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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일 서울 서초구 서울성모병원 장례식장에 고 한승헌 전 감사원장의 빈소가 마련돼 있다.
 21일 서울 서초구 서울성모병원 장례식장에 고 한승헌 전 감사원장의 빈소가 마련돼 있다.
ⓒ 청와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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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변호사로서 민주화투쟁에 앞장선 한승헌 변호사(전 감사원장)가 4월 20일 타계했다. 온갖 고초를 겪으면서도 군사독재 정권에 맞서 투쟁한 한 변호사의 삶은 앞으로도 오랫동안 기억될 것이다. 동시에 학문적인 연구도 이뤄져야 할 것이다. 그만큼 한승헌 변호사의 활동은 중요한 의미가 있다.

그 같은 관점에서 필자는 '김대중납치사건 진상규명'과 관련한 한승헌 변호사의 활동이 제대로 알려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선 이 활동은 한국과 일본의 양심적인 인사들이 공동으로 참여한 '국제연대'라는 점에서 한국의 시민사회 운동에 있어 중요한 의미가 있다. 또한 이로써 한일 양국 정부에 의해 은폐된 김대중납치사건의 재공론화에 성공했다. 

'김대중선생납치사건 진상규명을 위한 시민의 모임' 결성의 의미
 
1993년 9월 15일 김대중 납치사건 일본 측 진상조사위원회의 덴 히데오 참의원이 방한했을 때의 사진. 김대중, 김대중 좌측에 덴 히데오 참의원, 덴 히데오 좌측에 한승헌 변호사.
 1993년 9월 15일 김대중 납치사건 일본 측 진상조사위원회의 덴 히데오 참의원이 방한했을 때의 사진. 김대중, 김대중 좌측에 덴 히데오 참의원, 덴 히데오 좌측에 한승헌 변호사.
ⓒ 연세대학교 김대중도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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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년 8월 8일 일본 도쿄에서 발생한 김대중납치사건은 매우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한일관계에도 매우 큰 영향을 줬다. 그런데 이 사건의 진상이 밝혀질 경우 한일 양국 정부 모두에 큰 부담이 될 수 있었다.

결국 양국 정부는 진상규명, 책임자 처벌, 피해복구 등의 조치를 취하는 대신 소위 '정치 결착'을 통해 이 사건을 봉합해 버렸다. 이 때문에 이 사건은 결국 완전한 해결을 하지 못한 채 현재에 이르게 된 것이다.

이와 같은 한일 양국 정부 조치에 대한 비판은 각국 내부에서 모두 나왔다. 그런데 정도에 있어서는 큰 차이가 있었다. 자유로운 분위기였던 일본에서는 사건 직후부터 진상규명을 위한 활동이 매우 활발하게 전개됐다. 그런데 당시 한국은 유신 정권이 철권통치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제대로 된 공론화가 이뤄질 수 없었다.

1987년 민주화 이후 한국에서도 민주화·자유화의 물결이 밀려 들어왔지만 이 사건에 대한 공론화는 여전히 어려웠다. 국제적으로 민감한 사안이라는 점도 영향을 줬는데 무엇보다 사건 피해 당사자인 김대중이 야당의 리더로서 활동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제약 요인으로 작용했다.

결국 김대중이 정계 은퇴를 하고 김영삼 문민정권이 들어선 1993년에 이 사건 공론화를 위한 조건이 갖춰졌다. 이 해는 납치사건 발생 20년이기도 했다. 이렇게 해서 9월 10일에 한승헌 변호사가 공동위원장을 맡은 '김대중선생납치사건 진상규명을 위한 시민의 모임'이 결성돼 이 사건에 대한 민간차원의 조사가 본격화됐다.

이미 일본에서는 사건발생 직후인 1973년 '동경변호사회 김대중사건 진상조사위원회'가 구성된 바 있으며 1984년 1월엔 '김대중씨 납치사건 진상조사위원회'가 만들어졌다. 그리고 1993년 한국에서 새롭게 모임이 결성되자 일본에서는 1994년 3월에 '김대중씨 사건의 해결을 촉구하는 모임'이 결성됐다. 
  
