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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미-일 3국의 정치적 이해가 맞아 떨어져 지지부진하던 한일회담이 5.16 이후 급속히 진행됐다. 사진은 '한일협정'에 서명하는 박정희 대통령. 왼쪽부터 정일권 총리, 박 대통령, 이동원 외무장관, 김동조 주일대사
▲ 한-미-일 3국의 정치적 이해가 맞아 떨어져 지지부진하던 한일회담이 5.16 이후 급속히 진행됐다. 사진은 "한일협정"에 서명하는 박정희 대통령. 왼쪽부터 정일권 총리, 박 대통령, 이동원 외무장관, 김동조 주일대사 한-미-일 3국의 정치적 이해가 맞아 떨어져 지지부진하던 한일회담이 5.16 이후 급속히 진행됐다. 사진은 "한일협정"에 서명하는 박정희 대통령. 왼쪽부터 정일권 총리, 박 대통령, 이동원 외무장관, 김동조 주일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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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는 민주정부를 쿠데타로 무너뜨리고 권력을 찬탈하면서, 일본군 출신인 자신의 전과를 캄플라지하고자 '민족적 민주주의'를 지도이념으로 내걸었다. 그와 '민족'은 전혀 어울리지 않는 상치되는 가치였다.

더욱이 쿠데타를 통한 정권의 명분을 경제발전에 두고, 이의 재원 조달을 위해 일본과 국교정상화 회담을 서둘렀다. 미국이 대소련봉쇄 정책의 일환으로 한ㆍ일국교 정상화를 재촉하고 있었다. 일본 정부는 박정희의 전력, 정통성이 없는 권력, 미국의 압력 등을 훤히 꿰고 있어서 고자세를 보였다. 박정희 정권이 굴욕적인 한일회담을 서둘게 된 정치외교적 배경이다. 

정부는 '김종필ㆍ오히라(大平) 메모'를 통해 한국의 대일청구권을 비롯 문화재 반환, 재일교포의 법적지위, 한일병탄조약의 원천무효 등이 배제되는 굴욕회담을 서둘렀다.

대일굴욕외교반대 범국민투쟁위원회가 구성되고 전국 각 대학에서 반대 시위가 잇따랐다. 1964년 봄은 5.16 이후 처음으로 대학가에서 대규모적인 반정부 굴욕회담 반대시위가 계속되었다.
 
오히라(大平)일본외상과 회담하고 있는 김종필 중앙정보 부장(62.10.20)
 오히라(大平)일본외상과 회담하고 있는 김종필 중앙정보 부장(62.10.20)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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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라이트는 서울대생들의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이다.

1964년 5월 20일 서울대 2,000명의 학생들이 결집한 가운데 '대일굴욕외교반대 학생총연합회'(한일 굴욕회담 반대 대학생 총연합회, 회장 김중태)의 주도하에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이 거행되었다. 이에 앞서 각 대학 대표 4명이 민족적 민주주의의 관을 어깨에 메고 대회장으로 들어와 조사를 낭독하고 화형식과 함께 선언문과 결의문을 발표하였다. 장례식의 조사는 김지하가 작성하였다. 이 조사에서 학생들은 "4월항쟁의 참다운 가치성은 반외세ㆍ반매판ㆍ반봉건에 있으며, 민족ㆍ민주의 참된 길로 나아가기 위한 도정이었으나, 5.16쿠데타는 이러한 민족ㆍ민주이념에 대한 정면적인 도전"이라고 비판하였다.

그리고 "민족적 민주주의는 수렵적 정보정치를 합리화하기 위한 행상적 탈춤으로 변장"됐다고 규탄하고, "매국적 한일 굴욕회담을 전면 중지"하라고 요구하였다. 결의문에서는 박 정권을 4.19정신을 근본적으로 부정한 친일, 친미 정권으로 규정하고, 그 지주는 국내의 매판자본임을 천명하면서 반외세 반독재를 하나의 구호로 결합하였다. 이러한 내용의 선언문은 군사정권의 숱한 의혹 사건과 정책, 박정희의 억압과 계속되는 빈곤에 점점 회의를 느끼기 시작하던 많은 학생들과 시민의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주석 4)
 
8년간의 긴 감옥생활을 끝내고 출옥한 직후의 김지하(1981년).
▲ 8년간의 긴 감옥생활을 끝내고 출옥한 직후의 김지하(1981년). 8년간의 긴 감옥생활을 끝내고 출옥한 직후의 김지하(1981년).
ⓒ 작가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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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례식의 '조사'는 김지하가 지었다 그의 첫 대 사회문건으로, 학생운동사에 길이 남을 문건이다. 발췌한다. 

