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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후 청주형무소는 충청북도 청주시 탑동에 위치했으며 직원이 140명이었고 재소자 수용가능 인원은 500여 명이었다. 하지만 1948년 정부수립을 전후로 청주형무소는 수용인원을 초과했다. 청주형무소의 수용인원은 계속 증가해 1950년 한국전쟁 발발 당시 약 1600명으로 3배 이상 증가했다. 결국 이들을 모두 감방에 수용할 수 없어 공장 하나를 비워 임시감방을 만들고 그곳에도 재소자들을 수용했다.

"40도가 넘는 형무소, 시루에 떡을 찌듯 더웠다"

당시 청주형무소 형무관으로 근무했던 홍아무개는 지난 2009년 필자가 몸담았던 진실화해위원회(아래 진실위)에서 한국전쟁기 청주형무소의 열악한 상황을 이렇게 진술했다.
 
수용인원이 워낙 많다보니 재소자들은 미결사, 기결사 가릴 것 없이 꽉 조여 앉기도 힘든 좁은 공간에서 잠을 자야 했다. 다리를 뻗고 잔다는 건 상상도 못했다. 교대로 잠을 자거나 심지어는 감방 안에 줄을 맨 후 양쪽에 다리를 들어 그 줄에 오금쟁이(무릎 뒤쪽)만 걸친 채 서로 엉덩이를 맞대고 자기도 했다. 감방 안에 하지가 지난 여름철이라 원래 무더운 때이기도 했거니와 그 많은 사람들의 체온에서 뿜어 나온 열기로 달구어져 섭씨 35도에서 40도를 웃돌기 일쑤였다. 그야말로 시루에 떡을 찌듯 더웠다.

한편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이승만 정권의 내무부 치안국은 충북경찰국에 관변단체인 보도연맹원을 검거 후 처단하라고 명령했다. 그리고 충북경찰국은 청주경찰서 등 각 경찰서와 산하 각 지서로 이 지시를 내렸다.

그 결과 경찰은 청주와 청원지역의 보도연맹원을 피난시킨다며 보도연맹원들에게 양식, 용돈과 옷을 챙겨서 청주경찰서에 집합하라고 지시했다. 이승만의 처단 지시를 몰랐던 보도연맹원들은 평소에도 경찰서에서 소집이 있어서 아무 의심 없이 청주경찰서로 모여들었다. 그리고 이렇게 모인 보도연맹원 400여 명이 1950년 7월 5일 청주경찰서를 거쳐 청주형무소에 수감되었다.

이어서 군이 중심이 되어 청주형무소 재소자와 형무소에 일시 수감된 보도연맹원에 대한 이승만 정권의 총살명령이 내려졌고, 총살집행에 대한 지휘는 충북지구 방첩대 CIC가 담당했다.

1950년 6월 28일부터 청주형무소에서는 면회는 물론 차입도 금지되었다. 더구나 형기를 다 마친 만기출소자들도 석방시키지 않았다. 그러자 재소자 가족들이 형무소 앞으로 몰려와 왜 형기를 마친 만기출소자들도 석방하지 않느냐고 항의를 하며 아우성을 쳤다. 이에 청주형무소에서는 1950년 7월 1일부터 아예 형무소 앞의 통행조차 금지시켜버렸다. 
 
 "1951년 4월 대구형무소 인근에서 벌어진 총살. 감독하던 미군이 촬영했는데 희생자들은 재판에 의해 1심만으로 사형 확정된 민간인들로 보인다. 이 사진은 집행 방식의 반인륜성도 명확히 보여 주는데, 이러한 방식의 처형은 누가 어디에서 어떻게 죽었는지 알 수 없게 만드는 방식이었다."
 1951년 4월 대구형무소 인근에서 벌어진 총살. 출처: 미국국립문서보관소(NARA)
ⓒ 진실화해위원회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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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충북지구 CIC와 경찰은 1950년 6월 30일 밤 자정 경 청주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던 여순사건 관련 재소자 36명을 충청북도 청원군 남일면 화당리 화당다리에서 학살했다. 당시 총살을 목격했던 화당리 주민 이아무개는 "경찰이 트럭 두 대로 재소자 40여 명을 싣고 와서, 개울 밑에 쭉 세워놓고 총을 쐈다. 그런데 동네와 너무 가까우니까, 한 번 오고 다음에는 분터골 등 다른 곳으로 데리고 가서 죽였다"며 지난 2009년 진실위에서 증언했다.

