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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19년 9월 첫째 주에 옥상집으로 이사했다. 비록 얼마 지나진 않았지만 40년 넘는 아파트 생활에서 얻지 못한 경험을 맛보고 있다. 그 이야기를 남기고 싶어졌다.[기자말]
지난겨울 밤늦게 퇴근하는 길이었다. 마을버스에서 내려 집으로 향하는데 산 쪽에서 비명이 들렸다. 꽥. 혹은 꽤액. 내 귀에는 남자가 갈라진 목소리로 지르는 비명으로 들렸다. 산 바로 아래에 있는 우리 집으로 다가갈수록 그 소리는 점점 커졌다. 어두운 밤을 울리는 끔찍한 소리였다. 꽥. 혹은 꽤액. 난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느낌이었다.

"고라니로군."

가로등 아래에서 담배 피우던 남자가 혼잣말했다. 고라니라고? 아무리 산이라지만 그래도 도심인데 고라니가 산다고? 내 눈으로는 직접 보지 못했지만 내가 들었던 그 소리가 고라니 울음이 맞는다고 인터넷은 알려주었다.
 
▲ 고라니 울음 소리
ⓒ 강대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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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뒤 주말 이른 아침이었다. 옥상에 나가서 기지개를 켜는데 가까운 산 쪽에서 뭔가가 보였다. 겨울이라 잎이 다 떨어진 나무 사이로 긴 다리와 몸통이 왔다 갔다 하고 있었다. 뭔가 해서 바라보는데 마른 나뭇잎과 가지를 밟는 소리가 들렸다. 고라니였다.

녀석은 산 초입에 있는 텃밭으로 향했다. 겨울이라 수확을 끝내고 주인도 찾지 않는 텃밭이었다. 고라니는 그곳에서 뭔가를 먹었다. 나는 밖으로 나가 멀찍이서 고라니를 바라보았다. 녀석은 나를 보지 못 했는지 텃밭에 고개를 묻고 마른 이파리를 뜯어 먹었다.

카메라를 준비하고 살금살금 다가가는데 난 화들짝 놀랐다. 내 근처 덤불에서 다른 고라니가 갑자기 튀어나온 것이다. 멀찍이 있는 고라니를 보느라 가까이 있던 다른 고라니를 미처 못 본 것이었다. 덕분에 처음에 본 고라니도 산으로 달아났다. 두 녀석이 향하는 방향은 같았다.

우리 집 뒷산에 고라니가 진짜 살고 있었다.

보고 또 보고... 고라니와의 인연

그러고 보면 나는 고라니와 인연이 또 있었다. 2018년 봄부터 여름까지 나는 탄천에서 갓 태어난 새끼 오리들을 관찰하는 재미에 푹 빠졌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새끼 오리들을 쫓다가 의도치 않게 진기한 장면을 우연히 찍을 수 있었다. 내가 오리들 사진을 찍는 순간 그 뒤로 고라니가 휙 지나간 것이다. 그날 뒤로 난 탄천에만 가면 고라니를 볼 수 있을까 이곳저곳을 찾아보았는데 다시 만날 수는 없었다.
  
탄천에서 만난 고라니 분당 탄천에서 오리 가족을 관찰하다가 우연히 찍힌 고라니
▲ 탄천에서 만난 고라니 분당 탄천에서 오리 가족을 관찰하다가 우연히 찍힌 고라니
ⓒ 강대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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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사 온 동네에서 두 마리나 만나게 된 것이다. 그런데 이번 인연은 우연히 집 앞에서 만난 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나는 겨울 다 지난 어느 주말에 집 근처 등산로, 외져서 사람들이 찾지 않는 등산로를 올랐다. 그곳에는 마른 계곡이지만 항상 물이 고인 웅덩이가 있다. 온갖 새들이 물을 마시러 오는 곳이라 새를 관찰하기 좋은 곳이었다.

난 물웅덩이가 잘 보이는 곳에 자리를 잡고 쌍안경과 카메라를 준비했다. 잠시 후 나뭇잎을 밟는 소리가 들렸다. 그런데 새들이 가볍게 밟는 소리가 아닌 분명 네 다리 짐승이 묵직이 밟는 소리가 들린 것이다. 고라니였다.

