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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혁명 당시 모습.
 4월 혁명 당시 모습.
ⓒ 4.19혁명기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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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민호가 양심수가 되어 혹독한 옥고를 치루고 있을 때 이승만 자유당 정권은 신생정부 초기의 황금과 같은 시기를 1인 전제와 부정부패의 늪에서 허우적대고 있었다.

"독재자는 호랑이를 타고 이리저리 뛰어다닌다. 그는 결코 호랑이 등에서 내리려 하지 않는다. 호랑이는 점점 배가고파 간다." - 영국 수상을 지낸 처칠의 말이다. 이승만을 포함하여 세상의 크고 작은 독재자들은 호랑이를 타고 위엄을 부리다가 종국에는 호랑이에게 잡혀 먹히고 만다.

이승만은 호랑이 등에서 내리려 하지 않았다. 본인도 본인이지만 그동안 호랑이의 위세를 빌려 행세해온 여우(狐假虎威)들이 늙은 독재자를 끌어앉고 놓아주지 않았다. 물론 거기에는 '국부'로 자처하면서 군주의식에 취해있는 이승만 자신이 자리하고 있었다. 왕조시대의 군주의식에 사로잡혀 있는 이승만과 권력의 단맛을 즐겨온 측근들의 합작품이었다.

이승만 집권 12년 동안 정치는 절제를 잃었고, 국민은 초근목피의 상태, 특권층의 사치는 극치를 이루고, 프란체스카와 박마리아 (이기붕의 처)가 정치를 요리하고, 시장·군수·경찰서장·군장성의 진급에는 '정찰제'가 붙고, 생계형 살인강도사건이 줄을 이었다.

이승만의 권력욕은 나이가 들어도 수그러들지 않았다. 1960년 5월 경 실시 예정인 제4대 대통령선거에 다시 나서기로 했다. 1875년생이니 이때 나이가 만으로 치면 86세였다.

제3대 대통령선거가 1956년 5월 15일에 실시되었으니 제4대 대통령선거를 정상적으로 실시한다면 1960년 5월 중순경이라야 했다. 하지만 이승만 정부는 제1야당 조병옥 민주당 후보가 신병치료차 도미하고 있을 때, 3월 15일 조기 선거 실시를 공고했다. 명분은 농번기를 피한다는 것이지만 뻔한 속샘이었다. 조병옥의 병세를 알고 조기 선거를 공고했는데, 2월 15일 그가 미국에서 급서함으로써 민주당은 두 번째 대통령후보를 잃게 되었다. 정부에 선거 연기를 요구했지만 들어줄 리 만무했다.

야권은 4년 전 신익희 후보가 사망하고, 이승만의 라이벌이었던 조봉암이 1949년 7월 처형당한 데 이어 조병옥 후보마저 잃게 되었다. 이런 연유로 세간에서는 "이승만은 하늘이 낸 사람"이란 말이 나돌았다. 물론 자유당과 어용언론이 유포한 유언이었으나, 그렇게 믿는 국민도 적지 않았다.

이승만의 단독후보가 된 대통령선거는 이미 따놓은 당상이지만 문제는 부통령 쪽이었다. 노령의 이승만에게 언제 유고가 발생할 지 모르는 상황에서 부통령의 존재는 실로 막중하였다. 자유당 수뇌부가 장면 부통령을 암살하려 했던 것도 유사시 대통령직 승계를 막으려는 이유때문이었다. 4년 전의 '악몽'을 잊지 못하는 이승만과 자유당은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기붕을 당선시키고자 했다. 파멸의 길이었다. 

이승만과 이기붕은 제4대 정·부통령선거에 대비하여 1959년 3월 가장 충직하다고 믿는 최인규를 내무장관으로 하고, 재무 송인상, 부흥 신현확, 농림 이근직, 교통 김일환을 각각 국무위원에 기용했다. 최인규는 조선생명보험주식회사 출신이지만 외자청장·제4대 민의원, 교통부장관을 지내면서 보인 충직성은 사활이 걸린 선거의 대사를 맡기기에 충분하다고 보았다. 

