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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 당선인이 28일 오후 충남 예산 매헌 윤봉길의사 기념관에서 참배를 마친 뒤 작성한 방명록을 작성하고 있다.
 윤석열 당선인이 28일 오후 충남 예산 매헌 윤봉길의사 기념관에서 참배를 마친 뒤 작성한 방명록을 작성하고 있다.
ⓒ 인수위사진취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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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헌 선생을 기억하고 추모하는 것은 가슴 벅차고 자랑스러운 일입니다."

윤석열 당선인은 윤봉길 의사 의거 하루 전인 28일 충남 예산군 윤봉길 의사 사당인 충의사를 찾아 참배 후 방명록에 위와 같이 남겼다. 이후 윤 당선인은 사당 앞에 모인 지지자들을 향해 "우리 대한민국 역사에 이보다 더 훌륭하고 우리가 모셔야 되고 추모하고 기억할 분이 또 있겠냐"라고 말했다.

지난해 6월 29일 서울 서초구 양재동 매헌윤봉길의사기념관에서 대선 출마 선언을 한 이래 12월 19일 서울 효창공원에서 열린 윤봉길 의사 순국 89주기 추모식 참석에 이어 윤봉길 의사 의거 90주년을 앞두고 다시 윤봉길 이름 석 자를 국민들 앞에 강조한 거다. 

일제 심장에 폭탄 던진 윤봉길 앞에서 '그랜드바겐' 강조

윤 당선인은 지난해 윤봉길기념관에서의 출마선언 직후 '한일 관계 개선 해법'을 묻는 일본기자를 향해 "지금 한일 관계는 수교 이후에 가장 열악해지고 회복이 불가능해질 정도로 망가졌다. 실용주의, 실사구시에 입각해서 해야 하는데 이념 편향적인 죽창가를 부르다 여기까지 왔다"면서 "위안부 문제나 강제 징용 문제, 한일 간의 안보협력이라든가 무역 문제 등 현안들을 전부 다 같이 하나의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논의하는 '그랜드바겐' 방식으로 문제를 접근해야 한다"라고 밝혔다. 그랜드바겐은 일괄타결을 뜻하는 정치용어다.

그는 당선 후인 지난 3월 28일 아이보시 고이치 주한 일본대사를 만난 자리에서도 이러한 입장을 반복했다. 윤 당선인은 "양국의 정치지도자, 관료, 국민들이 강력한 힘으로 양국 관계를 미래지향적으로 밀어붙이면 다른 문제들이 어려울 것 같지만 대화를 통해서 잘 해결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한 마디로 역사왜곡 문제 등으로 야기된 문재인 정부의 대일강경외교노선 대신 실용주의 노선을 택하겠다는 뜻이다. 문제는 윤 당선인이 '실용', '그랜드바겐', '미래지향' 등 단어를 써가며 한일관계 회복을 천명한 장소가 1932년 오늘(29일) 중국 상하이 홍커우공원(현 루쉰공원)에서 일제의 심장에 폭탄을 던진 윤 의사 관련 사당이나 생가터, 기념관 등이라는 사실이다.  

독립운동사 바꾼 윤 의사 의거부터 사형판결까지...
 
윤 의사 의거 사흘 전 찍은 사진. 매헌기념관 게시물 재촬영.
 윤 의사 의거 사흘 전 찍은 사진. 매헌기념관 게시물 재촬영.
ⓒ 김종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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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 의사는 의거 이틀 전인 1932년 4월 27일 두 아들에게 "너희도 만일 피가 있고 뼈가 있다면 반드시 조선을 위해 용감한 투사가 되어라"로 시작하는 편지를 남긴다. 편지에서 윤 의사는 "태극의 깃발 높이 드날리고, 나의 빈 무덤 앞에 찾아와 한잔 술을 부어라. 그리고 너희는 아비 없음을 슬퍼하지 말아라"라고 강조했다.

이틀 뒤인 1932년 4월 29일 오전 윤 의사는 상하이 원창리 13호 김해산의 집에서 백범과 식사를 한다. 백범 기록에 따르면 윤 의사는 '죽으러 가는 길'이지만 태연자약한 모습으로 마지막 식사를 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자신에게 "제 시계는 어제 선서식 후에 선생님 말씀 따라 6원 주고 산 것인데 선생님 시계는 2원짜리이지 않습니까? 제게는 이제 한 시간밖에 소용이 없는 물건"이라면서 자신의 새 시계를 꺼내 백범 시계와 바꾸자고 청한다. 그것을 마지막으로 윤 의사는 홍커우공원으로 택시를 타고 이동했다. 
 
