다는 생각에 시작해 지금까지 유해발굴 자원봉사자로 다니고 있다."

- 전국 발굴지 현장을 다니면서 가장 인상 깊었던 곳이 있나.

"충남 아산시 배방읍 설화산 중리마을 발굴지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충청도 지역은 두 번에 걸쳐 학살이 자행된다. 처음에는 9월 28일 서울수복 직전인 9월 26~29일 사이고, 두 번째가 1951년 1·4후퇴 시기다. 한국전쟁전후 민간인학살은 그 대상이 누구인가. 정치범, 보도연맹원, 부역혐의자들이었다. 충청지역은 부역자가 가장 많이 학살된 지역이다.

설화산 발굴지는 발굴 기간만 40일 이상 걸렸다. 발굴된 개체수 208구 중 여성(어머니)이 150명, 1~12살의 어린 아이가 58명이었다. 보도연맹원 혈통의 싹을 자르는 아주 잔인한 학살이었다. 어머니와 아이들까지 몰살한 것이다.

한 층에 시신을 던지고 그 위에 짚이나 사토를 덮고 다시 또 시신을 포개 5층까지 시신이 쌓여 있었다. 유해는 끝없이 나왔다. 엄마 품에 안겨서 포대기에 싸인 어린아이들의 뼈가 발굴되기도 했다. 어린아이의 장난감 구슬과 엄마의 비녀가 쏟아져 노출될 때면 발굴단들이 울음바다가 됐다."

- 조만간 진주 명석면 삭평마을 학살지를 발굴한다고 들었다. 어떤 곳인가.

"진주지역은 보도연맹이 전국에서 가장 많이 학살된 곳이다. 전국보도연맹은 1949년 4월 20일 이승만 정권이 좌익사상을 통제하기 위해 만든 반공단체이며, 계몽과 지도의 취지로 결성된 관변단체다.

경남도연맹은 1949년 11월 20일 결성됐고, 당시 자수 전향자 5548명이 가입 신청했다. 진주지역은 12월 8일 옛 진주극장에서 1000여 명이 모여 결성됐다. 그러므로 이번 삭평마을에서 발굴된 유해도 진주형무소 재소자나 보도연맹원일 가능성이 높다고 할 수 있는데, 발굴 후 유품을 감식해야만 정확히 알 수 있다. 진주 명석면 지역만 학살지가 11곳이나 되는데, 이는 상봉동에 있었던 옛 진주형무소와 가까웠기 때문으로도 보인다."

"나는 아직 뼈에서 이데올로기를 발견하지 못했다"
 
- 창원마산 여양리(산태골) 발굴을 했던 고 이상길 교수와는 어떤 인연인가.


"저의 대학 은사다. 공동조사단 1차 발굴을 명석면에서 시작했을 때 진주유족회장(강병현)께서 보고서를 제게 주셨는데 집에 와서 읽어보니 이상길 교수께서 쓴 것이었다. 고인은 경남 학살지 4곳에 대한 시굴·발굴을 하신 걸로 안다. 돌아가시고 나서 너무 놀라고 슬퍼 한참을 울었다.

그 뒤에 교수께서 쓰신 학살지 발굴 관련 논문을 모두 찾아 읽었다. 이상길 교수께서 혼신을 다해 발굴하신 것을 알게 됐다. 특히 여양리 보고서에 여러 의견(제안)이 들어 있었는데, 그 중 대부분 이루어지지 않았다. 여양리 발굴지를 '교육의 현장'으로 만들고 싶어 하신 것 또한 알게 됐다.

고인은 정말로 좋으신 분이셨다. 성격도 좋으셨다. 학점에는 엄격하셨다. 대학원 재학시절 교수와 대학원생이 남강 청동기 신석기 발굴장에 답사를 가기도 했다. 특히 여양리는 개인의 연구비용으로 2개월간 발굴한 것으로 안다.