조(吊) 민족적 민주주의 

시체여!
너는 오래 전에 이미 죽었다. 죽어서 썩어가고 있었다.

넋없는 시체여!
반민족적 비민주적 민족적민주주의여!

썩고 있던 네 주검의 악취는 사꾸라의 향기가 되어, 마침내는 우리들 학원의 잔잔한 후각이 가꾸고 사랑하는 늘 푸른 수풀 속에 너와 일본의 이대(二代) 잡종, 이른바 사꾸라를 심어 놓았다. 생전에도 죄가 많아 욕만 먹든 시체여! 지금도 풍겨온다. 강렬하게 냄새가 지금 이 순간에도 충혈된 사냥개들의 눈으로부터 우리를 엄습한다. 시체여! 죽어서까지도 개악과 조어(造語)와 식언과 번의와 난동과 불안과 탄압의 명수요, 천재요 거장이었다.

너 시체여! 너는 그리하여 희대의 천재(賤才)요, 희대의 졸작이었다. 구약을 신악으로 개악하여 세대를 교체하고 골백번의 번의에 번의를 번의하여 권태감의 응분으로 국민정서를 쇄신하고, 부정불하(拂下), 부정축재, 매판자본 육성으로 빠찡꼬에 새나라에 최루탄 등등 주로 생활필수품만 수입하며 노동자의 언덕으로 알았던 워커힐에 퇴폐를 증산하여 민족정기를 바로잡아 국민도의를 고취하고 경제를 재건한 철두철미 위대한 시체여! 해괴할 손 민족적 민주주의여! 너는 또한 뉴코리아의 무수한 유리창에서 체질마저 개악하였다.

어둡고 괴로웠던 3년 전 안개 낀 어느 봄날 새벽. 네가 삼천만 온 겨레에게 외치던 귀에도 쟁쟁한 그 역사적인 절규를 너는 벌써 잊었는가? 절망과 기아선상에서 허덕이는 민생고를 시급히 해결하겠다던 공약(空約) 밑에 너는 그러나 맨 먼저 민족적 양심세력에 대한 무자비한 탄압을 시작하였다. 그때 이미 우리는 맡았다. 너의 죽음의 저 야릇하게 피비린내 감도는 낌새를. 우리는 보았다. 죽음으로 죽음으로만 향한 너의 절망적 몸부림을. 우리는 들었다. 

우리에게 정사(情死)를 강요하는 너의 맹목적이고 소름끼치도록 무서운 목소리를. 그리고 우리는 맛보았다. 극한의 절망과 뼈를 깎는 기아의 서러움을. 시체여! 반민족적 비민주적 민족적민주주의여! 석학의 머리로서도 촌부(村夫)의 감정으로서도 난해하기만 한 이즘이여! 너의 정체는 무엇이냐? 절망과 기아로부터 해방자로 자처하는 소위 혁명정부가 전면적인 절망과 영원한 기아 속으로 민족을 함몰시키기에 이르도록 한 너의 본질은 과연 무엇이었드냐? 무엇이드란 말이냐? 말하지 않아도 좋다. 말 못하는 시체여! 백의민족이 너에게 내리는 마지막의 이 쌔하얀 수의를 감고 훌훌히 떠나가거라! 너의 고향 그곳으로 돌아가거라. 안개 속으로! 가거라 시체여! 돌아가거라! 이제 안개가 걷히면 맑고 찬란한 아침이 오리니 그때 너도 머언 하늘에서 북받쳐 오르는 기쁨에 흐느끼리라. 일찍 죽어 복되었던 네 운명에 감사하리라! 그러나 시체여! 지금 너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지금 너는 무엇을 획책하고 있는가? 바로 지금 거기서 네 옆 사람과 후딱 주고받은 그 입가의 웃음은 무엇을 뜻하고 있는가? 대량 검거의 군호인가? 최루탄 발사의 신호인가? 그러나 시체여!   우리는 믿는다. 그것은 목메이도록, 뜨거운 조국과 너의 최초의 악수인 것을! 

우리는 안다. 그것은 죽은 이의 입술가에 변함없이 서리는 행복의 미소인 것을. 시체여!

1964년 5월 20일 민족적민주주의 장례식 (주석 5)


주석
1> <한국민주화운동사연표>, 127쪽,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2006.
2> 김삼웅 편, <민족 민주 민중선언>, 41쪽, 일월서각, 1984.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시인 김지하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태그:#김지하, #시인김지하평전, #김지하평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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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이 기자의 최신기사'21세기의 서론'을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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