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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동단 총재 김가진
 대동단 총재 김가진
ⓒ 석탑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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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7월 4일은 독립운동 진영의 최고 원로였던 대동단 총재 동농 김가진(東農 金嘉鎭) 선생의 100주기였다. 돌아오지 못한 독립운동가. 안중근 의사의 경우는 유해가 묻힌 곳을 알 수 없어 모셔오지 못했다지만, 김가진 선생처럼 뻔히 어디 묻혀 계신지 알면서 모셔오지 못한 채 100주기를 넘기게 되니 황망한 마음을 금할 길이 없다.

3.1운동의 열기가 가시지 않은 1919년 10월, 지금으로 치면 90 노인이라 할 74세의 나이에 김가진은 갓 스물 늦둥이 아들 김의한과 함께 망명길에 올랐다. 11살에 시집 온 정정화가 뒤따라 망명길에 오른 것은 소꿉동무 같았던 동갑내기 남편이 그리워서만은 아니었다. 독립운동의 험한 길에 나선 늙은 시아버지 빨래라도 해드려야겠기에서였다.

김의한과 정정화 부부는 1945년 해방이 되어서야 조국으로 돌아왔다. 임시정부의 살림을 도맡았던 김의한 정정화 부부는 독립유공자 서훈을 받았다. 백범 김구 선생을 모시고 남북협상에 참여했다가 돌아와 한국전쟁 당시 납북된 김의한은 지금 평양의 애국열사릉에 잠들어있다. 북으로 끌려간 남편을 찾아 헤매다 과거의 친일경찰들에 의해 '비상상태하의 범죄처벌에 관한 특별조치령' 위반으로 억울한 옥살이를 해야 했던 정정화는 대전국립현충원에 모셔져있다.

그리고 아들과 며느리뿐 아니라 80여명의 독립유공자를 배출한 3.1운동 이후 국내 최대의 비밀결사였던 대동단 총재 김가진은 상해에 묘비도 없이 쓸쓸히 홀로 잠들어있다. 배고픔과 추위에 떨어야 했던 상해에서의 3년이 그래도 세 식구가 함께 의지했던 행복한 시절이었을까? 한 분은 상해에, 한 분은 평양에, 또 한 분은 대전에 잠들어있는 이 기막힌 이산은 분단과 친일파의 득세와 왜곡된 보훈정책이 가져온 참담한 현실을 보여준다. 어차피 대한민국은 독립운동가들이 꿈 꾼 나라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조선 후기 신분제 개혁운동에서 개화운동을 거쳐 독립운동으로

1846년에 태어나 1922년 상해에서 생을 마감한 김가진의 77년의 삶은 격동의 한국근대사의 축소판이었다. 그는 안동 김씨 명문가에서 태어났지만, 서자였다. 조선시대에 서출로서 일품에 오른 인물은 조선 전기에 간신으로 유명한 유자광, 조선 중기에는 동의보감으로 유명한 허준, 그리고 조선 후기에는 김가진. 딱 세 명 뿐이었다.

유자광과 허준은 좀 돌출적인 존재였다면 김가진은 조선 후기 신분제도 개혁을 위한 수많은 서출들의 몸부림의 선두에 서있었다. 박제가, 유득공, 이덕무 등 재주 많은 서얼 출신들이 신분제의 제약에 뜻을 펼 수 없었다면, 이들보다 약 100년 뒤에 탄생한 김가진, 윤치호, 안경수, 민영기, 이범진과 이위종 부자 등은 조선 후기 서출들의 신분제 개혁운동을 개화운동으로까지 발전시킨 인물들이었다.

안타깝게도 개화운동의 주역들은 다수가 친일파가 되었다. 이완용은 독립협회의 주역이었고, 박영효나 윤치호 등은 일제의 식민통치에 적극 협력했다. 친일단체 일진회에는 10여년 전 독립협회나 동학에서 맹활약했던 인재들이 차고 넘쳤다. 유길준은 적극적으로 친일 행위를 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독립운동에 나선 것도 아니다. 한 시기 시대적 과제를 책임진 개화운동의 주역 중 독립운동이라는 새로운 과제을 짊어진 사람은 많지 않다.

