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모두가 늙었으나, 늙기 싫어하는 세상

"아, 이제 나이가 들었나 봐"라는 말이 자신도 모르게 튀어나오는 순간이 있다. 대부분은 깊은 한숨과 함께다. 혹은 자조적인 웃음과 함께. 이윽고 "몸이 예전 같지 않다"는 문장이 세트처럼 뒤따른다.

많은 이들이 30대, 아니 20대 후반에도 그런 말을 한다. "대학 시절 아무리 마셔도 취하지 않더니 이제는 술을 조금만 마셔도 머리가 띵하다"는 근거를 들 때도 있다. 가끔 방송에서 꽃처럼 화사하기만 한 여배우가 "저도 30대 중반이 되니 몸이 예전 같지 않아요"라는 말을 하는 걸 보면 '저렇게 예쁜데, 늙었다고?'라고 반문하며 괜한 앓는 소리로 치부할 때도 있다.

이렇게 너도나도 노화를 말하는 것을 듣다 보면 문득 의문이 생긴다. 사람들이 20대 후반부터 자신이 '늙었다'고 느낀다면, 인생 중 '안 늙은' 시기는 도대체 언제라는 것인가. 태어나서 20대까지를 빼면 나머지 모두가 늙었다는 것인가? '늙었다'는 표현은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것인데 평균 인생 80년 중 3분의 1밖에 안 되는 초기 30년이 그 기준이 되고 나머지는 다 늙은 것인가?

한껏 양보해서, 본격 노화가 일어나는 나이를 40대라고 정한다고 해도, 인생 후반의 절반 이상을 모두 '늙은 나이'라고 부른다면 그건 너무나 긴 시간이 아닐까? 초기 3분의 1은 '어린 나이', 그 후 3분의 1은 '안 늙은 보통 나이' 마지막 3분의 1을 '늙은 나이'라고 부른다면 차라리 이해가 더 될 수도 있다.  

또 한 가지 모순적인 부분은 사람들이 30대만 돼도 자신의 나이 듦을 '인지'하지만 정작 자신의 노화를 자연스럽게 '인정'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이다. 노화의 증상을 지극히 싫어하며 심지어 나이가 들었다는 자체만으로 혐오하기까지 한다(그 주체가 타인일 때나 자신일 때나 마찬가지다).

원래 나이'보다' 젊어 보이거나 나이에도 '불구하고' 활발한 활동을 하는 사람에게 열광하고 자신도 '나이답지 않게' 보이려 노력한다. 이쯤 되면 사람들이 그토록 자주 노화에 대해 언급하는 것이 나이 듦에 대한 지나친 경계심의 증거라 해석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나이들며 자연스럽게 생기는 노화라는 현상을 사람들은 알고도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나이들며 자연스럽게 생기는 노화라는 현상을 사람들은 알고도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 픽사베이

관련사진보기


늙는 것은 당신 탓이 아니다

미국의 노인학과 의사인 루이스 애런슨은 노년에 대한 의학적, 사회학적 내용을 다각도로 담은 그녀의 저서 <나이듦에 관하여(Elderhood)>에서 "의학적으로 노화란 태어날 때부터 시작해서 죽을 때까지 이어지는 것"이라고 했다.

우리가 어린아이의 '성장'이라고 알고 있는 것이 의학적으로는 노화에 포함되는 것이고 인간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지속적으로 늙고 있다는 것이다. 즉, '늙은 나이'라는 것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인생 자체가 노화의 과정'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심플한 사실을 이해하고 나면, 나이가 든다는 것이 싫을 이유는 그다지 많지 않다. '모든 사람은 죽는다'는 변치 않는 진리만큼이나 분명한 사실은 '노화를 늦출 수는 있어도 없앨 수는 없다'는 것이므로. 사람은 그저 당연히, 자신의 나이만큼 늙어간다는 사실을 인정만 해도 마음이 좀 편해진다.  

그럼에도 왜 우리는 늙는 게 싫을까? 루이스 애런슨은 그것이 개인의 문제가 아닌 사회 문제라고 말한다. 수명이 짧았던 시절과 달리 이제는 50대 이상 중년과 노년은 인생의 3분의 1을 차지하는 비중 있고 중요한 시기인데, 그럼에도 이 사회는 아직 이들을 맞이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는 것이다.