처음엔 경남대 측에서 유해를 교내에 보관하는 것에 극구 반대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장하거나 묻어버리지 않았던 건 유해가 민간인 학살에 대한 중요한 근거와 자료가 될 수 있다는 판단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 유해는 10여 간 경남대 박물관에서 관리·보존했고, 이상길 교수께서 고인이 되신 뒤인 2014년에 진주 명석면 용산고개에 있는 컨테이너로 옮겨져 20년간 보관돼 있다.

제 가슴을 울리게 한 이 교수의 글귀가 있다. '70여 년 넘게 지나 지금 드러난 하얀 백골을 보면, 저 뼈에 좌우 이념이 있을까 싶다. 저 뼈를 가지고 오늘날 또 다시 좌우를 논해야 하는지 자문해 본다. 지금까지 수백 구의 유골을 발굴해 봤지만 나는 아직 뼈에서 이데올로기를 발견하지 못했다. 그저 죽어서 잊혀진 인간일 뿐이었다'라고."

- 학살지 발굴 후 보존은 왜 중요한가.

"학살지가 전국 381개소인데, 그중 경남지역은 74개소이고 진주는 24개소로 추정된다. 진주는 지금까지 9개소를 발굴했다. 전국적으로 지금까지 대략 30여개소가 발굴됐지만, 답사 가능한 발굴 현장은 경상 코발트와 고양시 금정굴 두 군데 정도라고 할 수 있다.

다른 곳은 모두 발굴 후 흔적도 없이 초원으로 돌아가 버린다. 그나마 표지판을 세운 곳도 있지만 그마저도 거의 발굴지가 사유지이기에 표지판도 세우지 못하게 한다. 학살지라 하면 땅값이 내려가기 때문이라고 한다.

학살지를 보존·관리해야 하는 것은 후손들에게 슬픈 역사, 아픈 역사, 잘못된 역사를 가르쳐야 하고 국가폭력에 대한 심판도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 증거로서 학살지를 보존해야 할 필요가 있다. 전국에 있는 발굴지를 모두 국가에서 국유지로 매입해 교육현장으로 보존해야 하지만 현실적으론 불가능한 걸 알고 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아픈 역사... 교과서에 실려야"
  
김영희 한국전쟁 민간인 학살 유해발굴 공동조사단 자원봉사자.
 김영희 한국전쟁 민간인 학살 유해발굴 공동조사단 자원봉사자.
ⓒ 김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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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원마산 진전면 여양리 발굴현장을 답사지로 보존하기 위한 방안은 무엇인가.

"여양리 발굴지는 역사 현장으로 가장 적합한 특징을 갖고 있다. 대개 발굴지는 흙이기 때문에 1~2년 지나면 초원으로 돌아가 흔적도 제대로 찾을 수가 없다. 그러나 여양리는 숯가마, 돌무지무덤(너덜겅), 폐광 3개소가 학살지로, 거의 살아 숨 쉬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너덜겅은 발굴한 흔적을 찾아서 임시 표지판을 만들어 걸어뒀고 폐광도 그대로 남아있어서 교육현장으로 활용도가 매우 높은 최고의 장소라 할 수 있다. 민간인인 이상길 교수가 개인 연구비를 들여 발굴을 했다는 것에 큰 의미가 있다.

또 여양리는 진주·창원 중간 지점이다. 진주형무소에서 보도연맹원들을 끌고 가 학살했는지는 차후 연구할 대상이다. 진주형무소에서 여양리까지의 거리는 54km이고, 그곳에서 다시 여항산으로 400~500m 가파른 길로 올라간다. 그리고 폐광 옆에서 학살 후 폐광으로 집어넣고 입구를 완벽하게 봉했던 것이다. 일단 창원유족회 노치수 회장께 함께 추진해 보자고 취지문과 제안서를 준비해 교육청에 제안해 볼까 한다. 아직 암담하다."

- 진주에서 발행되는 <단디뉴스>에 민간인 학살에 대한 연재기사를 18회차 쓰고 있다. 반응은 어떤가.
 