윤 의사 의거 당시 모습
 윤 의사 의거 당시 모습
ⓒ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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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29일 오전 11시 40분, 1만 2000여 명의 일본 군경을 뚫고 중앙 무대를 바라보고 왼쪽 20m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은 윤 의사는 기미가요가 울려퍼지는 무대를 향해 4~5m 정도 뛰어 들어간 뒤 소지하고 있던 두 개의 폭탄 중 하나인 물통형폭탄을 던졌다. 천지를 진동하는 굉음이 울려 퍼졌고 이 순간 윤 의사는 "조선 독립 만세"를 외쳤다. 바로 이어 도시락형폭탄을 던지려는 순간 주변에 있던 일본 군경의 무차별적인 구타가 이어졌다. 윤 의사는 얼굴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심한 발길질을 당한 뒤 상하이 헌병대로 끌려갔다.

일제는 윤 의사에 대해 무자비한 취조를 이어갔다. 그러나 윤 의사는 분명한 목소리로 "조선인의 각성과 독립 의지를 알리기 위한 행동이었다"라고 강조한다. 일제 군사법원은 1932년 5월 25일 윤 의사에게 살인과 살인미수, 폭발물단속벌칙위반 등의 이유로 사형을 선고한다.

그럴 것이 윤 의사의 의거로 당시 사망하거나 다친 인물들은 말 그대로 일제 군부와 정계를 이끄는 핵심 중 핵심이었다. 상하이 파견군 총사령관 시라카와 요시노리를 비롯해 상하이 일본거류민단장 가와바타 사다지 등이 사망했다. 제3함대 사령관 노무라 기치사부로 중장은 실명했고, 제9사단장 우에다 겐키치 중장은 다리를 절단했다.

주 중국공사 시게미쓰 마모루는 오른발이 잘렸다. 특히 시라카와 요시노리의 죽음에 열도가 충격에 빠지는데, 그는 일본 육사를 수석 졸업한 뒤 중국 주둔군 사령관을 거쳐 일본 육사 학교장, 제11사단장, 제1사단장, 육군성 차관, 관동군사령관, 일본 육군대신을 지낸 일제 군부의 영웅이자 최고위직 중 최고위직이었기 때문이다.

일제, 시라카와 요시노리 사망 시간 맞춰 윤 의사 총살
 
1932년 12월 19일, 윤봉길 의사의 순국 직후 장면을 촬영한 사진. 미간의 관통 자국이 선명하다.
 1932년 12월 19일, 윤봉길 의사의 순국 직후 장면을 촬영한 사진. 미간의 관통 자국이 선명하다.
ⓒ (사)매헌윤봉길의사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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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형 판결은 진즉에 나왔지만 일제는 윤 의사 처형을 미룬다. 의거를 기획했다고 알려진 백범에 대한 체포가 이뤄지지 않았고, 무엇보다 윤 의사를 공개처형할 경우 한국인들을 자극해 더 거대한 항일투쟁이 일어날 것이 우려됐기 때문이다. 결국 윤 의사는 1932년 11월 18일 중국 상하이를 출발해 고베를 거쳐 오사카로 이감된다. 일본은 윤 의사의 구금장소로 오사카성에 있는 육군 위수형무소를 선정한다. 이곳은 임진왜란을 일으킨 도요토미 히데요시 신사 바로 뒤쪽이다. 윤 의사는 이곳에서 한 달 정도 구금된 뒤 1932년 12월 18일 가나자와로 이송된다. 의거를 일으킨 상하이도, 구금된 오사카도 아닌 가나자와를 택한 건데, 여기엔 일제의 비열한 의도가 숨어있다.

가나자와는 윤 의사 의거 당시 중상을 입은 우에다 중장이 이끌던 9사단의 사령부가 자리한 곳이다. 9사단은 청일전쟁과 러일전쟁 때 앞장서서 한반도를 유린한 부대이기도 하다. 1932년 당시 상하이 점령군으로서 중국에 주둔하고 있었다. 이 부대의 심장에 윤 의사가 폭탄을 던진 것이다. 일제는 복수 차원에서 윤 의사를 가나자와까지 끌고와 죽음을 맞게 했다.

놀라운 일은 일제가 선택한 윤 의사 순국 시간이다. 12월 18일 가나자와성 위수구금소에서 생의 마지막 밤을 보낸 윤 의사는 다음날 오전 6시 기상한 뒤 6시 30분 헌병 대장 지휘 아래 구금소를 출발해 오전 7시 15분께 가나자와 교외 미츠코지산 육군작업장 서북쪽 형장에 도착한다. 그리고 정확히 15분 뒤인 오전 7시 30분께 십자형틀에 양손이 묶인 채 미간에 총상을 입고 순국한다.

