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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9월 15일 영국 리버풀에 44명의 더비셔호 희생자들의 넋을 기리는 추모비와 추모공원이 조성되었다. (위치: Church of Our Lady and Saint Nicholas).
▲ 리버풀에 위치한 더비셔호 추모비 2018년 9월 15일 영국 리버풀에 44명의 더비셔호 희생자들의 넋을 기리는 추모비와 추모공원이 조성되었다. (위치: Church of Our Lady and Saint Nicholas).
ⓒ 더비셔호가족협의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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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는 9월 9일은 영국 더비셔호 침몰 40주기가 되는 날이다. 더비셔호 침몰은 영국 역사상 가장 큰 해상사고로 기록됐다. 

더비셔호는 타이타닉호의 2배되는 무게와 284미터 폭에 달했던 엄청난 규모의 벌크 화물선으로 사고 당시 15만7446톤의 철광석을 운반하던 중이었다. 캐나다 퀘백을 떠나 일본 가와사키를 향하던 이 거대한 선박은 도착 며칠을 앞두고 태풍 오키드를 만나 남중국해에서 침몰했다. 선장을 포함해 선원 42명과 선원의 아내 2명은 긴급구조신호 메이데이조차 하지 못하고 깊은 심해로 가라앉고 말았다.

하지만, 선원들의 유족은 건조한 지 4년밖에 안 된 거대한 화물선이 왜 그렇게 쉽사리 침몰했는지, 왜 사랑하는 가족들이 집에 돌아오지 못했는지 꼭 알고 싶었다. 더비셔호가족협의회는 선박의 침몰 직후부터 사고 원인을 규명하고 재발방지책을 세우는 데 전혀 관심이 없었던 정치권과 해운업계를 상대로 끊임없는 싸움을 벌였다. 두 번에 걸친 정부의 공식조사를 통해 무려 20년 만에 납득할만한 해답을 얻었다.

유족은 해운 전문가들의 도움을 얻어 25개의 안전관련 법규 개정을 요구했고, 영국의 고등법원은 그 중 22개를 받아들였다. 2007년 전 세계적으로 화물선내 블랙박스(VDR) 의무장착 법제화등을 포함, 두 가지를 제외한 유족의 제안은 모두 법률로 제정됐다고 한다.

"포기하지 마시고 앞으로 나아가십시오"
 
2018년 9월 15일 더비셔호 추모비 제막식에서 연설하고 있는 더비셔호유족협회 대표 폴 램버트씨.
▲ 연설중인 더비셔호유족협회 대표 폴 램버트씨 2018년 9월 15일 더비셔호 추모비 제막식에서 연설하고 있는 더비셔호유족협회 대표 폴 램버트씨.
ⓒ 더비셔호가족협의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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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비셔호가족협의회 (MV Derbyshire Families Association)의 대표로 오랫동안 활동했던 폴 램버트씨(68)는 필자와의 인터뷰에서 자신들 캠페인의 성공은 '피해자들의 진상규명 의지'와 함께 '정치권의 결단'에 의한 것이라고 평가했다. 이들의 긴 진상규명 운동의 전환점은 1997년 정권교체다. 마가렛 대처가 이끌던 보수당이 물러나고 노동당이 집권하면서 가족들에게 큰 힘을 보탰고, 진상규명 약속을 이행했다고 한다.  

스텔라데이지호 침몰 1주기 추모행사에도 동영상을 직접 제작해 연대의 마음을 보냈던 폴 램버트씨는 그간 세월호 & 스텔라데이지호 참사 피해자들을 응원해왔다(영상 보기, https://vimeo.com/262103996). 

최근 300일 가깝게 세월호와 스텔라데이지호 가족들이 청와대 앞에서 매일 피켓팅을 해오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폴 램버트씨는 두 참사 가족들을 향한 자신의 연대 메시지와 함께 이분들이 참고할 수 있도록 자신들의 지난했던 진상규명 과정을 기자에게 전했다.

