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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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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에도 이렇게 더웠던가? 매번 돌아오는 계절마다 '입을 옷이 없다'라고 느끼는 것처럼 매번 돌아오는 여름마다 처음 보는 더위인 듯, 적응이 안 된다. 어디까지나 내 느낌적인 느낌이라면 좋으련만, 올여름 더위는 정말 난생처음 겪는 센 더위, 너무나 막강하다.

더위 탓인지, 뭘 해도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 일만 손에 잡히지 않는 것이 아니라 정신 자체가 몽롱하니 마음이 어딘가에 붕 떠 있는 것 같은 시간이 계속되고 있다.

솔직히 더위 따위, 제까짓 게 더우면 얼마나 더우랴 겁이 나지 않았었다. 체질적으로 더위를 잘 타지 않는 편이었고 무엇보다 땀 흘리는 걸 좋아했다. 에어컨의 상쾌함과 시원함이야 물론 좋아하지만, 그 서늘한 찬바람에 늘 속수무책으로 '냉방병'을 얻었다. 나는 에어컨을 그다지 사랑하진 않았다.

그런데 웬걸. 이번 여름은 내 취향 따위, 더위에 대한 철학 따위 아랑곳하지 않는 진짜 찐 더위다. 혼자라면 참을 만한 더위겠는데, 나는 혼자가 아니니 그것이 더욱 문제다. 마침 코로나 4차 유행이 막 퍼지고 있는 시점과 기가 막히게 딱 맞아떨어져 아이들의 원격수업과 함께하게 된 시간. 더위와 코로나와 원격수업의 3중고가 올여름 태풍보다 먼저 나를 강타했다.

더위와 싸우는 나는 차라리 행복하다 

코로나 때문인지 역대급 더위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정말 밖에는 눈에 띄게 사람이 줄었다. 거리에도 실내에도 사람이 없다. 하긴 하늘에서 내리꽂히는 햇살을 보면 신으려던 신발도 슬그머니 벗고 싶어지니 그럴 만도 하다. 그런데 덥다고 손 놓고 부채질만 할 수는 없지 않나. 더위를 피하기 위해서라기보다, 더위를 잊기 위한 무언가를 해야 했다.

먼저 몸을 바삐 움직여봤다. 세상에 맛있는 건 많고 모름지기 사람은 먹어야 사는 법. 나는 걸어서 갈 수 있는 테이크아웃 음식점에 부지런히 발품을 팔기 시작했다. 포장 음식이든 커피든 사러 다녀오면 이미 땀범벅이 된다는 것이 좀 난감했지만 그래도 뭐 일단 땀을 빼고, 시원한 콩국수나 혀끝에 맴도는 향긋한 라떼를 만끽한 후엔 그럭저럭 에어컨 바람에 더위도 잠시 잊혔으니 땀이 나도 오케이.

다만 이 방법은 지속 가능성에 있어 상당히 취약하다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다. 버거운 더위 탓에 나가기를 포기한 나는, 자연스레 배달 음식에 올인하게 되었다. 펄펄 끓는 더위에 뜨거운 조리대 앞에서 음식을 끓이고 지지고 볶는 것은 한마디로 못할 짓(?)이 아닌가.

지난 코로나 시대를 거치면서도 꿋꿋하게 배달 앱을 깔지 않고 버텼는데, 코로나보다 무섭다는 이번 더위에는 어쩌지 못하고 배달 앱에 의지해서 보내는 중이다. 덕분에 더위에 치솟는 불쾌지수와 함께 우리 집의 엥겔지수도 맹렬히 치솟고 있다.

그런데 그렇게 무섭던 에어컨을 달고 살고 있고, 땀도 무진장 흘려보고, 배달음식으로 조리대와 거리 두기도 실천하면서, 찬 음식으로 더위를 이겨보려 안간힘을 쓰고 있지만, 사실 요즘 우리 딸을 보고 있자면 더위와 씨름하는 내가 오히려 호사스럽게 느껴진다.  
 