미디어에는 젊고 건강한 이들이 주로 등장하여 서로의 외모에 대한 찬사를 쏟아내고, 디지털 기술 개발이 속도를 내며 그를 뒤쫓지 못하면 도태되는 분위기로 인해 나이가 들어 자연스럽게 민첩성이 떨어지는 노화라는 현상은 전혀 배려받지 못하게 된다.

인구의 3분의 1, 아니 조만간 절반 이상이 될 50대 이상을 위한 세상을 맞이하기에 아직도 사회는 준비가 덜 되어 있다. 그러다 보니 나이든 사람은 이런 사회에서 살아가며 불편을 느낀다. 그리고는 나이 든 자신을 탓한다. 사회가 문제지, 개인의 문제가 아닌데도 말이다. 

이런 점을 이해한다면, 나 자신이 늙고 있다는 느낌 자체로 자괴감을 느낄 필요는 없다. 물론 질병이 생겨 고통이 동반하는 경우에는 그 고통을 최소화하기 위한 의학적, 사회적 돌봄이 있어야 하지만, 질병이 있어도 마음이 건강한 노년도 얼마든지 있다. 루이스 애런슨이 한 환자를 사례로 들며 책에서 한 말을 거칠게 요약하자면 이렇다. 

'사람이 새로운 도전의식, 그에 따른 생명력을 느끼는 것은 정말 의외의 상황에서다. 한 환자는 질병으로 시력을 거의 잃어갈 무렵, 좌절감에 빠져 시각장애인 적응 프로그램에 참여했다. 그런데 그의 딸은 그가 사망한 후 이렇게 말한다. 아버지가 눈이 안 보였던 기간은 아버지의 가장 행복하고 찬란했던 시기였을 것이라고. 환자는 눈이 안 보였지만, 눈이 보였을때 전혀 체험하지 못했던 새로운 경험을 통해, 진정 살아있음을 느끼다가 세상을 떠났다.'

인생의 모든 경험에는 모종의 기쁨과 희열이 있을 수 있다. 그것이 일반적인 기준으로 봤을 때 건강하지 못하고 성공하지 못한 경험이라 할지라도 개인적으로는 오감으로 체험하는 온전한 새로움과 기쁨일 수 있다.

<나는 죽을 때까지 재미있게 살고 싶다>의 저자 이근후는 왼쪽 눈의 시력을 완전히 잃고 일곱 가지 병과 함께 살아가면서도 누구보다 즐겁고 재미있게 노년을 보냈다고 한다. '최선을 다하지 말고' '자유롭게 살아라'는 것이 그의 말이다. 내 맘 같지 않게 말을 안 듣는 내 몸에 대해 한탄하기 보다 그저 노화와 질병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이고 나 자신을 사랑하는 마음을 먹는다면 고통의 극복은 훨씬 수월할 수 있다.  

아무리 노화를 막으려 운동하고, 영양제를 먹고, 예방적 시술을 받는다고 해도 노화는 결국 오고야 만다. 그리고 결국 그 노화가 왔을 때, 자책하지 말아야 한다. "내가 어떻게 인생을 잘못 살았기에 벌써 이렇게 늙나, 이런 병이 내게 오나"하는 자책은 그 질병의 치료를 더 힘들게 할 뿐, 아무런 이득도 주지 못한다.

노화는 그저 나이가 들면서 다가오는 것일 뿐, 당신의 잘못이 아니다. 그 치료를 위해 다소 고통이 따른다면 그 고통을 견뎌내는 자신을 위로하고 감싸주는 것이 최선이다. 절대 책망하고 슬퍼하지 말기를. 왜냐하면 당신이 겪는 고통이란, 이 세상 모두가 그 나이쯤 되면 겪게 될 매우 자연스러운 노화의 증상 중 하나이므로.

덧붙이는 글 | 개인 브런치에도 실립니다.


태그:#노화, #웰에이징, #나이듦, #인생후반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그런 엄마가 있었다> 작가. 문화, 육아, 교육 분야의 잡지에서 기자로 일했다. 결혼 후 힘든 육아와 부모의 질병을 겪으며 돌봄과 나이듦에 관심 갖고 사회복지를 공부한다. 소중한 일상, 인생, 나이듦을 이야기한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