더비셔호 침몰사건을 포함해 굵직한 세계 해상사고를 다뤘던 캐나다 TV 시리즈, < Disasters at Sea >(해상 참사들)의 P.J. 나우린스키(Naworynski) 감독은 지난해 4월 디스커버리채널과 제작 과정에 대해 인터뷰한 바 있다. 그는 "더비셔호 사건의 영웅"에 대해 묻는 말에 "폴 램버트씨는 자신의 모친에게 어떤 일이 있어도 결코 포기하지 않겠다고 약속한 후, 수많은 장벽에도 불구하고 진실을 찾기 위해 인생을 바쳤다"라며 "그의 노력 덕분에 배도 찾았고,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게 됐다"라고 높이 평가했다(제작과정: 더비셔호: 해상 참사들, https://www.youtube.com/watch?v=vahDinNPXsg). 아래는 더비셔호가족협의회 폴 램버트씨의 서한 전문이다. 
 
청와대앞에서 피켓팅중인 세월호 &스텔라데이지호 가족들의 피켓팅이 300일에 가까워지고 있다.
 청와대앞에서 피켓팅중인 세월호 &스텔라데이지호 가족들의 피켓팅이 300일에 가까워지고 있다.
ⓒ 전인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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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가족들과 스텔라데이지호 가족분들께

안녕하세요. 저는 영국 더비셔호가족협의회의 대표 폴 램버트라고 합니다. 더비셔호는 일본 가와사키 도착 며칠을 앞두고 1980년 9월 9일 침몰하면서 선장및 선원 42명과 아내 2명의 생명을 앗아갔습니다.

이 사건으로 28세였던 저는 막내동생을 잃게 되었지요. 당시 19살이었던 동생 피터는 13살때부터 사귀던 여자친구와 결혼을 앞둔 상태였고, 자신의 마지막 원양항해에 사고를 당해 너무 안타까왔습니다.

믿기 힘드시겠지만, 저는 동생의 죽음을 받아들이는데 꼬박 5년이란 시간이 흘렀습니다. 제가 백 년을 산다한들 다시금 동생을 볼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나서 견디기 힘들었습니다. 한동안 동생이 구명보트를 타고 머나먼 섬 어딘가에 살고 있지 않을까 또는 낯선 어부에 의해 구조되었는데 기억상실로 집에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는 상상을 했던 시간도 있었습니다. 물에 빠지는 동생이 저보고 구해달라고 애원하는 악몽도 많이 꾸었습니다.

제가 마음 고생을 많이해서인지 몰라도, 배 침몰 사고로 소중한 가족을 잃은 이들을 보면 안타까운 마음이 앞섭니다. 그간 신문과 한국 지인들을 통해 세월호 참사와 스텔라 데이지호 침몰 사건을 접하며 동병상련을 느낍니다.

특히 얼마전 세상과의 끈을 놓으신 두 분의 세월호 아버지 소식에 가슴이 너무 아픕니다. 이 무더운 날씨에도, 호우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세월호 & 스텔라데이지호 가족들이 청와대 앞에서 무려 300일 가깝게 매일 피켓팅을 하고 있다는 안타까운 소식도 들었습니다. 

더비셔호는 올해로 침몰한 지 40년이 되었습니다. 참 믿기지 않는 세월입니다. 코로나 시국으로 계획했던 추모행사를 취소할 수 밖에 없어 무척 아쉽습니다. 저는 아직도 동생이 너무 그립습니다. 다른 더비셔호 가족들도 비슷한 심정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저희들은 20년간의 치열한 진상규명 싸움끝에 결국 침몰 원인을 밝혀냈고, 재발방지를 위한 선박 안전규정을 개선했기에 그나마 조금 마음의 평화를 얻게 됐습니다. 아울러 2018년 리버풀에 더비셔호 희생자들의 넋을 기리는 추모비와 더비셔호 추모 공원을 조성하게 됨에 따라, 소중한 이들이 오랫동안 우리에게 기억되며 잊혀지지 않을 거라는 생각에 큰 위로를 받았습니다.  