개화운동의 주역 중 독립운동의 큰 흐름에 뚜렷한 발자취를 남긴 이는 대동단 총재 김가진과 신간회 회장 이상재 정도이다. 미국인 필립 제이슨이 된 서재필이 미국에서 '가끔' 독립운동 집회에 모습을 드러냈지만, 독립운동의 본류에 뛰어든 것은 아니었다. 특히 김가진은 조선 후기의 신분제 개혁운동의 맥을 이어 개화운동의 중심인물로 활동하다가, 3.1운동 후 최대의 지하조직을 결성하고 임시정부로 망명하여 망국의 대신에서 민국의 평민으로 변신했다는 점에서 매우 큰 의미가 있다.

김가진과 이상재는 개화운동이 일부의 오해처럼 친일로만 흐른 것이 아니라 독립운동으로 이어졌다는 점을 증명하는 소중한 존재이다. 김가진의 아들과 며느리 김의한과 정정화는 아버지의 뜻을 이어 해방이 될 때까지 독립운동에 헌신했으며 해방 후에는 통일운동에 나섰다. 이들 부부의 외아들 김자동은 민족일보 기자를 지냈으며 통일운동과 민주화운동에 몸 바쳤다. 김자동의 딸 김진현, 김선현 자매는 각각 노조위원장으로 노동운동에 앞장섰다. 독립운동의 명가가 많다 하지만, 이렇게 조선 후기의 신분제 개혁운동에서 개화운동을 거쳐 독립운동으로, 그리고 해방 후에는 통일운동-민주화운동-노동운동-시민운동으로 이어진 사례를 이 댁 이외에 나는 알지 못한다.

해방 직후에 모셔왔어야 했다는 회한

정정화의 회고록 <장강일기>(첫 출간 당시의 제목은 <녹두꽃>)가 나오면서 독립운동에서 여성들의 역할도 주목을 받았고, 독립운동가들의 궁핍한 삶과 일상도 재조명되었다. 며느리 정정화가 임시정부의 안살림을 책임졌다면 아들 김의한은 임시정부와 한독당의 살림꾼이었다. 해방 후 임시정부 요인들이 환국한 뒤 1946년 김의한은 한독당의 조직부장이라는 요직을 맡았다.

이 무렵 한독당 위원장 백범 김구 선생은 일본에서 순국한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세 분 의사의 유해를 모셔와 효창공원에 안장했다. 김의한은 한독당 조직부장으로 활동하는 한편 독립운동사자료수집위원회를 조직하여 독립운동 사료를 모으는 일에 앞장섰다. 3의사의 유해를 모셔온 뒤 백범은 김의한에게 김가진 선생을 비롯하여 박은식, 신규식 선생 등 상해에 묻혀계신 독립운동가들의 유해를 모셔오자고 제안했다.

중경 임시정부에서 귀국할 때 상해에 들러 만국공원 묘지에 잠들어 계신 아버지 김가진과 수많은 후배 독립운동가들께 성묘하고 온 김의한은 백범께 다른 급한 일들이 많으니 정부가 수립된 뒤에 모셔 와도 된다고 사양했다고 한다. 3의사야 적국인 일본 땅에 묻혀 계시니 서둘러 모셔옴이 마땅하지만, 중국땅에 묻혀 계신 분들이야 천천히 모셔와도 된다는 생각에서였을 것이다.

김가진의 손자 김자동에게는 이 일이 천추의 한이 되고 말았다. 당시에는 아무도 분단이 이렇게 무서운 것이라는 것을 생각하지 못했다. 해방 된 조국에서 백범이 암살당할 것이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었다. 독립운동 시기 임시정부를 적극 지원했던 장제스가 대만으로 쫓겨가고 중국 대륙이 공산화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었다. 그리고 전쟁이 터지고 김의한은 납북되고 말았다.

