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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일 정책의 방향타, 3.1절-광복절 발언

한국의 4대 국경일은 3.1절, 광복절, 개천절, 한글날이다. 이중 3.1절과 광복절은 일본의 식민지배와 밀접하게 관련된 국경일이다. 3.1절은 일본의 식민지 무단통치에 항의해 독립을 원하는 민중들이 전국적으로 만세운동을 벌인 것을 기념하는 날이고, 광복절은 일제 35년간 식민 통치에서 벗어난 것을 경축하는 날이다.

이런 이유로 한국의 모든 대통령은 진보 또는 보수 성향을 불문하고 3.1절 기념사 또는 광복절 경축사에 일본의 식민 지배와 관련한 내용을 언급해왔다. 특히, 대통령에 취임한 뒤 처음으로 하는 3.1절 기념사 또는 광복절 경축사는 나라 안팎, 특히 일본에서 큰 주목을 받았다. 그때 나온 일본과 관련한 대통령의 발언이 그 정부 5년 동안 대일 정책의 방향타가 되기 때문이다.

1987년 대통령 직선제가 도입된 이래 쭉 선거가 12월에 진행돼왔기 때문에, 새 대통령의 첫 대일 발언은 3.1절 기념사에서 나왔었다. 그러나 박근혜 대통령 탄핵 이후 대통령선거가 3월로 옮겨졌다. 이에 따라 제19대 문재인 대통령 때부터는 광복절 경축사가 대일 정책과 관련한 첫 발언을 하는 마당으로 바뀌었다.

이명박 정부부터 윤석열 정부까지 최근 네 정권의 삼일절 기념사와 광복절 경축사의 일본 관련 발언을 비교해봤다. 결론을 앞서 말하면, 네 정부 중에서 윤석열 정부의 대일 관련 발언은 실용정부를 표방한 이명박 정부 때와 비슷했다. 그러나 내용은 그때보다 더욱 유화적이고 더욱 빈약했다. 다음은 윤 대통령의 경축사 중 일본과 관련한 부분이다.

비슷한 듯했지만 확연히 다른 윤석열-MB
 
윤석열 대통령이 15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 잔디마당에서 열린 제77주년 광복절 경축식에서 경축사를 하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이 15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 잔디마당에서 열린 제77주년 광복절 경축식에서 경축사를 하고 있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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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과거 우리의 자유를 되찾고 지키기 위해서 정치적 지배로부터 벗어나야 하는 대상이었던 일본은 이제, 세계시민의 자유를 위협하는 도전에 맞서 함께 힘을 합쳐 나아가야 하는 이웃입니다.

한일관계가 보편적 가치를 기반으로 양국의 미래와 시대적 사명을 향해 나아갈 때 과거사 문제도 제대로 해결될 수 있습니다. 한일관계의 포괄적 미래상을 제시한 김대중-오부치 공동선언을 계승하여 한일관계를 빠르게 회복하고 발전시키겠습니다.

양국 정부와 국민이 서로 존중하면서 경제, 안보, 사회, 문화에 걸친 폭넓은 협력을 통해 국제사회의 평화와 번영에 함께 기여해야 합니다."
 
윤석열 대통령은 일본 부분에 모두 네 문장을 할애했지만, 일본의 과거 식민지배를 꾸짖거나 반성을 촉구하는 발언은 하지 않았다. 반면 이명박 대통령은 첫 3.1절 기념사에서 윤 대통령의 반밖에 되지 않는 분량을 할애했으나 일본의 반성을 촉구하는 내용을 빼놓진 않았다. 아래는 이명박 대통령의 2008년 제89주년 3.1절 기념사 중 일본 관련 부분.
 
"한국과 일본도 서로 실용적인 자세로 미래지향적 관계를 형성해 나가야 합니다. 그러나 역사의 진실을 결코 외면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다고 언제까지나 과거에 얽매여 미래로 가는 길을 늦출 수는 없습니다."
 
이명박 대통령은 미래 협력에 중점을 두면서도 '역사의 진실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확실하게 못 박았다. 

"천 년의 역사" 언급한 박근혜... '위안부·강제징용' 콕 집은 문재인
 
박근혜 대통령이 2013년 8월 15일 오후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제 68주년 광복절 경축식'에서 경축사를 하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이 2013년 8월 15일 오후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제 68주년 광복절 경축식"에서 경축사를 하고 있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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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보수 성향의 박근혜 대통령은 2013년 취임 첫 3.1절 기념사에서 "가해자와 피해자라는 역사적 입장은 천 년의 역사가 흘러도 변할 수 없는 것입니다"라는 유명한 구절이 든 대일 강경 발언을 쏟아냈다. 처음에 너무 강경하게 나가 나중에 이것이 발목을 잡기도 했지만 역사 인식과 관련해 피해국의 입장을 가장 확실하게 피력했다. 다음은 박 대통령의 2013년 제94주년 3.1절 기념사 중 일본과 관련한 대목이다.
 
"역사는 자기 성찰의 거울이자, 희망의 미래를 여는 열쇠입니다. 한국과 일본 양국 간의 역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지난 역사에 대한 정직한 성찰이 이루어질 때 공동 번영의 미래도 함께 열어갈 수 있습니다.

