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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응급실에서 일하는 의사입니다. 전공의 시절부터 세어보면 15년이 얼추 되어가네요. 대학병원을 거쳐 현재는 서울의 한 준종합병원 응급실에서 일합니다.

제가 일하는 병원에서는 많이들 '응급실' 하면 떠올릴 장면들을 보긴 힘듭니다. 주위에 피가 낭자하고, 모니터 소리가 여기저기 울리고, 의식 없는 환자가 다급하게 실려 오는, 생사가 갈리는 드라마 같은 급박한 상황들을 찾아보기는 쉽지 않습니다.

119로 내원하는 환자보다는 걸어들어오는 환자가 더 많고, 119 내원 환자 중에서도 가벼운 환자 비율이 높습니다. 진단명을 봐도 심근경색이나 패혈증 같은 중증질환보다는 장염이나 감기, 염좌나 타박상 같은 경증 질환들이 훨씬 많죠.

그러다 보니 가끔 의문이 드는 때가 있습니다. 분명히 나는 응급의학과 의사이고, 이곳은 응급실인데 실제로는 비응급에 해당하는 환자들이 더 많다는 거죠. 수액이나 영양제를 맞으러 오거나 간단한 상처 소독, 감기약 처방, 오랜 만성 질환에 대한 설명을 위해 오는 경우도 많습니다. 여기가 응급실인지, 야간 외래인지, 과연 이 환자들을 응급실에서 진료하는 것이 맞는 일인지 회의가 들기도 합니다.

본인도 자신의 증상이 응급한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는 경우가 더 많은데, 왜 응급실에 내원하는 걸까요. 주간 시간에 외래를 방문한다면 훨씬 저렴한 비용을 내고 각 과의 전문의들에게 더 자세한 설명과 처치를 받을 수 있을 텐데요. 몇몇 선배들 말씀처럼 한국의 응급실 수가가 다른 나라에 비해 너무 싸서 그런 건지, 한국 사람들이 유난히 참을성이 부족하고 성격이 급해서 그런 건지, 궁금했습니다.

낮에 자유롭게 병원에 갈 수 없는 노동자들
 
아파도 일해야 하는 노동자들은, 비응급질환으로 응급실을 찾거나, 응급한 상황인데도 퇴원을 요청한다.
 아파도 일해야 하는 노동자들은, 비응급질환으로 응급실을 찾거나, 응급한 상황인데도 퇴원을 요청한다.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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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아직 잘은 모르겠습니다. 실비보험 및 응급실 의료 수가의 문제도 있을 테고, '빨리빨리'를 좋아하는 한국인의 특성도 분명히 있을 겁니다. 그렇지만 어느 순간 깨달은 것은, 생각보다 많은 사람이 병원을 낮에 자유롭게 방문하지 못한다는 겁니다. 주간에는 많은 사람이 일터에서 일하니까요.

대부분의 병원 점심시간이 직장의 점심시간과 겹치기 때문에 점심시간에 병원에 가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반차를 쓰거나 직장에 양해를 구하면 되겠지 싶지만 그게 쉽지 않은가 봅니다. 반차를 내면 되지 않냐고 물어보면 난감한 듯 웃는 환자들이 많더라고요.

제가 일하는 병원은 20~30대 환자들이 많이 내원하는데, 진료 후 추적관찰이 필요해 외래진료를 예약해야 할 때도 일 때문에 낮에는 병원에 못 온다는 환자들이 많습니다. 각자 일하는 사업장의 내부 사정을 다 알 수는 없지만, 젊은 직장인들이 눈치 보지 않고 편하게 시간을 내서 병원을 내원하기는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나이 드신 분들도 비슷한 경우가 많긴 합니다만.

응급실을 통해 입원이 필요한 경우도 그렇습니다. 입원이 필요하지만 개인 사정으로 거부하는 경우가 꽤 있는데, 대부분 직장 때문입니다. 입사한 지 얼마 안 되어 병가 내기 눈치 보여서, 내가 빠지면 근무 공백이 생기는데 대신해 줄 사람이 없어서 등등. 치료가 늦어지면 위험할 수 있는 의학적인 이유를 대면서 설득해도, 회사에 제출할 진단서를 작성해드리겠다고 말씀드려도, 생계가 걸린 문제를 넘어서기 쉽지 않습니다.