임시정부의 품 안에서 백범 등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을 아저씨라고 부르며 자란 김자동은 할아버지의 독립유공자 서훈을 서두르지 않았다. 독립유공자 되려고 독립운동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런 김자동이 뒤늦게 할아버지의 독립유공자 서훈에 나서게 된 계기는 1992년 8월 한국과 중국 간의 수교가 이루어진 직후 1993년 5월 김영삼 정권이 박은식, 신규식, 노백린, 안태국, 김인전 등 임시정부 요인 5인의 유해를 모셔온 사건이었다.

1920년 돌아가신 안태국 선생에 이어 김가진 선생이 돌아가시고 다른 분들도 차례로 김가진 선생 묘역 주변에 묻혔던 분들이었다. 그런데 정부는 독립유공자만 정부가 나서서 유해를 모셔올 수 있다며 바로 옆의 김가진 선생 묘소는 그대로 두고 다섯 분만 모셔온다는 것이다. 김자동은 서둘러 할아버지 김가진의 공적서를 작성하여 유공자 서훈 신청을 하게 되었다.

이 해의 서훈심사 당시 김자동은 심사에 참여했던 위원들로부터 건국훈장 대통령장으로 포상 결정되었다는 축하 인사를 받았으나 발표를 앞두고 서훈이 보류되었다는 뜻밖의 이야기를 들었다. 심사가 끝난 후 이미 결정된 사안이 번복되는 일은 전례 없는 일이었다고 한다. 김가진의 서훈신청이 이때부터 지금까지 30년간 여덟 차례나 '보류'된 것은 임시정부의 독립운동가들이 최고의 원로로 모시고 극진하게 대접했던 김가진에게 해방되었다는 조국에서 참으로 터무니없는 세 가지 누명이 씌워졌기 때문이다.

의병탄압이라는 누명

그 이유를 수소문해보니 김가진이 의병을 탄압했다는 것이다. 김가진이 1906년 충청관찰사로 재직할 당시 충청도 홍주에서는 전 참판 민종식이 의병을 일으켜 한 때 홍주성을 점령했다가 패하여 12월 3일 일본군에 그를 숨겨주었던 이남규 등과 함께 체포되었다. 김가진은 고종의 명으로 민종식을 서울로 압송하고, 이남규 등은 풀어주었다. 민종식은 처음에는 사형을 언도받았다가 명성황후의 인척이라는 이유로 종신유배형으로 감형되었다가 특사로 석방되었다.

한편 이남규는 1907년 8월 19일 아들 이충구와 함께 일본군에 의해 살해되었다. 그런데 이남규 부자가 살해당한 것은 김가진이 충청관찰사를 그만두고 서울로 간지 넉달 후에 벌어진 일이고, 민종식은 김가진이 체포한 것이 아니라 일본군이 체포한 것을 고종의 명에 의해 풀어주었을 뿐인데도 일부 의병연구가들이 <매천야록>의 잘못된 기록만 보고 마치 김가진이 민종식과 이남규를 체포했고, 이남규 부자가 피살되는 비극이 일어났다고 단정해 버린 것이다.

일진회의 밀고에 의해 일본 헌병이 민종식과 이남규 등을 체포하는 과정이 상세하게 밝혀진 오늘, 이런 잘못된 주장을 하는 사람은 없다. 그럼에도 김가진에게 한 번 잘못 씌워진 누명의 그림자는 쉽게 가시지 않고 있다.

친일파라는 누명

임시정부 대통령 이승만 등이 참석한 1921년 3.1절 기념식. 연단 중앙에 얼굴이 조금 보이는 분이 김가진 선생이다. 김가진이 덮어 쓴 또 다른 누명은 친일파라는 누명이다. 김가진은 무엇보다도 그 근거는 김가진이 강제병합 당시 일본이 뿌리는 남작이라는 귀족 작위를 거부하지 못했던 점에 기인한다.

