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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인보우 플래그가 등장하기 전까지 미국 내 퀴어 커뮤니티를 상징하는 가장 유명한 심볼은 핑크색 역삼각형(Pink Triangle)이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독일이 '국가의 적'으로 규정한 게이, 바이섹슈얼 남성, 트랜스젠더 여성을 체포해 수용할 때, 그들의 죄수복에 달아주었던 심볼이 핑크색 역삼각형이었던 것에서 유래한 상징이다. 마치 백인들이 경멸과 증오를 담아 부르던 멸칭 'N-word'를 전유해 자신들의 것으로 만든 흑인들이 그랬듯, 미국의 퀴어 커뮤니티 또한 그 핑크색 역삼각형을 자신들의 자긍심을 드러내는 상징으로 전유해서 사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퀴어를 향한 억압과 차별의 역사를 지니고 있는 핑크색 역삼각형을 쓰는 걸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여전히 있었다.

인권운동가 길버트 베이커도 그중 한 명이었다. 샌프란시스코에서 오픈리 게이로 살아가면서 퀴어 인권 운동과 반전 평화 운동을 위한 배너를 제작하던 길버트 베이커는, 어느 날 자신의 친구이자 게이 영화감독인 아티 브레산과 함께 <시민 케인>을 보고 돌아오던 밤 아티 브레산으로부터 "성적소수자의 정신과 자유가 밀려오는 새벽을 상징할 만한 심볼을 만들어 보라"는 제안을 받는다. 마침 동료이자 샌프란시스코 시의원인 하비 밀크로부터도 비슷한 제안을 몇 차례 받은 적 있던 길버트 베이커는, 고심 끝에 8색 무지개가 새겨진 첫 레인보우 플래그를 만든다. 우리가 흔히 보는 레인보우 플래그는 그렇게 1978년 샌프란시스코 프라이드 퍼레이드에서 첫선을 보였다.
 
최초의 레인보우 플래그. Photo by James McNamara, via https://gilbertbaker.com/flags/
 최초의 레인보우 플래그. Photo by James McNamara, via https://gilbertbaker.com/flags/
ⓒ James McNama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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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모든 색깔이 조화롭게 어우러진 무지개

그런데 많은 상징 중 왜 하필이면 무지개였을까? 어떤 이들은 길버트 베이커가 시대를 풍미했던 배우이자 가수, 게이 아이콘인 주디 갈란드의 노래 '섬웨어 오버 더 레인보우'로부터 영감을 받았을 거라고 주장한다. 굴뚝 꼭대기보다 더 위에, 무지개 너머 어딘가 분명 걱정이 레몬 사탕처럼 녹아버리고 감히 꿈만 꿔 왔던 것들이 실제로 이뤄지는 세상이 있을 것이라는 가사에서 영감을 받았을 거란 주장이다. 또 어떤 이들은 그 무렵 미국에서 유행했던 '인류의 깃발'에서 영감을 받았을 거라는 설을 제시한다. 각각 아메리카 원주민, 백인, 라틴계/남아시아계, 동아시아인, 흑인의 피부색을 상징하는 적-백-갈-황-흑색의 줄무늬가 함께 펄럭이는 광경을 보며, 다양한 성정체성과 성적 지향을 지닌 이들이 평화롭게 공존하는 세상에 대한 염원을 레인보우 플래그로 표현했을 것이란 설이다.

길버트 베이커는 뭐라고 회고했을까. 그는 영국의 식민지 지위에서 독립해 나온 13개 주를 상징하는 성조기의 줄무늬와, 자유·평등·우애의 기치를 내세운 프랑스 혁명을 상징하는 삼색기의 줄무늬로부터 형태적인 아이디어를 얻었다고 회고했다. 무지개 색깔을 채택하게 된 계기에 대해서 베이커는 이렇게 회고했다. 친구와 춤을 추러 클럽에 간 밤, 다채로운 사람들이 평화롭게 어울려 춤을 추는 것을 보다가 무지개를 떠올렸노라고. 비트족과 검정색 가죽재킷을 입은 바이커들, 긴 머리를 찰랑거리는 밸리 댄서들과 핑크색으로 머리를 물들인 펑크족들, 교외 지역 히피들과 영화배우들, 블루 진을 입은 부치-다이크들과 완벽한 콧수염을 자랑하는 근육질의 게이들까지, 저마다 다양한 색깔과 빛을 뿜어대는 이들이 반짝이는 미러볼의 불빛 아래서 평화롭게 춤을 추었다. 그 순간 베이커는 무지개가 새로운 심볼이 되어야 한다고 확신했다.
 