고라니도 물을 마시러 마른 계곡 물웅덩이를 찾은 것이다. 난 혹시나 녀석이 놀랄까 봐 숨을 죽이고 카메라는 들이댈 생각도 못 했다. 그런데 나는 또 화들짝 놀랐다. 내 뒤에서 다른 고라니가 꽥 소리를 지르더니 덤불을 헤집으며 냅다 뛰는 것이었다. 그 바람에 물 마시던 고라니도 마른 계곡 상류 쪽으로 달렸다. 그런데 녀석은 좀 이상했다. 몸이 뚱뚱, 아니 조금 무거워 보였다.

그렇게 고라니들과 나는 가끔 숨바꼭질했다. 내가 고라니를 따라다닌 게 아니라 내 동선과 살짝씩 걸리곤 했다.

우리 집 뒷산에는 꿩도 산다. 특히 내가 즐겨 찾는 외진 등산로 근처에는 수꿩, 그러니까 장끼 몇 마리가 산다. 녀석들은 눈에 쉽게 띄는데, 내가 산에 갈 때마다 볼 수 있었다. 몇 주 전에도 등산로 바로 옆 마른 계곡에 멋진 장끼 한 마리가 있길래 다가가서 사진을 찍었다. 그런데 누군가와 눈이 마주쳤다.

고라니였다. 녀석은 웅크리고 날 쳐다봤다. 난 짐짓 못 본 체했다. 혹시나 고라니가 겁먹을까 봐. 아마도 녀석은 내게 들키지 않은 것으로 생각했는지 가만히 있었다. 난 딴 곳을 보며 렌즈는 녀석을 향했다. 여러 장을 찍어도 고라니는 꿈쩍하지를 않았다. 난 딴청을 피우며 그곳을 나왔다.
  
고라니 분당 어느 산에서 만난 고라니
▲ 고라니 분당 어느 산에서 만난 고라니
ⓒ 강대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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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찍이서 고라니가 어떻게 하는지 지켜보았다. 한참이 지난 후에야 녀석은 그 자리를 떠났다. 그리고 난 보았다. 근처 덤불에 있던 새끼 고라니가 따라가는 것을. 난 사진을 찍고 싶다는 욕망을 겨우 참았다. 녀석들의 평화를 깰 수도 있다는 생각에.

나도, 고라니도 함께 잘사는 세상

겨울 지나 봄이 되자 텃밭 주인들은 농사 준비를 했다. 겨우내 방치됐던 텃밭마다 그물망이나 철망이 단단히 쳐졌다. 난 평소에 인사를 나누던 텃밭 주인에게 물었다. 왜 그리 튼튼하게 둘레를 감싸냐고.

"아, 고라니 때문이지. 놈들이 얼마나 먹어치우는데. 좀 자라기만 하면 와서 먹어치우네."

고라니만 내려오냐고 물어보니 멧돼지도 자주 내려왔었는데 지난가을과 겨울에 포획된 이후로는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텃밭 주인들은 수확하기도 전에 먹어치우는 동물들에 대한 분노가 있었다.

고라니들이 사람들이 오가는 등산로 주변에 사는 게 이해됐다. 먹이를 구하기 위해 인간의 영역에 들어온 것은 아니었을까. 그런데 사람들이 산에 오르는 것도 사실은 동물들의 영역에 들어가는 것이었다. 때로는 동물들의 먹이를 탐내기도 하고.

지난가을과 겨울 뒷산에 떨어진 도토리나 밤을 볼 수 없었다. 다람쥐도 볼 수 없었다. 다만 멧돼지가 동네 근처에서 목격되곤 했다. 도토리나 밤은 누가 가져갔을까. 다람쥐는 또 어딜 간 걸까. 행방을 감춘 도토리나 밤의 자취를 쫓아서 멧돼지가 인간의 영역까지 내려온 건 아니었을까.

나는 이번 봄 고라니 가족들을 보면서 녀석들이 분당의 이 산에서 안전하고 평화롭게 살아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나를 포함한 사람들이 고라니 가족들을 나무나, 꽃이나, 바람처럼 산의 한 부분으로 생각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어젯밤에도 고라니는 우리 집 근처에서 울었다. 꽥, 그리고 꽤액. 또 꽥. 옥상에 나가서 자세히 귀 기울이니 세 마리였다. 가까이서 꽥. 멀리서 꽤액. 그리고 그 옆에서 작고 높은 소리로 꽥. 고라니 가족들은 간밤에 안녕했다.
   
▲ 분당에서 고라니 만난 사연
ⓒ 강대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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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강대호 시민기자의 브런치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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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후반전을 위해 하프타임을 보내는 50대 남자. 월간문학 등단 수필가이자 동화 공부 중인 작가. 그리고 여러 매체에 글을 연재 중인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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