굳이 이 시간에 맞춘 것은 윤 의사의 폭탄 투척으로 치명상을 입은 시라카와 요시노리가 중국 시간 오전 6시 30분께 사망했기 때문이다. 1시간 시차를 고려해 윤 의사의 사망 시간을 맞춘 거다. 이는 안중근 의사의 사형집행 시간을 이토 히로부미 사망 시간과 맞춘 것과 동일하다. 윤 의사 순국지는 현재도 일본 육상자위대의 주둔지인 탓에 일반인의 출입이 철저하게 통제된 상태다.
 
윤봉길 의사 암장지. 윤 의사는 1932년 12월 19일 이곳에 암장됐다. 일제는 복수 차원에서 윤 의사 유해를 쓰레기장 옆에 봉분 없이 가매장했고, 사람들로 하여금 밟고 다니게 만들었다.
 윤봉길 의사 암장지. 윤 의사는 1932년 12월 19일 이곳에 암장됐다. 일제는 복수 차원에서 윤 의사 유해를 쓰레기장 옆에 봉분 없이 가매장했고, 사람들로 하여금 밟고 다니게 만들었다.
ⓒ 김종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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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이후에 발생했다. 윤 의사에게 복수를 가한 일제는 윤 의사 시신을 노다산 육군묘지에 암매장한다. 그런데 이 장소가 쓰레기처리장으로 이어지는 길목이었다. 일제는 복수 차원에서 육군묘지를 방문한 유족들이 성묘 후 쓰레기를 버리러 갈 때 윤 의사의 유해를 밟고 가도록 만들었다. 결국 윤 의사 유해는 광복 후인 1946년 3월 임시정부 유해발굴단과 재일본조선인연맹 소속 청년들에 의해 발굴될 때까지 무려 13년 4개월 동안 모욕을 당했다. 

윤 의사의 유해는 이봉창, 백정기 의사의 유해와 함께 1946년 6월 고국으로 돌아왔고 백범에 의해 일제가 훼손해 없었던 서울 효창원 문효세자(정조 아들)의 묘터에 묻혔다. 백범은 삼의사 묘역 아래 '유방백세(流芳百世)'라는 글자를 새겼다. 향기가 백대에 걸쳐 흐른다는 뜻이다.

윤 의사가 암장됐던 장소에는 현재 윤봉길의사 순국기념비와 '장부출가생불환'이 새겨진 비석이 세워져 있다. 그 위에 손바닥만 한 윤 의사 흉상도 자리해 있다. 장부출가생불환은 윤 의사가 거사 전 남긴 문구로 "장부는 거사를 위해 집을 나가면 살아서 돌아오지 않는다"는 말이다. 1932년 12월 19일 순국 직전 윤 의사는 최후의 말을 묻는 일본군의 질문에 "더 할 말 없다. 이대로 빨리 집행하라"라고 잘라 말했다. 이미 폭탄 투척 의거를 통해 독립전쟁 선포로서의 의미를 다했다 판단한 것이다. 

실제 윤 의사 의거 후 중국 장제스 정부의 지원 속에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보다 주도적으로 항일 독립운동을 이끈다. 이를 바탕으로 1945년 8월 해방을 맞는다.

정부는 29일 오전 서울 서초구 윤봉길의사기념관에서 윤 의사 의거 90주년 기념식을 진행했다.
 
윤봉길 의사 암장지. 윤 의사는 1932년 12월 19일 이곳에 암장됐다. 일제는 복수 차원에서 윤 의사 유해를 쓰레기장 옆에 봉분 없이 가매장했고, 사람들로 하여금 밟고 다니게 만들었다.
 윤봉길 의사 암장지. 윤 의사는 1932년 12월 19일 이곳에 암장됐다. 일제는 복수 차원에서 윤 의사 유해를 쓰레기장 옆에 봉분 없이 가매장했고, 사람들로 하여금 밟고 다니게 만들었다.
ⓒ 김종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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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봉길 의사 암장지. 윤 의사는 1932년 12월 19일 이곳에 암장됐다. 일제는 복수 차원에서 윤 의사 유해를 쓰레기장 옆에 봉분 없이 가매장했고, 사람들로 하여금 밟고 다니게 만들었다.
 윤봉길 의사 암장지. 윤 의사는 1932년 12월 19일 이곳에 암장됐다. 일제는 복수 차원에서 윤 의사 유해를 쓰레기장 옆에 봉분 없이 가매장했고, 사람들로 하여금 밟고 다니게 만들었다.
ⓒ 김종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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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조팀 취재기자. 오늘도 애국하는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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