1950년 7월 2일부터 본격적으로 청주형무소 재소자들에 대한 이승만 정권의 학살이 전개되었다. 먼저, 충북지구 CIC의 지휘 하에 헌병대가 포승줄을 가득 싣고 와서, 남아 있던 여순사건 관련 재소자 24명과 잔여형기가 긴 재소자들의 인도를 요구했다. 이에 청주형무소 형무관들이 일반사범과 정치ㆍ사상범을 분류했다. 그리고 형무관들은 정치·사상범들을 포승줄로 묶고 이들을 학살지인 청원군 고은리 분터골 등으로 호송했다.

이어서 충북지구 CIC 지휘 하에 헌병대와 기동대를 중심으로 한 충북도 경찰국과 청주경찰서 경찰 등은 청주형무소의 전체 재소자 중 절반 이상인 800명 이상의 정치·사상범들을 1950년 7월 2일부터 7월 5일까지 4일 동안 청원군 남일면 쌍수리, 남일면 고은리 분터골, 낭성면 도장골, 그리고 가덕면 공원묘지 등으로 강제로 끌고 가 학살했다.

그리고 CIC 지휘 하에 청주경찰서 경찰 등은 청주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던 400여 명의 보도연맹원들을 1950년 7월 6일과 7월 7일에 청원군 남일면 고은리 분터골에서 학살했다. 당시 분터골에서 총살집행을 목격한 임아무개는 지난 2009년 진실위에서 그때 장면을 이렇게 회고했다.

"계급장도 없는 군복 입은 사람들이 학살 자행"
 
재소자를 죽일 때는 하루 트럭 2~3대씩 이틀 실려 왔다. 그리고 그 다음날부터는 사복 입은 보도연맹이 트럭이 5대씩 3일 동안 계속 실려 왔다. 청주경찰서 경찰, 간수, 계급장도 없는 군복 입은 사람도 왔어. 하여튼 이 고개 너머하고 해서 천여 명은 죽었다.
 
그럼 그때 그곳에서 이승만 정권에 의해 학살당한 천여 명의 사람들은 어떤 이들이었나? 이들은 왜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해 주어야 할" 자국의 경찰과 계급장도 없는 군복 입은 사람들의 총탄에 의해 소중한 생명을 잃을 수밖에 없었나? 자기가 왜 죽어야 하는지 그 이유도 모르고 학살당한 천여 명 희생자들 중 극히 일부의 면모를 살펴보자.

김순도는 1949년 거주지인 충북 괴산군 사리면 방축리에서 연행되었다. 그는 1949년 12월 20일 청주지방법원에서 국가보안법위반으로 징역 2년형을 언도받고 청주형무소에 수감되었다. 김순도의 처 백인순은 임신 중인데도 면회를 다녀오던 길에 차에서 사산 했다. 그리고 남편 김순도는 한국전쟁 발발 후 학살되었다.

신상인은 1949년 거주지인 충북 괴산군 증평읍 덕상리 정복골에서 연행되어 증평지서에 구금되었다. 그는 1949년 6월 7일 청주지방법원에서 국가보안법과 포고령 위반으로 징역 2년을 언도받고 청주형무소에 수감되었다. 신상인의 처 김광식은 아들을 데리고 면회를 다녔다. 그 후 신상인은 한국전쟁 발발 후 학살되었다.

장팽석은 청원군의 북이국민학교 교사로 근무 중 1949년 북이국민학교에서 경찰에 체포되었다. 장팽석은 1949년 10월 25일 청주지방법원에서 국가보안법위반으로 징역 2년을 언도받고 청주형무소에 수감되었다. 그의 가족들은 면회를 다녔다. 장팽석은 한국전쟁 발발 후 총살당했다.

윤천득은 한국전쟁 전 충청북도 청원군 북이면 영하리 집에서 경찰에 체포되었다. 당시 윤천득의 이복동생 남편 박한교가 좌익 활동을 했는데, 경찰은 박한교의 행방을 알기 위해 윤천득을 체포했다. 윤천득은 청주형무소에 수감되었고 그의 부인이 면회를 다녔다. 윤천득은 한국전쟁 발발 후 총살당했다.