여러분들이 이미 잘 아시리라 믿지만, '결코 희망을 잃지 마시라'는 말을 드리고 싶습니다. 저희는 20년간의 캠페인동안 수많은 장벽에 직면해 포기하고 싶을 때가 너무 많았지만, 결국 영국 역사상 존재하지 않았던 선박사고의 재조사와 심의를 이뤄냈습니다. 이런 승리의 바탕에는 유족들의 끈질긴 인내가 동력이 됐겠지만, 이 힘들고 긴 여정에 평범하지만 소중한 많은 시민들이 함께 연대했기에 가능했습니다.

많은 학자, 전문가들도 자발적으로 댓가를 바라지 않고 저희에게 도움을 줬습니다. 중요한 전환점은 1997년 정권교체였습니다. 보수당이 물러나고 노동당이 집권하면서 저희에게 큰 힘을 보탰고, 진상규명 약속을 이행했습니다. 큰 틀에서 보면, 피해자의 진상규명 의지와 정치권의 결단이 성공의 열쇠였던 것 같습니다. 

결코 포기하지 마시고 앞으로 나아가십시오. 여러분은 사랑하는 가족이 왜 집에 돌아올 수 없는지 그 이유를 알 권리가 있습니다. 하늘에 있는 여러분 가족이 지켜보면서 자랑스러워하고 있을 겁니다. 여러분들은 안전한 세상을 만들고 싶은 그들의 목소리가 됐습니다. 

다만, 몸이 힘들때는 잠시 휴식을 취하고, 마음이 힘들때는 믿고 의지하는 분에게 고민을 털어놓고 위로를 받으시길 바랍니다. 혼자 속에 쌓아두면 큰 병이 되고 맙니다. 제가 과거 힘겨울때마다 저를 지켜준 믿음은 앞으로 단 한 선원의 생명이라도 살릴 수 있다면 이 모든 고난이 뜻깊다는 것이었습니다.이윤추구에 눈 먼 해운업계에선 바다가 선원들의 피로 뒤덮여도 아무도 신경쓰지 않는 현실을 깨달았죠. 저는 비록 오랜 싸움으로 여기저기 건강이 불편하지만,지금도 결코 후회하지 않습니다. 결국 '진실은 여러분의 편'이라는 것을 잊지 마세요. 

인간의 존엄이라는 소중한 가치를 위해 싸우시는 여러분들의 건승을 빕니다. 

영국에서 온 마음으로 연대하며, 
2020 여름, 폴 램버트 (Paul Lambert) 배상. 

20년 동안 이어진 더비셔호가족협의회의 진상규명 싸움
 
1980년 침몰한 영국 더비셔호의 첫 사진. 더비셔호가 이전 '리버풀 브릿지호'(Liverpool Bridge)로 이름불렸을 때 건조 후 찍은 첫 번째 사진.
▲ 1980년 침몰한 영국 더비셔호의 첫 사진 1980년 침몰한 영국 더비셔호의 첫 사진. 더비셔호가 이전 "리버풀 브릿지호"(Liverpool Bridge)로 이름불렸을 때 건조 후 찍은 첫 번째 사진.
ⓒ 더비셔호가족협의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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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폴 램버트씨는 세월호와 스텔라데이지호 가족들이 참고하라면서 7페이지에 달하는 이메일을 통해 자신들의 투쟁사를 자세히 알려왔다. 아래 내용은 이를 바탕으로 기자가 며칠 전 램버트씨와 진행한 화상 인터뷰를 요약한 내용이다. 

두 번의 공식 조사를 통해 밝혀진 더비셔호 침몰 원인은 태풍 오키드라는 유례를 찾기 힘든 악천후가 통풍통및 갑판장 창고 입구(Bosun's Store Hatch)를 손상시켰고 이로 인한 뱃머리와 선체의 심각한 침수다.