결국 설득하다 안 되면 자의 퇴원서약서라는 서류에 사인을 받고 퇴원시키게 되는데, 이 내용은 "병원에서 입원 혹은 검사/치료를 권고하였지만 내가 '자의'로 퇴원한다"라는 내용입니다. 자의라는 것은 자신의 의지라는 건데 치료가 필요한 몸으로 일 때문에 퇴원하는 것을 정말로 자의라고 부를 수 있을까요. 의료진으로서 어쩔 수 없이 사인을 받기는 하지만 이런 경우는 항상 마음이 무겁습니다.

빨리 낫고 빨리 일해야 하는 사회

80대 환자분이 새벽에 복통 및 구토로 내원하신 적이 있습니다. 복통이 심해서 CT를 찍었더니 소장에 유착이 있고 장이 늘어나 있어 금식 및 항생제 투여를 위해 입원이 필요하다 설명드리니 안 된다고 하셨습니다. 이틀에 한 번 24시간씩 교대로 아파트 경비를 하는데 오프 시간에 잠깐 오셨다며, 안 그래도 고령이라 눈치 보이는데 휴가를 내면 고용이 위험하다고, 격일로 잠깐씩 통원 치료하면 안 되냐고 부탁하셨습니다. 그때도 결국 자의퇴원서를 받았습니다.

고용되어 일하는 노동자만 그런 것은 아닙니다. 심한 어지러움 및 구토로 내원해서 전정신경염을 진단받았던 편의점 점주도 대신 근무할 사람을 구하지 못했다며 결국 무리하게 퇴원하셨고, 식칼에 인대를 다쳐 수술이 필요한 식당 사장님도 가게를 당장 비울 수 없다며 귀가 후 늦은 외래로 내원하신 적이 있습니다.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아닙니다. 당장 얼마 전 코로나 감염이 의료진 사이에서 유행했을 때, 확진되면 도저히 근무 공백을 채울 수 없을 것 같아서 검사를 미루던 동료들도 있었으니까요.

응급실에 내원해서 몸살감기인 것 같다면서 영양제를 요구하는 분들도 결국은 빠른 치료를 원해서 그런 경우가 많습니다. 빨리 나아서 빨리 일을 해야 하니까요. 원래 감기나 장염은 며칠은 아플 수 있다고 설명하면 아플 수 없다고 합니다. 당장 출근하고 공부해야 하니까요.

세균감염이 아니라도 빠른 치료를 위해 항생제를 쓰는 것, 의학적인 적응증이 아니라도 스테로이드를 쓰고 수액 치료를 하는 것이, 한국인이 유달리 무지해서가 아니라 아픈 상태에서 벗어나서 빨리 '정상적인', 노동 및 공부가 가능한 상태로 회복하려고 하는 노력의 일환이라는 것을 전문의 10년 차가 되어 느낍니다. 우리 사회는, 사회가 가벼운 질환이라고 판단하는 경우엔 더욱더, 편안한 휴식을 너그럽게 허락하지 않으니까요. 빨리 학교나 직장에서 내 몫을 해야 하는 현실이 우리를 오래 아프지 못하게 합니다.

아프면 병원에 가고, 필요한 휴식을 취하고, 적절한 치료를 받는 것이 당연한 일이겠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혹은 그럴 수 없는 상황이 많습니다. 미뤄뒀다 응급실을 찾는 대신, 적절한 시기에 적절한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사람들이 더 많아졌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마지막으로, 야간에 응급실에 오는 환자가 많아진 것은 야간근무자가 많아진 것에도 이유가 있습니다. 아무래도 깨어 있다 보면 이런저런 일이 생기기 마련이니까요. 응급실에서 일하는 저희같이 어쩔 수 없는 야간근무자가 아니라면, 다들 밤에는 푹 수면을 취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을 쓴 "응급실의사"는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회원으로 응급의학과 전문의입니다. 이 글은 한노보연 월간지 일터 5월호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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