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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일에 두 번, 양재천길을 걸어 동네 문화센터에 간다. 입을 쩍쩍 벌려 큰소리로 선생님을 따라 교재를 읽는다. 지구생활 60년 기념사업으로 시작한 중국어 공부, 6 년째다. 생판 모르는 언어를 배우는 게 치매 예방에 좋다는 누군가의 조언도 솔깃했었다. 생계형 영문과 출신이라서 일까. 밥벌이와 관계없는 언어를 취미로 갖고 싶은 허영심도 작용했지 싶다. 클래스메이트는 근처에 사는 506070들. 중국에서 기업체 주재원으로 일했던 할저씨들이 최근 합류해 수업 수준이 급상승했다.
 
어떤 언어를 배울 때 거리 간판을 읽고 지하철역 이름을 읽듯이 어린 새에게도 한 마디 던져보는 할머니, 바로 나이든 학생, 제 모습입니다.
▲ 생존가능 중국어  어떤 언어를 배울 때 거리 간판을 읽고 지하철역 이름을 읽듯이 어린 새에게도 한 마디 던져보는 할머니, 바로 나이든 학생, 제 모습입니다.
ⓒ 정경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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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는 어렵다. 중국어도 그렇다. "나랏 말쌈이 뒹국에 달아, 서로 사맛디 아니하다"는 세종대왕님의 말뜻을 절감한다. 첫 번째 장벽은 성조(聲調). 1성부터 4성까지, 오르내림이 심한 톤의 단어들을 익히느라 진땀을 흘린다. 발음이 같아도 성조가 다르면 전혀 다른 단어가 돼버리기 때문이다.

초딩들처럼 성조와 발음을 수시로 지적받는다. 쓰기도 어렵다. 외우기도 어렵다. 예전에 익혔던 번체가 아니라 간체자를 새로 배워야 한다. 나이 60 넘어 시작한 공부라 단어 두 개를 외우면 한 개는 다음날 온데간데없다. 장강 남쪽 상하이 중심의 남방어와 달리 베이징 중심 표준어의 '얼화'도 익혀야 한다.

강사는 결혼으로 귀화한 한족 출신의 네이티브 스피커 여성. 나이든 학생들의 굳어버린 혀와 뇌에 대한 인내심을 최대한 발휘한다. 그렇지만 갈수록 어려워지는 공부를 포기해버리고 싶은 슬럼프는 수시로 우리를 덮친다.

어쨌거나 문화센터 공부 2년 만에 중국어 자격시험 HSK 4급에 합격하며 기염을 토하던 나. 주위의 격려에도 불구하고 5급 도전을 포기했다. 문제는 날로 심해지는 노안. 교재의 깨알 같은 글씨를 읽기는 무리였기 때문이다.

복습, 예습 대신 유튜브 속 중국어 고수들을 클릭한다. 귀에 쏙쏙 들어오는 한두 마디 짤막한 강의를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중드(중국 드라마)도 본다. 선생님은 현대물을 보는 게 공부에 도움이 된다고 강조한다. 하지만 말의 속도가 너무 빨라 따라잡을 수 없다. 한국처럼 중드 속 젊은 세대는 축약형 언어를 구사한다. 신조어도 난무한다. 어쩔 수 없이 말의 속도가 조금 느린 사극을 본다. 궁중 사극 속 인물들이 쓰는 궁중 언어는 당연히 현재 전혀 쓰이지 않는다.

우리나라 드라마나 영화만큼 높은 평가를 받지는 않지만 중드의 매력은 무궁무진한 소재가 아닐까. 54부작 <랑야방>은 가상의 왕조 양나라의 황위 계승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황자들 간의 두뇌 대결을 다룬다. 신비스러운 책사 매장소가 등장한다. 음모와 책략이 난무하는 권력 투쟁에 애절한 로맨스, 치명적인 매력을 지닌 드라마다. 넷플릭스에서 만난 <천성장가>는 조금 지루하지만 미장센과 연기력 뿐 아니라 공들인 의상이 돋보인다.