길버트 베이커 Gilbert Baker (1951-2017). Photo by Gareth Watkins
 길버트 베이커 Gilbert Baker (1951-2017). Photo by Gareth Watkins
ⓒ Gareth Watki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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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베이커는 첨언했다. "레인보우 플래그는 의식적인 선택인 동시에, 자연스럽고 필연적인 선택이었다. 무지개는 인류의 가장 오래된 기록에서부터 희망을 상징하는 심볼이었다. 창세기에서 무지개는 신과 살아있는 모든 생명 사이의 언약의 상징으로 등장했다. 무지개는 중국 설화에도, 이집트와 아메리칸 원주민의 역사에도 (희망의 상징으로) 등장했다." 경로는 달랐지만, 결국 '인류의 깃발' 설과 '섬웨어 오버 더 레인보우' 설이 강조하고 싶었던 가치들이 모두 담겨있었던 셈이다. '다양한 이들이 평등하고 평화롭게 공존하는' 새로운 세상에 대한 '희망'을 담은 상징. 차별과 혐오의 낙인이었던 역사를 지닌 핑크색 역삼각형을 버리고 새로 채택한 레인보우 플래그는, 그렇게 새로운 희망의 얼굴이 되었다.

평화와 평등, 조화와 공존을 바라는 이라면 누구라도

그래서 레인보우 플래그는 퀴어들의 정체성과 자긍심을 상징하는 '프라이드 플래그'로 불리지만, 동시에 LGBTQ 커뮤니티와 연대하는 이성애자 앨라이들도 함께 흔드는 깃발이 되었다. 결국 그 깃발이 찬미하는 것은 '모든 인종과 성정체성을 아우르는 인류의 평화로운 공존'이기 때문이다. 다양한 성정체성 간의 평화와 평등, 조화와 공존이란 가치에 공감하고 연대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레인보우 플래그를 흔들며 행진할 수 있다. 다름을 넘어 서로를 이해하고 연대하는 것은 인류 문명의 오랜 목표이고, 그런 세상을 만들기 위해 자기 자신의 편협함을 극복하고 세상의 편견과 맞서는 이라면 모두 레인보우 플래그를 보며 자긍심을 느낄 수 있다.

2017년 레인보우 플래그를 만든 길버트 베이커가 세상을 떠난 뒤, 뉴욕 LGBT 영화제 'NewFest'와 뉴욕 퀴어 퍼레이드 'NYC Pride'는 그를 기리고 기억하기 위해 6색으로 이뤄진 전면 칼라 영문서체를 개발한다. 다양한 색깔을 포용해 평화와 공존의 메시지를 전하는 이 서체는, 레인보우 플래그는 모두를 위한 깃발이라 생각해 저작권 등록을 하지 않았던 길버트 베이커의 유지를 이어 모두에게 무료로 공개되었다. 서체의 이름은 그의 이름을 따 '길버트'(Gilbert)라고 명명됐다. 이제 길버트 베이커의 삶을 기억하고 그의 유지에 공감하는 이라면 누구나 '길버트'체로 인쇄한 문구가 새겨진 티셔츠를 입고, '길버트'체로 만든 깃발을 흔들며 행진할 수 있게 되었다.

영어와 일어 가타카나판 '길버트'까지 완성된 지금, 한국에서도 그 뜻을 계승하고 연대하는 의미에서 '길버트'의 한글판 서체 '길벗체' 제작 작업이 한창이다. 길버트 베이커의 이름과 발음이 비슷한 단어 '길벗'이라는 서체명을 통해, 개발팀은 길버트 베이커의 삶을 기리는 동시에 다양성을 존중하는 사회를 향한 '길'을 함께 걷는 '벗'들을 호명하고 있다. 레인보우 플래그가 모두의 것인 것처럼, 다양한 성정체성의 평등하고 평화로운 공존을 위해 연대하는 '길벗'이라면 누구라도 길벗체를 이용해 제 뜻을 적고 소통할 수 있다.