일부 인사들은 당시에 또는 일정한 시일이 지난 뒤에 작위를 거부하거나 김가진의 일가 형 김석진처럼 자결하기도 했다. 김가진이 명시적으로 작위를 거부하지 않았고 1910년대에 조선귀족들의 모임에 몇 차례 참여한 기록이 있다는 사실은 분명 그의 경력에서 오점이 될 수 있다. 그러나 그는 무엇보다도 조선귀족이라는 안락한 지위를 버리고 독립운동에 나서지 않았던가?

일제가 강제병합 당시 72명에게 귀족작위를 준 것은 명백히 조선의 지배층에 대한 포섭정책이었다. 그런데 작위를 준 대상자의 선정은 흔히 생각하듯이 강제병합의 공이 큰 사람들만을 중심으로 한 것은 아니었다. 이들 이외에도 대한제국 황실의 주요 인물들과 대한제국 대신 출신으로 품계가 1품에 이르렀던 사람들을 포함시켰다. 김가진도 여기에 해당된다.

김가진이 귀족작위를 받았던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는 임시정부의 요인들 중 어느 누구도 김가진이 작위를 받은 것을 탓하지 않았다. 임시정부 사람들은 오히려 작위를 버리고 임시정부의 평민으로 험난한 길에 나선 것에 치하해 마지 않았다. 그러기에 3.1절 기념식에서는 김가진을 단상 중앙에 모시고, 박은식과 함께 태극기 개양의 상징적 역할을 맡기고, 그가 돌아가셨을 때는 상해 거주 한국인들의 절반 가까이가 모여 극진한 장례를 모시지 않았던가?

조선총독부는 공식적으로 김가진의 귀족직위를 취소하지 않았다. 김가진의 망명이라는 초유의 충격적인 사태에 임하여, 조선총독부는 김가진을 회유하여 다시 돌아오도록 밀사 파견 등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 조선총독부가 김가진의 귀족지위를 공식적으로 취소하지 않은 것은 그 회유책의 일환으로 김가진이 돌아오면 망명행위를 불문에 부치고 처벌하지 않겠다는 뜻을 보인 것이다.

그런데 김가진의 서훈을 반대하는 인사들 중에는 김가진이 망명할 때 작위를 반납하지 않고 갔다는 것을 트집 잡기도 했다. 참으로 어이없는 일이다. 극비리에 망명을 단행하면서 총독부에 가서 작위를 반납했어야 했단 말인가! 공식적으로 작위 반납을 하지 않았으니 김가진은 죽을 때까지 남작이었다는 해괴한 주장은 조선총독부와 일부 서훈 관계자들만이 하고 있을 뿐이다.

군주제의 부활을 꾀한 복벽파라는 누명

김가진이 뒤집어 쓴 또 하나의 누명은 그가 군주제의 부활을 꾀한 복벽파라는 것이다. 이같은 견해는 김가진이 망명할 당시 그가 총재로 있던 대동단이 고종의 둘째아들 의친왕 이강의 망명을 같이 추진한데서 기인한다. 고종의 큰아들은 순종이고, 셋째이자 막내아들이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이었다. 의친왕의 망명 추진이 곧 조선왕조의 부활을 꾀하는 것일까? 이제 대동단 관련자들에 대한 심문조서가 모두 공개된 오늘날에도 이런 주장을 편다는 것은 학문적으로 너무나 게으른 일이 아닐 수 없다.

일제가 취조한 수십 명의 관계자 중 군주제를 지지한 복벽론자는 이달하와 정두화, 두 사람뿐이며, 74세의 김가진은 세상이 바뀌었고, 군주제를 부활시키기에 의친왕은 약하다고 27세의 복벽론자 이달하를 설득하고 있다. 안타깝게도 조선을 벗어나자마자 일제 관헌에 발각되어 망명이 좌절되었지만, 의친왕은 "독립된 우리나라의 평민이 될지언정 일본의 귀족이 되기를 원치 않는다"며, 임시정부와 손잡고 생사를 함께 하겠노라는 내용의 친서를 임시정부에 보낸 바 있다.

