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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고 나니 세상이 바뀌었다.' 21대 총선 다음날 지인들의 반응은, 한마디로 요약하면 이런 거였다. 어떤 당에 한 표를 줬든 이와는 무관하게 공통적으로 '놀랍다'는 얘기들을 했다.

총선 직전 각각 20명 안팎이 참여한 2개의 SNS 대화방에서 민주, 통합 양당의 표차를 예상해보자고 제안했었다. 고향 친구들이나 지금 사는 충청도 소도시의 지인들이나 응답한 사람들은 한결같이 많아야 20석 이내의 차이로 승부가 갈릴 거라고 점쳤다.

나는 최소 30석 이상으로 격차가 벌어질 거라고 했다. 좀 더 구체적으로는 통합당이 지역구에서 90석 이내, 최대 95석 이상을 가져가기 어려울 것이며 민주당은 최소 135석, 많으면 150석 이상을 가져갈 것이라고 짐작했다.

'세상을 바꾼' 것처럼 보이는 이번 변화는 내 생각으론 최소 4년 전인 20대 총선에서 이미 표출됐었다. 변화의 물결은 그간 가속도를 더해오다가 이번 21대 총선에서 극적으로 분출되기에 이르렀다.

20대 총선에서 민주당은 비례포함 123석을, 통합당 전신인 새누리당은 122석을 얻었고, 국민당은 38석을 가져갔었다. 국민의당이 전혀 힘을 못 쓴 이번 총선 결과를 대입해 보면, 민주당이 국민당 표를 거의 전부 흡수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민주와 통합 양당이 성적표를 받아든 직후 쏟아져나온 분석처럼, 비교적 잘되고 있는 현 정부의 코로나19 관리 같은 것들이 이번 선거에 영향을 미쳤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그러나 코로나19로 인한 민주당의 반사이익을 기술적으로 정리해보면, 통합당으로 갈 수도 있었던 10~15석 정도를 가져온 것으로 보는 게 합리적일 것이다.

여당이 코로나19까지를 포함해 예상치 못했던 것처럼 보이는 성적을 올릴 수 있었던 건, 근본적으로는 거듭된 진화의 결과로 한국의 정치 지형이 과거와 사뭇 달라졌기에 가능했다. 이번 총선에서 새로 추가된 만 18세 유권자를 제외하면 지난 20대 총선과 이번 21대 총선의 유권자층은 상당수가 동일할 것이다. 4년 전에 표출됐던 민심의 흐름, 즉 투표 성향이 이번에도 대체로 유지됐다고 봐야 한다.

정치 지형의 진화, 시민들의 정치 지향성과 관련해 이번 총선에서 무엇보다 먼저 짚어야 할 대목은 민주당의 석권이 진보좌파의 승리와는 거리가 멀다는 점이다. 엄밀히 말하자면, '왼쪽 보수당'이 '오른쪽 보수(혹은 수구)당'을 누른 것이다. 오른쪽 보수와 왼쪽 보수의 중간을 자처했던 국민의당은 왼쪽 보수로 흡수됐다.

한국의 작금 정치 지형은 보수 주류가 확대되는 판도라 할 수 있다. 유럽 기준으로는 말할 것도 없고 보수가 대종을 이루며, 유럽에 비하면 훨씬 보수화된 미국 잣대를 들이대도 마찬가지이다. 스스로 진보라고 생각하는 많은 한국의 유권자들은 최소한 서구 기준으로 보면 상대적인 왼쪽 보수라고 해도 크게 틀리지 않다.

20대 총선에서 국민당 38석 획득의 돌풍이 이번에 민주당으로 흡입된 걸 감안할 때, 21대 총선에선 정치 지형이 왼쪽 보수로 한 클릭 더 나아간 것은 분명해 보인다. 유권자들은 한국 왼쪽 보수의 주요 가치인 남북문제와 대일관계의 선명성에 대해 과거보다 관대한 태도를 보인 것이다.

한국은 세계에서 유례가 드문 분단국가이다. 또 부자 망해도 3년은 간다는 말이 있지만, 여전히 강대국의 면모가 다는 퇴색하지 않은 과거의 식민지배국 일본과의 관계는 특수한 정도 이상이다.

그러나 북한에 대한 정책의 강온이 정치적 보수와 진보를 가르는 여느 국가에서도 통용될 수 있는 세계 보편의 가치가 될 수는 없다. 마찬가지로 혐일부터 극일, 지일, 친일에 이르는 스펙트럼이 보편 국가들 사이에서 진보와 보수를 가르는 잣대로 받아들여지기는 곤란하다.

북한과 일본 요소를 들어내고 보면, 사실 여야 정치인들은 서로 너무도 닮았다. 입신양명에 대한 정치인 자신들의 태도, 이른바 교육을 통해 부와 명예를 대대손손 물려주고픈 욕망, 공적 가치에 헌신하기보다는 생활 정치인으로서의 두드러지는 면모, 지역주의 대한 의존, 재벌들에 대한 시각 등에서 대부분 '거기서 거기'인 사람들이다.