최인규는 취임사에서 "공무원과 공무원 가족은 대통령과 정부의 업적을 국민에게 선전해야 하며 이 같은 일이 싫은 공무원은 그 자리에 있을 필요가 없다"라고 공무원들을 공공연하게 협박하면서 선거에 동원했다. 최인규는 1959년 11월부터 전국 각 시도 경찰국장, 사찰 과장 및 경찰서장 그리고 군수·시장·구청장 회의를 수시로 소집하거나, 지역별 또는 직능별로 소집하여 부정선거를 지령하였다. 최인규는 각 지방의 도지사·시장·군수·경찰서장의 사표를 미리 받아놓고 부정선거에 협력하지 않거나 선거결과가 좋지 않으면 수리하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자유당 말기 대학·언론·문화·예술계에 이른바 '만송족'(晩松族)이란 해괴한 어용집단이 등장하여 주류를 이루었다. 이기붕의 아호를 따서 불리게 된 '만송족'은 이기붕 부통령 만들기의 전위그룹으로 활동하였다. 여기에는 많은 어용언론·지식인·예술인·종교인들이 참여하였다. 이승만은 '신성불가침'의 성역에 놓이고, 이제 유사시에 그를 이을 '이기붕 선생'을 부통령에 당선시키는 일이 이들의 급선무였다. 이것은 이승만의 지침이기도 하였다. 

1960년이 열리자마자 진행되는 이승만 정권의 폭압과 부정선거운동이 민주주의의 기본마저 허물어 뜨리고 전개되자 학생들은 더 이상 침묵하지 않았다. 맨 먼저 나선 것은 고등학생들이었다. 

민주혁명의 도화선이 된 것은 대구 경북고교생들이다. 2월 28일 학생들은 민주당 선거강연회 참석을 방해하기 위해 일요일의 등교에 항의하여, 그동안 관제 데모에만 동원되어 온 학생들이 최초로 반기를 들었다. 학생들은 학원의 정치 도구화에 더 이상 침묵하지 않고 저항에 나섰다.

3월 15일 실시된 정·부통령 선거는 자유당 정권의 사전 계획대로 철저한 부정선거로 진행되었다. 4할 사전투표와 3인조, 9인조 공개투표 외에 △유령유권자 조작과 기권강요 및 기권자의 대리 투표 △내통식 기표소 설치 △투표함 바꿔치기 △개표시 혼표와 환표 △득표수 조작·발표 등이 공공연하게 이루어졌다.

이성이 눈먼 시대에는 광기가 춤을 춘다. 전국에서 공무원, 교사들이 정부와 자유당의 지침에 따라 투개표소 참관인으로 선정되어 부정선거를 도왔다. 경찰과 반공청년단의 역할은 괄목할만 했다. 

3·15선거가 부정과 폭력으로 자행되는 것을 지켜보고 많은 국민이 분노에 치를 떨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용기있게 떨치고 일어선 것은 마산의 시민·학생들이었다.

마산시민·학생들은 3월 15일 오후 투표를 거부하고, 평화적으로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시위를 벌였다. 그런데 이를 강제해산시키려는 경찰과 투석전을 벌인 끝에 경찰의 무차별 발포와 체포·구금으로 다수의 희생자를 내게 되었다. 격분한 시민들이 남성동파출소를 비롯한 경찰관서와 변절한 국회의원 및 경찰서장 자택을 습격, 이 과정에서 경찰의 발포로 7명이 사망하는 등 80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경찰은 주모자로 구속한 26명을 공산당으로 몰아 혹독한 고문을 가하고 정부는 마산의거를 공산당의 조종으로 몰아붙여서 다시 시민들의 분노를 샀다. 경찰과 자유당·반공청년단 단원들은 시위 학생들의 호주머니에 공산당을 찬양하는 삐라를 투입하여, 이들을 공산당으로 조작하려 들었다.

국민은 더 이상 참으려하지 않았다. 대통령의 담화나 경찰의 탄압에 더 이상 겁먹지 않았다. 3월 17일 진해고교생, 서울성남고교생, 전남여고생들이 데모를 벌였다.

3월 18일 부통령 당선자로 공고된 이기봉은 마산사건에 대한 기자들의 질문에 "총은 쏘라고 (일부는 '쓰라고'로 들었다 함) 준 것이지 가지고 놀라고 준 것은 아니다"고 말하였다. 명실공히 권력 2인자의 이같은 발언은 시위진압에 나선 일선 경찰들에게 발포명령으로 받아들여졌다.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월파 서민호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태그:#서민호, #월파_서민호평전, #월파서민호평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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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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