김가진이나 대동단이 복벽론 계열의 단체였다면, 각종 문건에 '조선 개국'이나 명나라가 망한 뒤 조선 선비들이 명나라 마지막 황제의 연호를 따서 '숭정 기원 후'라 한 것처럼, '융희 기원 후'같은 연호를 썼을 것이다. 그러나 김가진과 대동단은 임시정부를 우리 정부라고 부르고 있고, '민국'이라는 연호를 쓰고 있고, 자신들의 지위를 민국의 평민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고종의 최측근이자 충실한 신하였던 김가진은 고종이 살아있을 때는 조선이 독립된다면 당연히 고종황제가 복위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1919년 1월 고종황제의 갑작스런 죽음은 김가진을 비롯한 수많은 조선 '백성'들의 마음 속에서 조선왕조가 진짜로 무너진 것을 의미했다. 아직 조선의 대중들은 통치자를 자기 손으로 뽑는 제도에 익숙하지 않았지만, 독립운동 진영은 주로 위정척사 계열의 극히 일부 복벽론자들을 제외하고는 너무도 당연히 '민국'을 세우는 것으로 의견을 모았다.

그 결과물이 민주공화제를 채택한 상해임시정부였다. 고종이 살아 있을 때 고종에게 가장 충실했던 측근 김가진이나 이회영은 고종이 죽고 나자 더 자유롭게 튀어 올랐다. 이회영은 임시정부 주류의 서구식 자유민주주의를 넘어 아나키즘을 적극 수용했고, 김가진의 대동단은 조선 국내에서는 최초로 사회주의를 표방했다. 김가진이 일부의 오해처럼 복벽론자라면 대동단이 사회주의를 표방한 사실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독립운동의 수령" 잠들다

한 사람의 삶을 평가할 때는 그가 어떻게 살았는가뿐만 아니라 그가 어떻게 죽었는가를 무겁게 보아야 한다. 독립운동 하다가 얼어 죽고 굶어 죽고 매맞아 죽은 사람이 헤아릴 수 없이 많지만, 한때 부귀영화를 누리다가 다 버리고 독립운동에 나서 80 나이에 굶어 죽은 두 분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경기도 마석에서 한양 나들이를 할 때 동대문에 들어서서야 남의 땅을 밟았다는 조선 최고의 부자 이석영(이회영 6형제 중 둘째). 부동산이 폭등한 요즘 시세로 치면 수십조는 되었을 땅을 헐값으로 처분해 신흥무관학교 건립 등 독립운동에 바친 그는 상해에서 쓸쓸히 눈을 감았다.

김가진 역시 하루 한 끼를 먹지 못하는 배고픔에 뼛속까지 스며드는 한기로 큰 고통을 받았다. 영양실조에 빠진 김가진은 각기병으로 고생했다. 양 무릎 아래로 마비 증세도 자주 왔고, 다리는 퉁퉁 부어오르는데다, 종아리 근육을 쥐어짜고 비트는 것 같아 옆에서도 차마 지켜보고 있기 힘든 지경이었다고 한다. 김가진의 이런 처지는 국내에까지 알려졌던 모양이다. 이상재 선생이 윤치호에게 미국으로 가 독립운동을 하라고 권했을 때 윤치호는 일기에 김가진은 상해에서 절망적인 생활을 하고 있다며 자신이 제2의 김가진이 될 수는 없다고 썼다.
 
김가진의 장례행렬. 상해 한인의 절반 이상이 독립운동 수령 중 가장 연로한 김가진의 마지막 길을 눈물을 흘리며 뒤따랐다.
 김가진의 장례행렬. 상해 한인의 절반 이상이 독립운동 수령 중 가장 연로한 김가진의 마지막 길을 눈물을 흘리며 뒤따랐다.
ⓒ 김자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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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2년 7월 4일 김가진 선생은 77세를 일기로 상해에서 눈을 감았다. 그의 서거 소식이 알려지자 독립운동가들이 모여들었다. 안타깝게도 김가진이 가장 예뻐하던 며느리 정정화는 독립운동자금과 생활비를 마련하기 위해 국내에 잠입해 있어 임종을 지키지 못했다.

