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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지 사람들에게 제주는 버려진 땅이었고 죄수를 보내는 유배지였다. 지금은 이익을 노려 자본이 몰려들지만 진정으로 제주를 위하는 이는 많지 않은 듯하다. 나 또한 제주 사람 눈에는 그렇게 비칠 수 있으리라. 그런 제주인의 한과 정서를 이해하려다 제주학에 빠졌고 도민이 됐다.

키아오라리조트를 운영하면서 제주가 진정한 미디어 리터러시 교육의 중심이 되게 하겠다는 각오로 한국미디어리터러시스쿨을 설립했다. 제주는 오름의 섬인데 키아오라 바로 뒷산이 대수산봉이고 정상에는 봉수대가 있었기에 '수산봉수'라는 팻말을 발견하고 반가웠다. '수산봉수의 제주살이'는 제주학을 배경으로 내 일상에 사회적 발언을 실어 보내는 글이다. - 기자 말

  
수산봉수 팻말 옆에 서 있는 글쓴이 이봉수. 토축 위에 있는 흰 벤치에 앉아서 일출봉을 바라보는 사진을 찍으면 '인생샷'이 나온다.
 수산봉수 팻말 옆에 서 있는 글쓴이 이봉수. 토축 위에 있는 흰 벤치에 앉아서 일출봉을 바라보는 사진을 찍으면 '인생샷'이 나온다.
ⓒ 이봉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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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천수가 솟는 곳마다 생긴 마을

두루 알다시피 바다에서 조난돼 표류하는 사람의 생사를 좌우하는 것은 물이다. 해군 장교 훈련 시절에도 '사방이 다 물이지만 소금물은 마시는 순간 극심한 갈증으로 목숨을 잃는다'고 배웠다. 제주 역시 바다로 둘러싸여 있고 강우량도 많지만 물이 귀한 곳이다. 제주도는 구멍 숭숭 뚫린 바위와 화산토로 돼있어 비가 내리면 이내 땅속으로 스며든다. 지하 암반 위 대수층을 따라 흐르다 지층 틈새로 치솟는 샘물이 바로 용천수다.

제주의 마을은 해안가 용천수가 솟는 곳을 중심으로 형성돼 독특한 물의 생활사를 엮어왔다. 샘이 먼 중산간 마을에서는 여인들이 물허벅을 넣은 물구덕을 지고 십리 길 정도는 걸어야 하는 곳도 많았다. 한라산 동쪽 교래마을에 수원을 두고 있는 삼다수는 공기업인 제주특별자치도개발공사가 독점생산하지만, 사실 제주도 물은 다 삼다수와 비슷해 수돗물을 마셔도 너무나 좋다고들 한다. 삼다수는 비싸게 파는데도 닐슨코리아 조사에 따르면 지난해 말 기준 국내시장 점유율이 42.6%였다.
 
제주도 용천수 분포현황. 주로 해안과 일부 중산간지대에 용천수가 솟기 때문에 그곳을 중심으로 마을이 형성됐다.
 제주도 용천수 분포현황. 주로 해안과 일부 중산간지대에 용천수가 솟기 때문에 그곳을 중심으로 마을이 형성됐다.
ⓒ 제주특별자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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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나 과학자가 아니어서 권위있게 언급할 수는 없지만, 나 스스로는 지난해 말 제주살이 이후 놀라운 경험을 하고 있다. 광대뼈 근처에 오래된 검버섯과 기미가 있었는데 싹 없어진 것이다. 평생 정신노동을 하다가 우리 키아오라리조트 2천평 정원을 가꾸느라 육체노동을 함께하면서 정수한 수도물을 많이 마시고 때로는 하루에도 몇 번씩 샤워를 한 덕분이 아닌가 짐작할 따름이다.

물장오리, 물찻, 물영아리의 비경

제주의 지명에는 물이 들어간 데가 많다. 물이 가장 소중한 '지명정보'였기 때문이다. 오름 중에서도 분화구에 물이 있는 곳은 특히 비경인데 대개 이름에 '물'이 들어있다. 물장오리, 물찻, 물영아리… 물장오리는 늘 물이 넘쳐흐르는 곳이어서 가뭄 때 기우제를 지내던 오름이다.