김구와 김원봉계의 씨를 말려버린 이승만

홍가륵은 1948년경 목사이던 부친의 진천 교회에서 경찰에 체포되었다. 홍가륵은 일제강점기에 배재학교를 졸업하고, 이후 독립운동가 김구(1876-1949)를 보좌하면서 조선혁명간부학교를 2기로 졸업했다. 홍가륵은 해방 후 청주에서 교사로 근무하던 중 이승만 정권에서 김구관련 조직을 와해시키려고 관련 사람들을 검거하려고 하자, 부친이 목사로 있는 진천 교회에 피신했다가 체포되었다.

홍가륵은 1949년 4월 14일 청주지방법원에서 소요, 상해치사, 상해로 징역 4년을 언도받고 청주형무소에 수감되었다. 그의 부친과 부인이 면회를 다녔다. 홍가륵은 한국전쟁 발발 후 청원군 낭성면에서 총살되었고 당시 총살현장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사람이 홍가륵의 부인에게 전해주었다.
  
 학살 희생자 홍가륵
 학살 희생자 홍가륵
ⓒ 박만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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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해방 후 김구를 지지했던 군인들(약 4천여 명 추정)도 한국전쟁 초기 이승만 정권 아래서 전부 학살당했다. 전쟁 직전 국군의 수가 9만 8천 명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국군에 의해 학살당한 군인들의 숫자도 적지 않았다. 정승화(1929-2002) 장군의 저서 <대한민국 군인 정승화>에는 한국전쟁 초기 용감하고 실력 있는 군인들이 국군에게 학살당해 안타까워하는 내용이 나온다. 이것은 한국전쟁 초기 국군이 왜 그렇게 쉽게 인민군에 의해 붕괴되었는지 설명해 주는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라고 볼 수 있다.

그 외에도 1950년 7월 초순, 일제강점기 항일 의열단을 이끈 약산 김원봉(1898-1958)의 네 동생인 김구봉, 김용봉, 김봉기, 김덕봉은 경남 밀양의 자택으로 갑자기 들이닥친 군경한테 끌려갔다. 그리고 이렇게 끌려간 약산의 네 동생은 아무 영문도 모른 채 밀양 지역에서 예비검속으로 체포된 국민보도연맹원 300여 명과 함께 학살당했다.

이렇게 이승만은 한국전쟁을 통해서 정적이었던 김구 계열과 김원봉 일가의 씨를 아예 멸균실 수준으로 철저히 말려 버렸다.

한편 석기준은 1949년 철도기관사로 일하던 중 경찰에 체포되었다. 당시 경찰은, 석기준이 운전했던 열차와 열차 밖에서 공산주의 선전유인물이 발견되었다는 이유로 석기준을 체포했다. 석기준은 1949년 10월 11일 청주지방법원에서 국가보안법위반으로 징역 2년형을 언도받고 청주형무소에 수감되었다. 석기준은 한국전쟁 발발 후 가덕면 공원묘지 부근에서 학살되었다.

송인호는 1950년 충청북도 영동군 영동읍에서 경찰에 체포되었다. 송인호은 1950년 5월 18일 청주지방법원에서 국가보안법위반으로 징역 5년을 언도받고 청주형무소에 수감되었고, 그의 처가 면회를 다녔다. 송인호는 한국전쟁 발발 후 국군이 후퇴하는 과정에서 국군에 의해 총살당했다.

도장 빌려주고 학살당해

신창섭은 한국전쟁 전 충청북도 괴산군 감물면에서 경찰에 체포되었다. 당시 신창섭의 마을에 좌익활동을 했던 채방배가 신창섭 등 10여 명의 도장을 빌려서 임의로 좌익관련 단체에 가입시켰고, 이로 인해 신창섭 등 10여 명이 경찰에 체포되었다. 신창섭은 청주형무소에 수감되었고 그의 모친이 면회를 다녔다. 신창섭은 한국전쟁 발발 후 국군이 후퇴하는 과정에서 국군에 의해 총살당했다

김교성은 한국전쟁 전 경기도 안성의 친척집에서 경찰에 체포되었다. 김교성은 청주사범학교 출신으로 거주지인 충청북도 진천군 덕산면 옥동국민학교 교사로 발령을 받고 부임을 준비하다가, 체포 당시 청주사범학교 재학 중 학생운동을 한 혐의로 경찰에 쫓기고 있었다. 김교성은 청주형무소에 수감되어 미결수로서 재판을 기다리고 있었고 그의 부친이 면회를 다녔다. 그가 재판을 기다리던 중 한국전쟁이 발발했고 그 후 국군이 후퇴하는 과정에서 국군에 의해 총살당했다.