김가진의 빈소는 상해와 국내 두 곳에 차려졌다. 임시정부는 사실상 국장으로 김가진의 장례를 모셨고, 당시 상해 교민 500명의 절반이 훌쩍 넘는 인파가 그의 마지막 가는 길을 배웅했다. 국내의 동아일보도 "해외에 있는 독립운동의 수령"으로 가장 나이가 많은 김가진의 부고기사를 파격적으로 크게 그리고 여러 번 다뤘다. 그의 장례식 사진 2장이 입수되자 동아일보는 한 달이 지났음에도 큰 지면을 할애해 이를 보도했다. 그만큼 상해로 탈출한 김가진은 당대의 민족주의자나 조선 민중들에게 공경과 관심의 대상이었고, 사람들은 한 마음으로 그의 죽음을 애도했던 것이다.

백범 김구 등 독립운동가들이 서훈 심사를 했다면?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은 여러 면에서, 심지어는 독립운동 시기의 독선적인 행태와 관련해서도 심각한 비판을 받고 있지만, 독립운동 역사에서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뚜렷한 자취를 남긴 인물이었다. 그는 재임기간 독립유공자 서훈을 서두르지 않았다. 사실 독립운동가들의 목표는 독립이었지, 누가 서훈을 바라거나 남이 알아주기를 바라고 독립운동을 했었겠는가?

독립유공자 서훈을 서두른 것은 일본군 장교 출신 박정희였다. 1962년 처음 서훈이 실시되었을 때부터 여러 가지 문제가 발생했다. 독립운동자의 서훈에서 등급을 두는 것이 맞는지, 분당 상황 때문에 사회주의 독립운동이 정당한 평가를 못 받지는 않았는지, 수형기간 등을 중심으로 한 독립유공자 선정기준은 적절한지, 일부 보훈 관료와 그들과 연결된 특정 학맥의 연구자들이 주도해 온 유공자 심사가 독립운동사의 폭과 깊이를 제대로 담아내고 있는지, 행적조사의 부실 또는 정실로 인하여 부적절한 인사가 서훈되고 마땅히 서훈받아야 할 분이 서훈받지 못한 경우는 없는지 여러 가지 논란이 60년이 지난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특히 보훈정책 자체가 군사독재정권 시절 정치적인 이유로 크게 왜곡된 점을 반드시 바로 잡아야 한다. 이 점은 규모만 보아도 확실하다. 3년간 지속된 한국전쟁 참전 유공자는 생존자만 약 10만이고, 월남전 참전 유공자는 근 20만으로 호국 분야의 국가유공자는 현재 30만 명 가량이다. 반면 의병전쟁까지 포함하면 50년이 넘는 독립전쟁의 유공자는 겨우 1만5천 명에 지나지 않는다.

민주화운동과 관련해서는 4.19유공자가 9백 명이 안 되고 5.18광주민주화운동 유공자가 4천4백 여 명일뿐이고 60년이 넘는 민주화 과정에 참여했던 수많은 사람들 중 사망자와 부상자 8백여 명만이라도 국가유공자로 예우해 달라는 민주유공자법은 20년째 공전하고 있다. 국가 보훈정책의 3대 축인 독립-호국-민주라 하지만, 독립과 민주는 찬밥 신세이다.

독립운동가들에게 인색했던 대한민국의 서훈제도가 갖는 문제점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례가 바로 김가진의 사례이다. 선생의 유족들이 여덟 번이나 서훈 신청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김가진은 납득할 수 없는 이유로 서훈이 보류되어 온 것이라 할 수 있다.