함께 걷는 길벗이 되어 주시겠습니까

대·소문자와 특수기호, 숫자까지 대략 100자 안팎의 문자만 있으면 실생활에서 사용할 서체 제작이 가능한 영문 알파벳과 달리, 자음과 모음이 다양한 형태로 결합하는 한글 서체는 약 3000자 이상의 문자가 필요하다. 여기에 다양한 색깔이 입혀졌을 때 그 색상과 자모의 조합이 통일성을 지니도록 하려면 색상 조합을 다양하게 테스트해보는 반복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일곱 명의 개발자들이 협업해 지난 5월부터 개발에 착수한 길벗체의 오픈소스 무상 배포 예정 시한은 2021년 1월. 빠듯한 시간이지만 개발자들은 초인적인 헌신으로 한 자 한 자 길벗체를 제작 중이다.

7명의 개발자에게 돌아갈 최소한의 인건비와 개발에 필요한 프로그램 구매 비용을 포함한 최소 제작비용은 1500만 원이다. 상업적 판매를 염두에 뒀다면 공개 후 발생할 수익을 예상하며 감당할 수 있는 비용일지는 몰라도, 오픈소스로 무상 배포될 예정인 길벗체에는 딱히 해당 사항이 없는 이야기다. 길벗체가 추구하는 가치 하나를 보고 헌신하는 개발자들에게, 누군가 연대와 협력으로 함께 해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모두가 함께 뜻을 세워 '함께 만든 서체'로 기록을 남긴다면, 그 또한 의미 있는 일이 아닐까?

한국의 성적소수자들의 인권을 보호하고 다양한 인권운동과 학술연구, 문화활동을 지원하는 재단인 비온뒤무지개재단이 길벗체 제작비용 모금을 맡았다. 재단 측이 300만원을 선지원했고 각지에서 길벗체 제작비용 후원에 참여한 이들의 손길이 답지했지만, 여전히 최소 제작비용인 1500만 원까지는 갈 길이 멀다. 그래서, 나는 지금 이 글을 읽고 계신 분들께 손을 내밀고자 한다.
 
길벗체. via http://rainbowfoundation.co.kr/gilbeot
 길벗체. via http://rainbowfoundation.co.kr/gilbeot
ⓒ 비온뒤무지개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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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길벗체 제작 후원에 참여하면 길벗체 제작자로 홈페이지에 이름이 남겨진다. 옳은 싸움을 함께 한 이로 역사에 기록되는 것이다. 또한 감사의 마음을 담아 길벗체를 먼저 사용할 수 있도록 후원 시 남긴 이름의 음절을 우선적으로 개발해, SNS나 메신저 등에서 프로필로 사용할 수 있는 이미지로 만들어 보내주고, 완성된 길벗체를 일반 공개에 앞서 2020년 9월경에 먼저 발송해준다. 개인 후원은 5만 원부터, 단체 후원은 10만 원부터 이와 같은 특전이 가능하다.

[길벗체 후원 참여] http://rainbowfoundation.co.kr/gilbeot

왜 서체가 중요하냐 물으신다면

물론 누군가는 물을지도 모른다. 포괄적 차별금지법 제정을 위한 싸움도 시급하고, 실질적이고 제도적인 차별을 철폐하기 위한 싸움도 시급한데, 색깔 서체 하나 개발하는 게 왜 우선순위에 올라가 있는 거냐고. 글쎄, 13년째 글을 쓰며 먹고 살고 있는 내 입장에서 답을 드리자면, 언어에는 힘이 있다. 인류는 언어로 세상을 설득하고, 폭정을 끝낼 용기를 일으키고, 사랑을 고백했다. 언어는 사람을 끌어당기고, 흔들고, 설득하고, 안아준다.

그리고 서체는 그 언어에 표정을 입혀준다. 단호하고 진중한 느낌의 고딕체, 정중하고 보수적인 느낌의 명조체, 고전적이고 진지해서 때로는 키치한 방향으로도 쓰이는 궁서체, 강인하고 활기찬 느낌의 붓글씨체 등의 다채로운 서체들은, 강력한 언어의 힘을 한층 더 증폭 시켜 주는 힘을 발휘한다. "나 지금 궁서체다"라는 표현이 암시하듯, 우리는 서체를 통해 지금 이 말을 타이핑한 사람은 어떤 마음이었을지, 어느 정도의 진심을 담은 이야기인지를 가늠해 볼 수 있다. 그래서 서체는 문자로 기록된 말의 표정이고, 옷이며, 태도이다.