이연호는 한국전쟁 발발 직후 충북 진천군 초평면 용정리 집에서 보도연맹원이라는 이유로 경찰에 연행되어 청주형무소에 수감되었다. 그 후 이연호가 국군에게 총살당했다고 당시 총살을 목격한 사람이 그의 가족에게 알려주었다. 이 소식을 들은 그의 부친은 아들의 시신수습을 위해 총살 현장에 갔으나 시신의 훼손과 부패 등으로 아들의 시신을 찾을 수 없었다.

당시 남일면 고은리에서 총살장면을 목격한 마을주민 유아무개, 임아무개, 이아무개는 군과 경찰이 처음 3일 동안은, 오전 오후 두 차례 트럭 2~3대에 푸른색 수의를 입은 재소자를 30명씩 싣고 와서 총살했고, 이후에는 수시로 트럭 5~6대에 민간인 복장의 보도연맹원을 싣고 수시로 와서 총살했고, 그다음에는 고개 너머 지경골에서 총살했다고 진실위에서 진술했다.

한편 충청북도 청원군 낭성면 호정리(일명 도장골)에서도 1950년 7월 3일에서 7월 5일 사이에 청주형무소 재소자 약 100여명이 학살되었다. 당시 도장골에서 시신 매장작업에 동원된 신아무개는 "지서 경찰들이 젊은 사람들을 동원해서 도장골의 시신들을 매장하게 했다. 도장골에는 시신들이 쫙 깔렸었다. 죄수복을 입은 재소자들은 전부 두 사람이 한 팔씩 수갑에 채워졌었고, 재소자 중에는 도망가다 뒤에서 총을 맞고 죽은 것으로 추정되는 시신들도 있었다"고 진실위에서 회고했다

분터골은 한국전쟁초기 청주·청원지역에서 가장 많은 민간인들이 학살된 장소였다. 진실위는 이곳에서 두 차례에 걸쳐 유해발굴을 진행해 최소 336구의 유해를 발굴했다. 1차로 발굴된 유해는 형태가 무릎 꿇은 자세, 손이 엉덩뼈 뒤로 결박된 자세, 옆으로 구부린 자세 등 학살된 당시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유품 중 M1, 카빈, 45구경 권총의 탄피와 탄두는 학살 가해자가 군과 경찰이었음을 보여주었다. 
    
 진실위가 발굴한 분토골 학살 희생자 유해
 진실위가 발굴한 분토골 학살 희생자 유해
ⓒ 진실위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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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살되고 70년 만에 건국훈장 추서
  
지난 2002년 청주지역의 학살희생자 유족들은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학살 진상규명 충북대책위원회'를 창립했다. 그리고 청주·청원지역의 민간인 희생사건에 대한 현장조사, 유족증언대회, 민간인 희생사건 관련 학술행사 개최, 특별법 제정사업 등 학살 진상규명에 대한 활발한 활동을 벌여왔다. 그리고 지난 2006년 유족들은 진실위에 이 지역 민간인학살에 대한 진실규명을 신청했다.

그리고 4년 만인 지난 2010년 진실위는 청주형무소 민간인 학살에 대해 이렇게 진실규명 결정을 내렸다.
 
청주형무소에서는 1950년 6월 30일부터 7월 5일까지 약 1,200명의 재소자와 보도연맹원이 살해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은 충북지구CIC, 제16연대 헌병대, 청주지역 경찰 등에 의해 법적 절차 없이 충북 청원군 남일면 분터골, 남일면 화당교, 남일면 쌍수리 야산, 낭성면 도장골, 가덕면 공원묘지 등에서 집단살해 되었다.
 
한편 지난 2009년, 위의 학살 희생자 홍가륵은 일제강점기 의열단 활동을 인정받아 늦게나마 건국훈장 애족장에 추서되었다. 하지만 학살로부터 70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유족들은 홍가륵의 유해조차 찾지 못하고 있다. 

태그:#학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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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영국통신원, <반헌법열전 편찬위원회> 조사위원, [함석헌평전], [함석헌: 자유만큼 사랑한 평화] 저자. 퀘이커교도. <씨알의 소리> 편집위원. 한국투명성기구 사무총장, 진실화해위원회, 대통령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투명사회협약실천협의회, 국민권익위윈회 청렴포럼위원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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