‘김대중 선생 납치사건 진상 규명을 위한 소견서’ 발표할 때의 모습. 1993년 11월 24일, 좌측에 서서 발표하는 인물이 한승헌 변호사.
 ‘김대중 선생 납치사건 진상 규명을 위한 소견서’ 발표할 때의 모습. 1993년 11월 24일, 좌측에 서서 발표하는 인물이 한승헌 변호사.
ⓒ 연세대학교 김대중도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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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승헌 변호사의 역사적 기여
  
한승헌 변호사는 이 모임을 주도하면서 이 사건의 공론화에 크게 기여했다. 이 사건에 대한 공론화는 한일 양국 사이에 역사적인 시간 차이가 있었다. 일본에서는 사건 직후부터 큰 관심의 대상이 돼 여러 가지 내용들이 밝혀지고 했기 때문에 1993년에는 오래된 과거 사건으로 점점 묻히는 경향이 있었다.

반면 한국에서는 제대로 공론화가 되지 못한 채 20여 년이 흘러갔고 야당 지도자가 직접 피해 당사자였기 때문에 정치적으로 곡해되는 현상까지 있었다. 그렇다 보니 사건에 대한 객관적인 지식과 이해가 매우 부족한 상황이었다. 그래서 한승헌 변호사의 활동은 일본과 한국에서 이 사건에 대한 재공론화에 크게 기여했다. 
 
1994년 3월 7일, 김대중 납치사건 해결을 위한 한일 양측 대표들이 무라야마 도미이치 일본 사회당 당수(1994년 6월에 일본 총리가 됨)를 만났을 때의 사진. 가운데가 무라야마 도미이치 사회당 당수, 좌측에 한승헌 변호사.
▲ 무라야마 도미이치 일본 사회당 당수를 만났을 때의 모습 1994년 3월 7일, 김대중 납치사건 해결을 위한 한일 양측 대표들이 무라야마 도미이치 일본 사회당 당수(1994년 6월에 일본 총리가 됨)를 만났을 때의 사진. 가운데가 무라야마 도미이치 사회당 당수, 좌측에 한승헌 변호사.
ⓒ 연세대학교 김대중도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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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뿐만 아니라 민간차원의 조사이기 때문에 여러 가지 근본적인 제약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매우 중대한 성과를 냈다. 그동안 한일 양국에서 수집한 자료를 체계적으로 정리했고, 추가적으로 새로운 자료도 수집했다. 또한 그에 기초한 조사 및 연구도 진행해 이 사건을 객관적으로 정리하고 연구의 기초를 확립하는 데에 크게 이바지했다.

그 성과가 1995년 9월 발간된 '김대중납치사건의 진상'이라는 연구자료집이다. 이 책에는 그동안 수집한 사건 관련 각종 자료(문헌, 사진, 증언 등)가 총 망라돼 있다. 이 책은 이 사건의 실체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기본 자료로서 나침반 역할을 한다.

그렇게 볼 때 한승헌 변호사가 주도한 '김대중선생납치사건 진상규명을 위한 시민의 모임'은 김대중납치사건에 대한 재공론화를 이뤄내고 이 사건의 역사적 사실을 규명하는 데에 큰 역할을 했다.

필자는 이와 같은 한승헌 변호사의 활동이 제대로 알려지는 것이 필요하다고 본다. 특히 양심적인 한일 시민사회 사이의 교류와 연대의 역사는 한일관계 개선 및 동북아 평화에 있어서도 중요한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덧붙이는 글 | 사회학 박사이며 김대중을 연구하고 있습니다. 김대중에 대한 재평가를 목적으로 한 김대중연구서인 '성공한 대통령 김대중과 현대사'(시대의창, 2021)를 썼습니다.


태그:#한승헌, #김대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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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학 박사이며 연세대학교 김대중도서관에서 사료연구 업무를 담당하고 있습니다. 김대중에 대한 재평가를 목적으로 한 김대중연구서인 '성공한 대통령 김대중과 현대사'(시대의창, 2021)를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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