만약 김구나 조소앙 같은 임시정부 요인들이 주도하여 독립유공자 서훈제도를 만들었다면 어떤 식으로 독립유공자를 선정했을 것이며, 또 김가진은 어떻게 되었을까? 김가진에 대해서 국한해서 이야기한다면 아마 심사 자체가 필요 없었을 것이다. 살아계실 때 임시정부의 행사에 가장 어른으로 모셨고, 돌아가셨을 때 사실상의 국장으로 임시정부 요인 전원이 정중하게 장례를 치러드렸는데 무슨 심사를 한단 말인가? 김가진이 총재로 있던 대동단 활동과 관련하여 서훈을 받은 사람은 80여 명에 이른다.

이들은 김가진 명의의 선언문을 갖고 김가진 명의로 소집된 시위에 참여하였다가 검거되었거나, 김가진 명의의 신임장과 군자금 모집 권고문을 들고 독립운동 자금을 모으다가 체포된 사람들이었다. 만약 김가진이 일부 보훈관계자들 주장처럼 친일파였다면 어떤 바보가 그 신임장을 들고 군자금을 내라고 하겠으며 또 어떤 사람이 그 신임장을 가지고 온 사람에게 돈을 내주겠는가? 당대의 독립운동가들이나 독립운동을 지지하는 대중들이 보기에 김가진은 독립운동의 훌륭한 지도자였던 것이다.

당시 언론도 앞서 살펴본 것처럼 김가진의 죽음을 독립운동 수령의 서거로 애도했다. 현재의 언론도 마찬가지였다. 최근만 살펴보아도 임시정부 100년이 되는 2019년 무렵이나 그의 100주기가 되는 올해의 방송과 신문지상에서는 김가진을 높이 평가하는 컨텐츠들을 자주 만날 수 있었다.

대표적인 방송 프로그램만 살펴보아도 2018년 11월 13일 KBS1 시사기획 창 <돌아오지 못한 독립투사들>, 2019년 4월 12일 KBS2 다큐세상 <대동단과 총재 김가진>, 2019년 4월 30일 KBS1 대한민국 임시정부수립 100주년 특집 <수당 정정화>, 2019년 4월 29일 MBC 스트레이트 <'건국훈장' 친일파가 심사하고 친일파가 받았다!>, 2019년 8월 1일 MBC 다큐프라임 <100년 후의 훈장, 동농 김가진>, 2019년 4월 10일 TV조선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임정둥이의 기억>, 2019년 7월 19일 국회방송 <임시정부를 지킨 독립운동가 부부, 김의한 정정화> 등이 주요한 프로그램이었다.
 
서울역사박물관의 김가진 일가 독립운동 기획전시 <조국으로 가는 길> 포스터.
 서울역사박물관의 김가진 일가 독립운동 기획전시 <조국으로 가는 길> 포스터.
ⓒ 서울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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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에는 진보와 보수 가릴 것 없이 주요 신문들이 김가진 관련 기사를 실었다. 이보다 앞서 2013년 8월 개막한 서울역사박물관이 준비한 김가진 일가의 독립운동을 다룬 기획전시 <조국으로 가는 길>은 20만이 넘는 인파를 끌어 모았다. 이를 보면 당시의 독립운동가들은 물론이고, 당시의 일반 민심이나 언론, 현재의 민심이나 언론 모두 김가진을 훌륭한 독립운동가로 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김가진이 독립운동가가 아니라는 주장을 공개적으로 편 것은 조선총독부와 식민사학자들이었다. 대표적인 사례로는 <경성일보> 사장으로 한국사 왜곡의 선두에 섰던 아오야기 츠나타로 (青柳綱太郎)를 들 수 있다. 그는 <조선독립소요사론>에서 김가진의 망명을 가정불화로 인한 외국 도피인 양 비방했다. 김가진이 독립운동가가 아니라는 견해를 갖고 있는 자는 조선총독부 주변의 식민통치배들과 대한민국의 일부 편협한 보훈 관련자들뿐이었다. 남작의 망명에 충격을 받은 조선총독부나 그 주변인물들이 김가진이 독립운동 하러 간 것이 아니라고 극력 모해하고 비방한 이유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그렇지만 독립운동가들이 최고의 어른으로 모신 선배독립운동가에 대한 서훈을 한사코 거부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이해할 길이 없다.