물영아리에는 수초가 자라고 있어서 람사르습지로 지정됐다. 제주는 오름으로 불리는 기생화산이 세계에서 가장 많은 곳이다. 두 번째로 많은 시칠리아 에트나 화산 주변에 260개 오름이 있는데 한라산 언저리에는 368개나 있다.
 
.분화구 주변을 도는 노란색 트레킹코스가 보이는데 분화구에는 물기가 많아 나무가 거의 없고 그 주변은 울창한 숲으로 뒤덮여있다. 파란색 점선으로 표시된 올레2코스와 바로 연결되고 왼쪽 상단에 '빛의 벙커' 주차장이 보인다.
 .분화구 주변을 도는 노란색 트레킹코스가 보이는데 분화구에는 물기가 많아 나무가 거의 없고 그 주변은 울창한 숲으로 뒤덮여있다. 파란색 점선으로 표시된 올레2코스와 바로 연결되고 왼쪽 상단에 '빛의 벙커' 주차장이 보인다.
ⓒ 이봉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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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산읍 일출봉과 섭지코지 근처에 있는 키아오라리조트의 바로 뒤 오름이 대수산봉(大水山峰)이다. 한자말로 지명을 바꿔 놓아서 금방 알아챌 수 없지만 원래는 '큰물뫼'(큰물메)로 불렸다. 제주에는 서쪽 애월읍에도 수산봉이 있는데, 그곳 물메초등학교에 아름다운 우리말 이름이 남아있다.

물뫼에서 왜 물이 사라졌을까

대수산봉 분화구에는 샘물이 솟아 못을 이뤘다는데 지금은 큰비가 내리지 않으면 물이 고이지 않는다. 일설에는 송나라 호종단(胡宗旦)이 제주의 산맥과 수맥의 기운을 누르고 간 뒤 수맥이 끊겼다는데, 믿어지지 않는다. <제주신문>과 제주MBC 등에서 일한 김종철의 역저 <오름 나그네> 제2권에 따르면 대수산봉은 예전에 이름난 방목지였을 만큼 온통 풀밭이었다는데, 지금은 흑송과 삼나무 등이 빽빽이 들어서 있다.

제주 곳곳에 남아있는 곶자왈은 잡목과 덤불, 바위가 뒤엉켜 있는 미개발지역인데 물 보존 기능이 뛰어나다. 제주의 오름에는 경제림을 가꾸고 있는 곳도 많은데 잡목을 모두 제거하고 줄지어 조림된 숲은 물 보존 기능이 크지 않을 듯하다.
 
대수산봉에서 바라본 일출봉(왼쪽)과 섭지코지(오른쪽). 섭지코지로 둘러싸인 신양리 앞바다에는 바람이 세서 요즘 휴일이면 서핑족들이 몰려든다.
 대수산봉에서 바라본 일출봉(왼쪽)과 섭지코지(오른쪽). 섭지코지로 둘러싸인 신양리 앞바다에는 바람이 세서 요즘 휴일이면 서핑족들이 몰려든다.
ⓒ 이봉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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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아오라에서 대수산봉 꼭대기까지는 걸어서 20분 거리다. '기자 말'에 쓴 것처럼 정상에는 봉수대가 있고 '수산봉수'라는 팻말이 서있다. 수산봉수는 북동쪽으로 일출봉의 성산봉수, 남서쪽으로 독자봉의 독자봉수와 교신했다. 수산봉수에는 흙으로 쌓은 토축이 남아있는데 이곳에 서면 한라산 동쪽 제주도의 절반이 일망무제로 펼쳐진다. 360도로 조망하는데 아무런 장애물이 없다. 동쪽으로는 섭지코지, 일출봉, 우도 등이 한눈에 들어와 사진작가들이 일출봉을 배경으로 일출을 찍기 위해 오르는 곳이기도 하다.
 
▲ 제주도 한라산 동쪽 360도 동영상 한라산 동쪽 제주도 절반의 풍경을 수산봉수대에서 360도로 찍은 동영상인데, 섭지코지, 일출봉, 지미봉, 다랑쉬오름, 한라산 등 수많은 오름이 파노라마로 펼쳐진다. 지미(地尾)봉은 '제주도의 꼬리' 곧 '땅끝'이라는 뜻이다.
ⓒ 이봉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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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산봉수에서 동북쪽으로 바라보면 펼쳐지는 광활한 들판이 수산평이다. <동사강목> 등에 따르면 원나라가 탐라총관부를 두고 1276년에 말 160필을 보내 1호 목마장을 개설한 곳이 수산평인데, 나중에 제주 전역에 10개로 구획된 소장(所場)으로 늘어나게 된다. 말을 키우는 데는 세계 최고 기술을 자랑하던 몽고인 눈에 수산평은 목초와 물이 풍부해 말 양육의 시범단지로 꼽힐 만했다.
 