우리가 함께 만들 길벗체 또한 그렇다. "공존"이라는 두 글자를 적을 때에도 명조체로 적을 때와 길벗체로 적을 때의 선명함은 분명 다르다. 길벗체는 그 자체로 평화와 공존, 평등과 사랑의 마음을 상징하는 서체가 될 것이며, 그래서 길벗체로 적는 메시지들은 그 말의 힘이 한껏 더 증폭되어 세상에 뻗어 나갈 것이다.

세상 위에 평화와 공존의 꿈을 함께 적어보지 않으시겠습니까

길벗체를 받으면 무엇을 가장 먼저 적어 볼까 생각해 본 저녁이 있다. 적고 싶은 것들은 너무 많은데, 난 과연 무엇부터 적을 것인가. 고민 끝에 나는 이름들을 적어보겠다고 마음먹었다. 나의 퀴어 친구들이 학교를 다니고, 일터에 나가고, 사람을 만나고, 사랑하며,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는 마을의 이름을.
 
2014년, 혐오세력이 퍼레이드를 막아서서 밤이 되도록 행진을 방해했던 서울 신촌. 사진: 서울퀴어문화축제 via https://sqcf.org/photo
 2014년, 혐오세력이 퍼레이드를 막아서서 밤이 되도록 행진을 방해했던 서울 신촌. 사진: 서울퀴어문화축제 via https://sqcf.org/photo
ⓒ https://sqcf.org/phot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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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이곳을 지나는 사람 열 명 중 한 명은 성소수자입니다."라는 현수막을 걸려 했으나 구청에 의해 거부당했던 홍대입구, 혐오세력들이 퍼레이드 차 앞에 드러누워 행진을 막아 세우고 내 퀴어 친구들에게 물을 뿌려 댔던 신촌, 힙한 동네라는 입소문 속에 젠트리피케이션이 가속화되며 퀴어들의 보금자리가 연일 조금씩 밀려나고 있는 종로3가, 혐오세력의 조직적인 저지와 물리적인 폭력 앞에서 수많은 퀴어들이 PTSD를 얻었던 인천 부평 같은 지명들을, 나는 적을 것이다.

혐오세력들이 퀴어들의 존재를 한사코 지우고 감추고 싶어했던 동네의 이름을, 나는 성 정체성과 성적 지향의 다양함을 기념하고 평화로운 공존을 상징하는 무지개빛 길벗체로 적어볼 것이다. 당신들이 아무리 내 친구들을 몰아내고 지우려 해도 우리는 여기에 이렇게 산다고, 이 마을은 이처럼 다양한 정체성을 지닌 이들이 이미 공존하고 있는 곳이며, 앞으로도 평화롭게 공존하는 곳이어야 한다고, 몇 번이고 몇 번이고 길벗체로 그 마을의 이름을 적을 것이다.

그리고 또 나는 적을 것이다. 혐오세력들이 툭하면 제 혐오의 핑계로 삼지만, 사실 언제나 소외된 이들과 부당하게 탄압받은 이들 곁에 섰던 가난한 청년의 이름을. 그 당시엔 온전한 사람으로 대접받지 못했던 아이들을 가장 반겼고 여성들을 제자로 받았으며 세리와 병든 이와 가난한 이들과 함께 식탁에 앉아 같이 밥과 말씀을 나눴던, 제자들이 혹여 잊을까 두려워 마지막 끼니를 함께 하는 자리에서 한 번 더 너희는 서로 사랑하라는 당부를 남기고 간 서른세 살 청년 나자렛 예수의 이름을 적을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우리를 막아서는 것들을 증오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사랑하는 것들에 이름을 새겨 그들을 지키는 것으로 이길 것이다.
 
"우리는 그렇게 이길 거예요. 우리가 증오하는 것과 싸우는 게 아니라, 우리가 사랑하는 것들을 지키는 방식으로." - 로즈 티코, <스타워즈 에피소드 8: 라스트 제다이> 중.
 

덧붙이는 글 | 이 글을 쓴 이승한 시민기자는 비온뒤무지개재단 이사입니다.


태그:#길벗체, #레인보우플래그, #비온뒤무지개재단, #길버트베이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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