김가진 선생의 손자인 대한민국임시정부 기념사업회 김자동 회장은 지금 95세의 나이로 병석에서 사투를 벌이고 있다. 2022년 3월 대한민국임시정부 기념관이 개관하면서 그는 숙원사업의 하나를 이뤘다. 그렇지만 또다른 숙원사업은 2022년에도 좌절되었다. 김가진의 유족들이 8차례나 서훈을 신청한 것은 독립유공자 타이틀을 원해서가 아니라, 고인의 유해를 고국으로 모셔오기 위해서이다. 병석에 눕기 전 2019년 7번째 서훈신청서에서 김자동 회장은 이렇게 썼다.
 
"훗날 독립유공자가 되기 위해 독립운동에 나선 분은 단 한 분도 없습니다. 누가 시켜서 독립운동에 나선 것도 아닙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독립유공자 서훈 안 받아도 그만입니다. 그러나 손자로서 절절한 사정이 있습니다. 이제 제 나이 아흔을 넘겼고,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죽기 전에 꼭 해야할 일이 증조부의 유해를 모셔오는 일입니다. 상하이 만국공묘에 증조부와 나란히 누워 계시던 박은식 선생 등 여러분이 문민정부 출범 이후 국내로 모셔졌지만, 증조부만은 독립유공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모셔오지 못했습니다. 자비로 모셔오려 해도 만국공묘가 송경령 공원에 편입되어 중국의 국가유적지가 되었기 때문에 정부 간 교섭이 아니고서는 삽 한 번 뜰 수 없는 형편입니다.

독립운동의 격랑 속에서 낳고 자라고 살고 세상을 뜬 이규학(이회영 선생의 큰아들, 이종찬 전 국정원장의 아버지)는 이런 유언을 남겼다. "나라 안에서 나라 밖에서 우리 모두 한 마음되어 목숨을 걸고 싸웠노라. 항일독립투쟁은 민족의 성원으로서 당연한 의무이니 이를 자랑하도 말고 상을 바라지도 말며, 조국산하에 묻히는 것만으로도 분에 넘친 영광으로 알지어다."
 

애초부터 독립유공자 타이틀을 바라서 서훈을 신청한 것도 아니었다. 74살 김가진이 상해로 망명할 때 분명 살아서 돌아오지 못할 것은 각오했을 것이다. '왜적'이 지배하는 고국으로는 돌아갈 생각도 안 했을 것이다. 그러나 조국이 독립된 지 80년이 되어가고, 당신이 세상을 뜬지 100년이 지나도록 상해의 옛 외국인 묘지에 홀로 남은 외로운 넋이 될 줄이야 짐작이나 했을까?

임시정부 식구들이 가난한 주머니를 털어 정성스럽게 세운 묘비는 문화혁명 때 홍위병들의 손에 박살이 나버렸다. 안태국(1920)에 이어 김가진이 자리를 잡고 차례로 주변에 누웠던 신규식(1922), 김인전(1923), 박은식(1925), 노백린(1926)이 모두 고국으로 돌아간 지 근 30년, 김가진은 그 자리에 홀로 누워 있다.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난 최고 원로를 조국 산하로 모셔오는 것이 그분께 정녕 '분에 넘친 영광'이라서 드려서는 안 된다는 것인가? 민망하고 부끄러울 뿐이다. 상해 하늘에 떠 있을 외로운 그분의 별은 오늘 밤에도 어김없이 바람에 스치울 것이다.
 

덧붙이는 글 | 통일뉴스에도 실릴 수 있습니다.


태그:#김가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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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홍구 기자는 오마이뉴스 고정 칼럼니스트입니다. 서울대 국사학과와 동대학원을 졸업한 뒤 미국 워싱턴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베트남전 진실위원회 집행위원,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권 실현과 대체복무제도 개선을 위한 연대회의 공동집행위원장, 국정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 위원 등을 맡고 있습니다. 현재 성공회대 교양학부 교수로 재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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