원나라 1호 목마장이 들어선 수산평. 가운데 멀리 보이는 높은 봉우리는 '오름의 여왕'이라 불리는 다랑쉬오름인데, 대수산봉 사이에 드넓은 수산들이 펼쳐진다.
 원나라 1호 목마장이 들어선 수산평. 가운데 멀리 보이는 높은 봉우리는 '오름의 여왕'이라 불리는 다랑쉬오름인데, 대수산봉 사이에 드넓은 수산들이 펼쳐진다.
ⓒ 이봉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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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황후가 최초로 말 160필 보낸 건 와전된듯

일부 문헌과 언론에서는 말 160필을 보낸 이가 원나라 순제의 총애를 받은 기황후라고 주장하는데, 문헌 조사를 해보니 연대가 맞아떨어지지 않는다. 기황후설의 근거가 된 문헌은 <신증동국여지승람> 등이다. 서거정의 '제주목 관덕정 중수기'에 기황후가 목장을 두었다는 기록이 있다는 것이다. 또 <탐라성주유사>에는 1300년에 기황후가 수산평에 목장을 설치했다는 대목이 나온다.

그러나 기황후가 황후가 된 것은 1340년이어서 <탐라성주유사>의 1300년과는 40년 이상, <동사강목>의 1276년과는 무려 64년 이상 햇수가 어긋난다. 아마도 원나라가 1276년에 말 160필을 보내 수산평에 목마장을 처음 개설한 역사적 사실이 후대에 기황후가 목마장을 설치한 행적과 결합돼 기황후가 처음으로 말 160필을 보낸 장본인으로 와전된 듯하다.

기황후는 기자오의 딸이면서 공녀로 원나라에 가서 황후의 자리에 올랐다. 기황후는 '몽고인 말고는 황후를 삼지 말라'는 가훈을 깰 만큼 재색이 뛰어나고 모국에 관한 '애정'도 특별했던 듯하다. 그는 목마장을 두는 한편으로 지금 제주시 외도1동에 수정사를 세워 불교를 전파했다. 그러나 오빠 등 기씨 일족이 국정을 농단하다가 공민왕에게 주살되면서 복수극으로 치달았다. 고려 출신 최유로 하여금 군사 1만을 거느리고 고려를 치게 했다가 최영 장군에게 대패했다.

탐라인에겐 너무나 가혹했던 말 기르기 

말 양육은 탐라인에게 가혹한 공역(貢役)이었고 농경지를 침탈하는 문제도 있었다. 농경지 주변에 밭담을 쌓고 무덤 주변에 산담을 쌓은 것은 탐라인의 자구책이었다. 그것이 지금은 올레길을 비롯한 아름다운 제주 풍경의 핵심 구성요소가 되었으니 인간의 행위가 어떤 결과로 귀착될지는 알기 힘들다.

탐라는 섬이어서 말이 도망갈 염려가 없고 말을 잡아먹을 수 있는 맹수도 없었다. 말떼와 소떼는 우두머리 마소의 인도에 따라 오름 등성이에서 풀을 뜯다가 분화구에 고인 물을 마시곤 했다. 제주의 민속과 생활사를 깊이 연구한 김순이 시인의 <그리운 제주 풍경 100>에는 태풍이 오면 마을의 말떼와 소떼를 몰고 곶자왈에 가서 풀어놓았다고 한다. 짐승들은 본능적으로 안전한 곳으로 피했다가 태풍이 끝나면 돌아온다는 것이다. 자연재해에는 인위적인 방비보다 자연의 이치와 동물의 본능을 잘 이용하는 지혜를 엿볼 수 있다.
 