1. 침몰 (1980년)
1980년 9월 9일 더비셔호 침몰 소식을 들은 더비셔호 유족은 다음달인 10월부터 원인규명을 위한 정식 조사를 요구하며 관할부서인 교통부를 포함, 영국 정부에 서신을 보냈다. 하지만, 당시 대처 수상이 집권하던 영국 정부는 '태풍 오키드에 의한 사고'라는 예단과 향후 '재발할 가능성이 없다'는 확신으로 가족들의 요구를 거부했다. 
   
2. 더비셔호 자매선박 카우룬 브리지호의 침몰(1986년~1987년)
더비셔호 자매선박인 카우룬 브리지호(MV Kowloon Bridge)가 1986년 엔진문제로 아일랜드해에서 침몰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다행히 모든 선원들은 영국 해군에 의해 구조됐다. 천천히 표류하던 이 선박은 이듬 해 봄, 세 부분으로 쪼개지며 침몰했는데 이중 한 부분은 65프레임에 결함이 있었다. 유족들은 1982년부터 더비셔호도 65프레임 부분에 문제가 있다고 주장해왔기에 영국 정부는 그제서야 더비셔호 침몰원인에 대한 공식조사를 하기로 결정하기에 이른다.
   
3. 실패로 끝난 첫 공식 정부조사(1989년)
1989년 초 첫 정부조사가 시작됐다. 이 조사는 한국의 해양안전심판원 수석조사관 역할과 유사한 커미셔너(wreck commissioner) W.C.달링이 이끌었다. 관련 전문가들과 변호사 비용을 사비로 지불해야 했던 유족과 해운노조는 당시 사법 절차에 참여하지 못했다.

오직 경제적 능력이 있는 더비셔호의 선사 '비비 라인'(Bibby Line), 선박을 건조한 '스완 헌터'(Swan Hunter)사, 등급을 매긴 '로이즈'(Lloyds)사만이 법률지원팀을 선임해 자신들의 이익을 대변했다. 30번이 넘는 세션 이후 커미셔너는 사고 원인을 "신의 결정 내지는 태풍의 영향으로 난파했다"고 최종 결정을 내렸다.

하지만 커미셔너 1인에게 전권이 위임된 시스템으로 누구도 그의 결정에 이의를 제기하지 못했다. 커미셔너가 유족과 해운노조가 제시했던 더비셔호및 자매선박의 증거 검토를 거부하는 등 편파적으로 운영하자 유족과 당시 야당이었던 노동당을 포함, '부패한 조사'라는 비판의 여론이 많았다. W.C.달링 커미셔너는 심지어 이 조사가 지난 6개월 후, 런던 로이즈(Lloyds) 지부로부터 은메달을 받기도 했다.
 
진상규명 서명운동중인 더비셔호 유족 1990년 12월 14일 더비셔호 유족들이 진상규명 탄원에 동참한 시민 6만5000명의 서명지를 영국정부에 전달한 후 다우닝가(Downing St)에서 함께 포즈를 취했다. 오른쪽 맨마지막에 폴 램버트씨의 모습이 보인다.
▲ 진상규명 서명운동중인 더비셔호 유족  진상규명 서명운동중인 더비셔호 유족 1990년 12월 14일 더비셔호 유족들이 진상규명 탄원에 동참한 시민 6만5000명의 서명지를 영국정부에 전달한 후 다우닝가(Downing St)에서 함께 포즈를 취했다. 오른쪽 맨마지막에 폴 램버트씨의 모습이 보인다.
ⓒ 더비셔호가족협의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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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더비셔호 유족들의 지속적인 캠페인 다짐(1990년)
유족들은 1990년 정부의 공식 조사 보고서가 발행되자 더비셔호 사고원인 규명을 제대로 밝히는 새로운 공식조사의 재개와 함께 선원들의 안전을 위한 캠페인을 펼치기로 결의했다.