가해자와 피해자라는 역사적 입장은 천년의 역사가 흘러도 변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일본이 우리와 동반자가 되어 21세기 동아시아 시대를 함께 이루어가기 위해서는 역사를 올바르게 직시하고 책임지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양국의 미래 세대에까지 과거사의 무거운 짐을 지워서는 안 됩니다. 우리 세대 정치지도자들의 결단과 용기가 필요한 시점입니다. 한국과 일본이 아픈 과거를 하루빨리 치유하고, 공영의 미래로 함께 나갈 수 있도록, 일본 정부는 적극적인 변화와 책임 있는 행동을 해야 할 것입니다."
 
문재인 대통령이 15일 오전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제72주년 광복절 경축식에서 경축사를 하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이 15일 오전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제72주년 광복절 경축식에서 경축사를 하고 있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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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임 대통령의 탄핵으로 5월부터 집권한 문재인 대통령은 광복절 경축사에서 처음 일본 관련 발언을 했다. 그는 2017년 제72주년 광복절 경축사에서 아주 길게 일본 관련 발언을 했다. 한일 사이의 현안을 두루 언급하면서 '일본군 위안부와 강제징용' 문제를 콕 집어 일본 쪽에 인류 보편가치와 국제사회의 원칙에 따른 해결을 촉구했다. 다음은 문 대통령의 광복절 경축사 중 대일 관련 발언이다.
 
"해마다 광복절이 되면 우리는 한일관계를 되돌아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한일관계도 이제 양자관계를 넘어 동북아의 평화와 번영을 위해 함께 협력하는 관계로 발전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과거사와 역사문제가 한일관계의 미래지향적인 발전을 지속적으로 발목 잡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정부는 새로운 한일관계의 발전을 위해 셔틀외교를 포함한 다양한 교류를 확대해 갈 것입니다. 당면한 북핵과 미사일 위협에 대한 공동 대응을 위해서도 양국 간의 협력을 강화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한일관계의 미래를 중시한다고 해서 역사문제를 덮고 넘어갈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역사문제를 제대로 매듭지을 때 양국 간의 신뢰가 더욱 깊어질 것입니다.

그동안 일본의 많은 정치인과 지식인들이 양국 간의 과거와 일본의 책임을 직시하려는 노력을 해왔습니다. 그 노력들이 한일관계의 미래지향적 발전에 기여해 왔습니다. 이러한 역사인식이 일본의 국내 정치 상황에 따라 바뀌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한일관계의 걸림돌은 과거사 그 자체가 아니라 역사문제를 대하는 일본정부의 인식의 부침에 있기 때문입니다.

일본군 위안부와 강제징용 등 한일 간의 역사문제 해결에는 인류의 보편적 가치와 국민적 합의에 기초한 피해자의 명예회복과 보상, 진실규명과 재발방지 약속이라는 국제사회의 원칙이 있습니다. 우리 정부는 이 원칙을 반드시 지킬 것입니다. 일본 지도자들의 용기 있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빈약하고 추상적
 
윤석열 대통령과 김건희 여사가 15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 잔디마당에서 열린 제77주년 광복절 경축식에서 만세삼창을 하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과 김건희 여사가 15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 잔디마당에서 열린 제77주년 광복절 경축식에서 만세삼창을 하고 있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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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 정부까지 최근 네 정부의 첫 3.1절 기념사 및 광복절 경축사를 비교해 보면, 윤석열 정권이 과거사와 관련해 일본에 가장 유화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 내용도 가장 빈약함을 알 수 있다. 문제는 거기서 그치는 게 아니다. 내용이 무엇을 말하는지 모를 정도로 상당히 추상적이다.

"보편적 가치를 기반으로 양국의 미래와 시대적 사명을 향해 나가면" 과거사 문제는 자동적으로 풀릴 듯한 논리의 전개는 너무 안이하다. "김대중-오부치 공동선언을 계승하여 한일관계를 빠르게 회복하고 발전시키겠다"는 대목도 과연 양쪽이 서로 공감하는 김대중-오부치 공동선언의 내용이 무엇인지 알 수 없다. 일본의 최근 태도로 봐서 공감대가 있기나 한 지 모르겠다.

외교에서는 유화적인 자세든 강경 자세든 결과를 이끌어내는 것이 중요하다. 하지만 윤 정부의 안이하고 물렁한 대일 인식으로는 과거사 문제와 관련해 '한국의 일방적 항복'만을 요구하는 일본의 양보를 끌어낼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인다. 일본의 주요 각료와 집권 자민당 간부들은 윤 대통령이 가장 유화적인 대일 메시지를 보내는 순간에도 당당하게 A급 전범을 기리는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했다. 이것이 윤석열 정부가 맞딱드린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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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논설위원실장과 오사카총영사를 지낸 '기자 출신 외교관' '외교관 경험의 저널리스트'로 외교 및 국제문제 평론가로 일하고 있다. 한일관계를 비롯한 국제 이슈와 미디어 외에도 정치, 사회, 문화, 스포츠 등 다방면에 관심이 많다. 1인 독립 저널리스트를 자임하며 온라인 공간에서 활발하게 글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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