대수산봉에서 바라본 한라산. 한라산은 방패처럼 생긴 순상화산이어서 넓은 들판을 형성해 마소를 방목하기에 좋다.
 대수산봉에서 바라본 한라산. 한라산은 방패처럼 생긴 순상화산이어서 넓은 들판을 형성해 마소를 방목하기에 좋다.
ⓒ 이봉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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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라산에 소를 잡아먹는 '맹수'가 나타났다

그런데 최근, 제주에도 맹수가 나타났다. 관광객이 버리고 간 유기견이 들개떼를 이뤄 한라산 중산간지대에 방목하는 소를 습격해 잡아먹은 게 여러 건이라는 뉴스를 봤다.

큰물뫼 남동쪽 산기슭, 키아오라 바로 옆에는 군위오씨 입도조(入島祖) 묘가 있다. 입도조 오석현은 세조의 찬탈에 분개해 정삼품 벼슬을 버리고 지금 성산읍 고성리에 정착했다. 큰물뫼는 풍수지리에서 '와우형'(臥牛形)이라 하여 소가 누워있는 꼴인데, 그 젖통에 해당하는 명당에 입도조 묘가 있어 오씨 가문이 번성했다고 한다. 이번에 제주지사로 뽑힌 오영훈이 조상에게 신고하는 고유제(告由祭)를 지내러 왔을 때 잠시 인사를 나눴다. 6년 전 키아오라리조트를 지은 오용원 전 전국문화원연합회장이 소개했기 때문이다.

방목장의 초지였던 큰물뫼가 나무로 뒤덮이고 물이 사라졌다 해서 불만이 있는 것은 아니다. 산소와 피톤치드를 마시며 일주일에도 몇 번씩 뒷산에 오르는 즐거움은 제주살이가 가져다준 최고의 보상이다. 공기 중에는 산소가 20%쯤 있는데, 사무실과 집안은 그 이하, '반지하'는 19% 미만이라고 한다. 그런데 숲은 21%, 울창한 숲은 22~23%라고 한다.
 
대수산봉에 많은 곰솔은 줄기가 불그스레한 여느 소나무와 달리 검은색이어서 흑송이라고도 불린다. 바람 센 바닷가에 적응해 키가 잘 크지 않아 가지의 간격이 촘촘하다.
 대수산봉에 많은 곰솔은 줄기가 불그스레한 여느 소나무와 달리 검은색이어서 흑송이라고도 불린다. 바람 센 바닷가에 적응해 키가 잘 크지 않아 가지의 간격이 촘촘하다.
ⓒ 이봉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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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에서 날마나 고함지르는 분의 사연

근데 우리 부부 말고도 늘 큰물뫼에 오르는 이가 있다. 그가 정상에 오른 날은 고함을 지르기 때문에 정확히 알 수 있다. '저 사람은 왜 저렇게 날마다 고함을 질러 산 아래까지 소음공해를 유발하고, 내가 산길에서 몇 번이나 만난 노루와 고라니, 산새들을 놀라게 하냐'라는 불만이 쌓였다. 

어느 날 정상에서 한 남자를 만나 대화하던 중 "누군가 여기서 고함을 질러 정적을 깬다"고 불평했더니 "그게 바로 나"라고 고백하는 게 아닌가? 조선소 사장까지 지낸 뒤 위암이 발병하고 간으로 전이돼 방사선치료는 했지만 수술은 할 수 없어 자연치유를 하려고 성산에 왔다는 거였다. 산에 올라 고함을 지르는 것은 암 환자에게 좋다고 의사가 말했다고 한다. 나는 그동안 원망해온 마음을 사죄하고, '안부 인사'로 듣고 싶으니 매일 고함소리를 들려 달라고 부탁했다.

오름나그네 1~3 세트 (완전개정판 한정 양장본) - 전3권 - 제주의 영혼, 오름을 거닐다

김종철 (지은이), 고길홍 (사진), 다빈치(2019)


태그:#대수산봉, #수산봉수, #제주살이, #기황후, #키아오라리조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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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제주 키아오라리조트 공동대표, 한국미디어리터러시스쿨(한미리스쿨) 원장, MBC저널리즘스쿨 교수(초대 디렉터)로 일하고 있습니다. 글쓴이는 조선일보 기자, 한겨레 경제부장, 세명대 저널리즘스쿨 초대원장(2008~2019), 한겨레/경향 시민편집인/칼럼니스트, KBS 미디어포커스/저널리즘토크쇼J 자문위원, 연합뉴스수용자권익위원장 등을 역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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