유족들은 데이브 램웰 선장의 보고서를 통해 1972년부터 1990년 사이 6주마다 한 번씩 벌크화물선(bulk carrier)의 침몰로 많은 선원들이 바다에서 목숨을 잃고 있으나 아무도 이 문제에 관심이 없다는 걸 알게 됐다. 전문가들의 자발적인 지원으로 더비셔호의 침몰 위치를 확신한 유족은 해운노조를 통해 ITF(국제운수노련)을 접촉한다. 두 달 후 ITF는 더비셔호를 발견하기 위한 8일간의 원정 비용 80만 파운드(한화 약 12억 원)를 지원하기로 결정한다. 

5. 더비셔호 발견(1994년) 
1994년 6월 8일 더비셔호는 유족과 전문가들이 예측했던 곳에서 발견됐다. 증거로 촬영한 사진과 동영상은 영국 교통부 산하 해상사고조사부서로 보내졌으나 관계자들은 사고 원인을 규명하기엔 불충분하다는 결정을 내렸다. 하지만 더비셔호의 발견은 언론의 큰 주목을 받기에 충분했다. 

영국 정부는 은퇴한 고등법원판사 존 도날드슨을 임명해 더비셔호 진상규명을 위해 필요한 조치들과 향후 안전을 위한 교훈에 관해 조언을 구했다. 유족과의 만남을 먼저 가졌던 도날드슨 판사는 침몰장소에서의 최대한 많은 증거확보와 이를 위한 재원 200만 파운드(한화 약 31억 원)를 최고치로 하는 보고서를 영국 정부에게 제시했다. 이에 동의한 영국 정부와 유럽연합은 각각 100만 파운드를 부담했다. 

영국 교통부는 세계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전문가, 미국 우즈홀과 수의계약을 하기에 이른다. 과거 타이타닉호를 발견하고 조사했으며, 세계 최고의 장비를 보유하고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교통부는 3명의 분석가를 포함, 정부를 대표하는 원정팀을 심해수색선에 보냈다. 더비셔호 난파지역의 44일간 원정동안 우즈홀연구소는 약 14만7000장의 사진과 200시간의 비디오 자료를 수집한 후 영국으로 돌아왔다.
 
세계 최고 권위를 자랑하는 우즈홀이 1994년 심해수색때 찍은 더비셔호 일부 모습.  더비셔호 난파지역의 44일간 원정동안 우즈홀연구소는 약 14만7000장의 사진과 200시간의 비디오 자료를 수집한 후 영국으로 돌아왔다.
▲ 난파한 더비셔호 심해 사진 세계 최고 권위를 자랑하는 우즈홀이 1994년 심해수색때 찍은 더비셔호 일부 모습. 더비셔호 난파지역의 44일간 원정동안 우즈홀연구소는 약 14만7000장의 사진과 200시간의 비디오 자료를 수집한 후 영국으로 돌아왔다.
ⓒ 더비셔호가족협의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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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 바탕으로 최종보고서를 작성하기로 돼 있던 판정원 3명중 한 명(더글라스 포크너 교수)은 큰 의견 차이로 사임하고 만다. 결국, 대부분의 보고서는 한 명의 분석가에 의해 종결된다. 그는 더비셔호 선원이 갑판장 창고 입구를 단단히 잠그지 않았다며 사고를 선원 책임으로 돌리는 보고서를 제출했다.  . 

6. 보수당에서 노동당으로의 정권교체(1997년) 
폴 램버트씨는 정권교체가 자신들의 '더비셔호 진상규명과 선원 생명 살리기 캠페인'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고 평가한다. 이전에도 노동당이 유족의 캠페인을 지지했고, 적극적으로 지원하겠다는 약속을 이행했다고 증언한다.

신임 교통부장관이자 부총리였던 존 프레스콧은 더비셔호 유족이 교통부의 우즈홀 원정 리포트를 평가하고 비판할 수 있도록 이들의 전문가 선임 비용을 지불했다. 동시에 더비셔호 유족은 새 정부가 더비셔호 침몰 원인을 총체적으로 규명하는 공식조사를 정식으로 재개하도록 영국 의회를 비롯한 정치권, 해운노조 및 해상 사고와 관련된 모든 국제기구에 지원을 요청하는 서한보내기 캠페인을 대대적으로 진행했다.    