시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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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여름을 더욱 뜨겁게 달굴, 더위보다 막강한 열기가 있다는 것을 꿈에도 몰랐던 나는 여름방학을 목전에 둔 어느 날부터 쏟아지는 문자 폭탄에 비로소 예비 고1의 열기를 실감했다.

무더위만큼이나 뜨거운 것이 예비 고1을 바라보는 학원가의 러브콜이라는데, 내 개인 정보를 어찌 알고들 중3 학부모에게 그렇게도 학원 문자들이 쏟아지는지... 족히 하루에 30통은 받고 있는 것 같다. 문자 알람이 시끄러운 정도로 봐서 '뭔가 해야 될 때'라는 것은 알겠는데, 짧은 여름방학에 역대급 무더위에 코로나 4차 유행까지 겹쳤으니 '대략난감' 하다는 것은 이럴 때 쓰라고 만든 말인 듯했다.
  
아직 수험생도 아닌 중3 아이에게 예비 고1이라는 타이틀을 덧씌워 수험생이라는 울타리에 가둬버리는 것이 과연 부모가 할 짓인가 싶은 마음에 정신이 번쩍 들다가도, 첫째 아이라 남들 다 하는 일에 빠질 용기도 없어 서둘러 학원 등록을 마쳤다.

"고1이 되기 전에 내가 사라졌으면 좋겠어"

2분 안에 마감된 학원에 어렵사리 등록을 마치고 주말 아침 일찍 등원을 시키러 나가보니, 그 아침에 돌아다니는 아이들 대부분이 커다란 백팩을 멘 중고등학생들이다. 이 더위에도 하나같이 두꺼운 겉옷을 하나씩 손에 들고 추운 에어컨 바람 속으로 걸어들어가는 뒷모습들을 보는 마음이 참으로 덥디 더웠다.
  
코로나 4차 유행이 와도 역대급 무더위가 덮쳐도 아이들은 당장 학원에서 배우는 수열이, 미적분이 너무 어렵다는 것이 가장 커다란 고민이란다. 이제 예비 고1이 된 아이가 가끔 지나가는 말로 나를 오싹하게 할 때면 호러가 따로 없다.
  
"예비 고1 너무 싫어. 나는 아직 중학생인데. 학원에서는 우리를 이제 중학생이라고 부르지 않아. 지금 성적이 수능 성적이래. 말이 돼? 진짜 고1이 되기 전에 내가 사라졌으면 좋겠어."

아닌 게 아니라 올여름부터는 중3 아이들이 모두 고등관으로 이관된 상태다. 군기가 바짝 들어 공부시키기 좋다는 학원 원장 선생님의 말이 모두 틀린 것은 아니지만, 이 더위에 영혼까지 끌어모아 학원에 앉아 있을 아이들이 안쓰럽기만 하다. 대체 고1이 뭐라고.

이 아이들은 2021년의 역대급 더위를 어떻게 기억할까? 아마도 입반 테스트의 뜨거운 열기로 기억하지 않을까? 홍길동도 아닌데 더위를 더위라 부르지 못하고, 중3을 중3이라 부르지 못하는 아이들의 퍽퍽한 마음, 그 상상만으로도 이미 등 뒤가 서늘하다.
  
이 더위에 터벅터벅 학원으로 걸어 들어가는 아이의 뒷모습을 보고 결심했다. 이번 방학에는 아이가 유튜브를 끼고 살아도 에어컨과 한 몸이 되어 늘어져 있어도 잔소리를 하지 않겠다고(과연 마음먹은 대로 될까 싶지만). 그것만이 아이도 나도 이 무더운 여름을 나는 유일한 방법이 아닐까 싶다. 일단, 마음의 열기라도 가라앉히자.

태그:#역대급무더위, #에어컨과한몸, #예비고1의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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