"사실 저는 민간인발굴에 관련된 기사를 쓰면서도 반응을 물어보지도 않고 알려고 하지도 않는다. 그런데 발굴지를 다녀보면서 기사를 보신 분이 전국에 계시다는 걸 알게 됐다. 유족들도 기사를 잘 보고 있다고 인사하기도 한다. <단디뉴스>에서 민간인 학살 관련 기사 조회수가 높다는 말도 들었다. 진실화해위에서도 기사를 검색한다더라. 용기와 힘이 나긴 하는데 너무 힘들기도 해서 최근 (연재를) 두 달째 쉬었다. 그래서 왜 기사를 안 쓰냐고 연락이 오기도 한다."

- 민간인학살 문제에 대해 교육이나 사회적, 국가적으로 해야 할 일이 있다면.

"교육적으로 훌륭하고 본받아야 할 좋은 역사, 자랑스런 역사 등은 역사서나 교과서에 서술이 잘 돼 있다. 그러나 진짜 제대로 가르칠 것은 바로 아픈 역사, 잘못된 역사, 슬픈 역사다. 다시는 이러한 사건이 되풀이되지 않게 하기 위함이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국가폭력으로 인권을 유린하고 학살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은폐하고 감추고 싶어 한다. 한국전쟁전후 민간인학살 106만968명에 대해 자세하고 구체적으로 역사 교과서에 서술해야 한다.

국민들도 아픈 역사에 관심을 갖고 성원을 보내야 한다. 과거 보도연맹은 빨갱이로 취급돼 그 후손들은 '연좌제 아닌 연좌제'를 당했고, 여전히 '보도연맹원들은 당연히 죽어 마땅하다'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다. 국가가 사과하지 않았고, 가해자를 처벌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유족들을 위해 진실규명과 배상처리를 완결해야 한다.

또 국가가 전국 경찰청에 '보도연맹명부'만 공개하면 진실규명이 필요가 없는 것이다. 보도연맹명부만 공개하면 그 자료를 보고 배상해주면 된다. 그러나 국가는 간단한 일을 거꾸로 어렵게 하고 있다.

유족들은 거의 유복자나 어린 아이들이었다. 그런데 진실규명 신청을 하거나 배상소송을 진행하면 참고인을 2명 이상 증언하라고 하고 '제사 날짜가 언제냐' 등 사사건건 없는 증거를 요구한다.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학살기념관'이 대전시 동구 낭월동(골령골)에 건립된다. 행정안전부가 4만여 평 부지를 매입해 오는 3월부터 착공할 예정이라고 한다. 그나마 다행스런 일이다. 일단 현재 전국에서 발굴한 유해는 임시로 '세종 추모의 집'에 안치돼 있다. 대전 골령골 기념관이 완공되면 세종추모집에 안치한 유해들은 그곳에 보존할 예정인 것으로 안다."

- 왜 국가는 죄 없는 민간인을 학살했다고 보는가.

"세계사적으로 이념·종교·인종·민족·종족 등이 다르다는 이유로 국가들은 제노사이드라는 만행을 저질러 왔다. 우리나라 역시 이념이 다르다고 해서 학살을 자행했던 것이다. 한국전쟁 당시 사회주의 이념을 가진 자들의 합세로 인민군 세력이 커질 것을 우려한 이승만은 죄 없고 아무 것도 모르는 농민을 비롯한 민간인까지 보도연맹에 강제로 가입시켜 학살을 참혹하게 자행했다.

인간은 이념의 동물이다. 생각이 다를 수 있다. 하지만 생각과 이념이 다르다는 이유로 국가폭력에 의해 만행을 저지르는 것은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일이다."
 
- 앞으로의 과제가 있다면 무엇일까.
 

"국가가 나서야 한다. 사법부, 특히 대법원이 판례를 변경해야 하는 부분이 있다. 국가는 스스로 불법행위를 책임지고 반성해야 한다. '형사 처벌'은 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역사적 처벌'까지는 이루어져야 한다. 무엇보다 후손들에게 교훈으로 심어주어야 한다."
 
김영희 한국전쟁 민간인 학살 유해발굴 공동조사단 자원봉사자.
 김영희 한국전쟁 민간인 학살 유해발굴 공동조사단 자원봉사자.
ⓒ 김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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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한국전쟁, #민간인 학살, #진실화해위, #명석고개, #고 이상길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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