7. 노동당 정부 2차 진상조사 계획 발표(1999년) 
1999년 존 프레스콧 부총리는 유족과 전문가들의 보고서를 기반으로 새 정부가 더비셔호 침몰원인을 규명하기위한 공식 진상조사를 하겠다고 기자회견을 했다. 또한, 유족이 직접 선정하는 법률대리인의 비용도 정부가 지원했다.    
 
2017년 7월 'Merseyside해양박물관'에서 열렸던 더비셔호 전시회 오프닝행사에 참여한 더비셔호 유족 단체사진. 배경으로 진실을 찾아서 (Search for the Truth)라는 인상적인 문구가 눈에 띈다. 이분들의 진상규명 노력은 20년이 걸렸다. 유족대표 폴 램버트씨는 배상금을 더 타기 위한 싸움이라는 모욕적인 공격도 감내해야 했다고 토로했다.
▲ 더비셔호 유족 단체사진  2017년 7월 "Merseyside해양박물관"에서 열렸던 더비셔호 전시회 오프닝행사에 참여한 더비셔호 유족 단체사진. 배경으로 진실을 찾아서 (Search for the Truth)라는 인상적인 문구가 눈에 띈다. 이분들의 진상규명 노력은 20년이 걸렸다. 유족대표 폴 램버트씨는 배상금을 더 타기 위한 싸움이라는 모욕적인 공격도 감내해야 했다고 토로했다.
ⓒ 더비셔호가족협의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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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진상규명의 마지막 장: 고등법원에서 열린 2차 더비셔호 진상조사(2000년)
영국 정부가 주관한 더비셔호 침몰 2차 공식 진상조사는 고등법원에서 열렸다. 이는 유족과 교통부의 합의 하에 이뤄진 결과로서, 당시 모든 관계자들은 문제가 많았던 1차 진상조사와는 달리, 투명하고 열린 방식으로 이 재조사가 진행돼야 한다는 조건에 동의했다. 판사의 선정 또한 유족과 정부가 함께 결정했다.

폴 램버트씨는 유족들은 당시 4명의 판사 중에서 평판이 좋았던 안소니 콜만 판사를 선택했는데 그는 따뜻하고 정직한 판사였다고 회고했다. 고등법원에서 선박 침몰사건을 재차 진상규명하고 판단하는 일은 영국에서 전례가 없었기에 콜만 판사는 그때 그때 규정을 만들어가며 재판을 진행했다.

이 재판을 통해 1994년 우즈홀 원정후 작성된 보고서의 결함도 여러군데 발견됐다. 램버트씨는 더비셔호 선원이 갑판장 창고 입구를 단단히 닫지 않았다는 누명도 벗게돼 유족에겐 큰 위안이 됐다고 밝혔다. 심지어 판사는 우려했던 65프레임 부분에 선원이 취한 안전조치를 칭찬하기도 했다.

이 진상조사를 통해 유족과 전문가들은 선원과 선박의 안전을 개선하기 위한 25개 추천사항을 판사에게 제시할 수 있었다. 판사의 최종 보고서에는 22개 사항이 채택되었고 추후 20개가 법제화됐다. 폴 램버트씨를 비롯한 더비셔호 유족이 1980년부터 2000년에 이르는 20년간의 지난한 투쟁이 버거웠지만, 그나마 안전사고를 줄이는 재발방지책의 법제화로 다소 마음의 평화를 얻게 됐다고 평가하는 이유다.
 
1980년 침몰로 목숨을 잃은 폴 램버트씨의 동생, 피터 램버트씨. 그는 사고 당시 불과 19살이었다.
▲ 더비셔호 선원 피터 램버트  1980년 침몰로 목숨을 잃은 폴 램버트씨의 동생, 피터 램버트씨. 그는 사고 당시 불과 19살이었다.
ⓒ 폴 램버트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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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더비셔호, #폴램버트, #세월호, #스텔라데이지호, #진상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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