한편 요즘 유행하는 판타지 무협물은 그저 황당무계하다. 그럼에도 이른바 대륙 스케일! 춘추전국시대를 거친 광대무변한 강역의 역사는 오늘날 한족을 중심으로 55개 소수민족이 빚어낸 문화 다양성을 뽐낸다. 바로 중국 영화와 드라마 콘텐츠의 보물창고랄까. 게다가 우리는 민족의 고대사부터 현대사까지 종적, 횡적으로 중국 역사와 문화에 얽혀있지 않은가. 복식, 통치제도, 문학, 회화, 언어까지 우리는 중국과의 관계사 속에서 함께 성장했다고 믿는다. 중국 문화의 매력을 굳이 부정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사드 미사일 배치 이슈로 촉발된 한한령 이후 중국과 중국문화 열기는 가라앉은 게 현실이다.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 이후 중국 여러 지역의 봉쇄로 교역이나 관광 루트마저 줄어들거나 막힌 지 오래. 참 아쉽다. 그래도 중국어 공부를 멈출 생각은 없다. 언제일지 모르지만 여행도 꿈꾼다. 무엇보다 진시황 병마 용갱을 보러 시안에 가고 싶다.

중국에 대한 내 관심은 또 다른 이웃인 러시아와 일본의 역사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지고 있다. 일단 한권짜리 다이제스트 러시아 역사와 일본 역사책을 집어 든다. 원래 산만한 병독 스타일이라 조금씩 읽는다. 그 중에서도 지리적 최측근인 일본의 역사에 대한 내 자신의 무지를 심히 반성하게 된다.

먹는 이야기를 하자면 내 입맛은 다른 어느 지역 음식보다 동북아 3국 음식 취향이다. 그렇다면 나는 친일, 친중? 그래서인지 최근 몇 년간 악화일로인 동아시아 3국간의 갈등 구도가 참 불편하다. 정치·경제적 이해관계에 따른 정책들은 정부가 결정할 것이다. 하지만 관광을 포함한 민간 영역의 교류는 지속적으로 확대되는 게 건강하지 않을까?

가만히 앉아 기다릴 수만은 없지. 젊은 세대들이 바쁘다면 '3국 할머니 교류운동'이라도 벌여야 하지 않나 싶다. 60대 중국, 일본 여성 한 명씩을 초대해 우리집 4박 5일 홈스테이를 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동네 투어 가이드도 통역 앱을 이용하면 가능할 테니 말이다.

민간 교류 단체에서 이런 '할머니 어깨동무' 프로그램을 펼치면 어떨까? 머리를 맞대고 한국, 중국, 일본 영화를 한편씩 보기, 좋을 것 같다. 각자 자기나라 음식을 한 가지씩 배우고 가르치면 더 재미있겠지. 이 땅에 태어나 한국인으로만 살다 가는 건 조금 억울하지 않나. 적어도 동아시아 지역민으로 조금만 더 확대된 정체성을 갖고 싶은 이유다.

가끔 들여다보는 <당시 300선> 대가들 속에서 만난 8세기 당나라 시인 왕지환. 관작루에 올라가 쓴 시 <등관작루>에서 그는 멋진 한 마디를 날렸다. "저 멀리 아름다운 풍광을 더 보려고 한 층을 더 올라가야겠다."

배움의 이치도 똑같다. 어제까지 몰랐던 것을 날마다 하나씩 새롭게 배우는 즐거움. 공부가 놀이로 변하는 마법의 나이에 들어선 자들의 특권이다. 바로 이 맛에 명랑하게 나이 들어가는 인간이라는 게 너무 좋아 가끔 실실 웃게 된다.

덧붙이는 글 | https://brunch.co.kr/@chungkyunga


태그:#중국어, #공부놀이, #동네문화센터, #노안, #중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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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세울 것 하나 없는 직장생활 30여년 후 베이비부머 여성 노년기 탐사에 나선 1인. 별로 친하지 않은 남편이 사는 대구 산골 집과 서울 집을 오가며 반반살이 중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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