이번 총선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여당에 대한 야당의 종북 혹은 주사파 공세의 수위가 현저하게 낮아졌다는 점이다. 일차적으로는 종북 공세가 별로 먹히지 않는다는 야당의 판단이 있었겠지만, 무엇보다 왼쪽 보수인 여당의 대북 온건책이 이제 정치적으로 유권자들 사이에서 큰 마이너스 요인이 될 수 없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민주당의 압승에 대해 진짜 뼈아픈 정치세력은 정의당으로 상징되는 진보세력이라고 해야 마땅하다. 진보세력의 입지는 2000년 이후 대체로 좁아지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통합당은 민주당이 중간 보수의 가치를 선점하는 바람에 스스로 더욱더 비좁은 오른쪽 공간으로 치달았고, 보수와 수구의 경계를 넘나들 정도에 이르고 말았다.

민주당의 이번 역대급 승리는 한국 정치판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거시적으로 보면 무엇보다 '한국판 자민당'이 탄생할 수도 있는 길을 열어놨다. 오른쪽 보수에서 중간 보수, 왼쪽 보수를 민주당이 모두 섭렵하고, 일본 자민당처럼 계파 정치를 할 가능성마저도 배제할 수 없다.

정치는 그 속성상 보수 쪽에 서는 게 경쟁력이 있다. 진정한 의미의 보수는 말 그대로 작금 사회적으로 인정되는 가치를 지키는 것이다. 시민들로부터 안정적 지지세를 받는 데 유리할 수 밖에 없다. 일본은 말할 것도 없고 유럽이든 미국이든 21세기 들어 정치판은 보수 득세가 뚜렷해졌다.

겉으로 양당제인 것 같지만, 미국은 언젠가부터 사실상 보수 양당 시스템을 주축으로 하는 나라가 됐다. 총기규제, 낙태와 같은 보수 진보를 가르는 기존 가치에 최근에는 동성애 문제 정도가 추가되기는 했지만, 이들을 제외하고 미국의 공화당과 민주당의 경계는 애매모호 할 때가 많다.

샌더스 상원의원 같은 좌파가 반짝 돌풍을 일으킨 건 역설적으로 민주당의 계속되는 우경화의 반작용 때문이라고도 할 수 있다. 공화당이 더 오른쪽으로 이동, 트럼프 같은 극단적 정치지도자를 만들어낸 것도 민주당의 우경화와 같은 맥락이다.

이번 총선에서 여실하게 '남남당' 처지가 되고만 통합당에게 패배에도 불구하고 가장 큰 수확이 있다면, 더 이상 오른쪽으로 가서는 민주당의 자민당화를 막기 어렵다는 교훈을 얻은 것이다. (강)남과 (영)남으로 상징되는 지지세력에 매달려서는 야당에 미래가 없다는 점이 분명해졌다.

상식선에서 생각해도 부의 편중과 기득권 옹호에 앞장서는 인상을 주는 강남 스타일로 대다수 시민들의 지지를 얻기 힘들다는 건 자명하다. 호남과 마찬가지로 뚜렷하다고는 하지만 영남의 지역 정서 또한 젊은층들 사이에선 시나브로 약화하는 양상이다.

4년 후를 점치기는 힘들지만, 민주당이 앞으로 평균을 약간 웃도는 정도의 정치 성적표만 낸다면 22대 총선은 보수 일색인 '그들만의 리그'가 될 수도 있다. 다시 말해, 보수 우위의 한국 정치 지형에서 야당이 정상적인 의미의 보수 가치로 회귀할 경우 한국은 미국의 민주당과 공화당 정도의 양당 시스템을 정착시킬 확률이 높다.

민주당이 향후 명실공히 한국 정치판을 대표하는 정당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을지 여부는 전적으로 야당 하기에 달려 있는 셈이다. 일본 자민당 같은 거대 정당이 탄생하거나 미국과 같은 보수계열 양대 정당이 경합하는 정치 판도로 돌아가느냐는 통합당 행보에 달려 있다는 얘기이다.

물론 변수가 상수인 돌출적 북한 문제는 그 어떤 정당도 의도대로 풀어나가긴 어렵다. 희망컨대, 시민 입장에서는 '북한 찬스'로 한국의 정치 지형이 좌우되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다.

코로나19 와중의 높은 투표율은 유권자들이 작금을 국가의 명운을 좌우하는 시점으로 보고 있음을 보여준 것이다. 비상한 시기에 아주 상식적으로 유권자들이 한 표를 행사한 결과라는 뜻이다. 또 이번 투표 결과는 여야가 앞으로 어떤 정치를 해야 하는지 알기 쉬운 답안을 제시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향후 4년은 짧게는 의원 배지를 달게 된 정치인들의 생사가 걸린 시간이다. 하지만 폭넓게 보면 한국이라는 공동체의 운명이 갈릴 수 있는 시기이다. 4년 후 시민들은 말할 것도 없고 정치인들에게도 즐거운, 또 다른 놀라움이 찾아오길 기대한다.

태그:#민주당, #통합당, #총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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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축년 6학년에 진입. 그러나 정신 연령은 여전히 딱 열살 수준. 역마살을 주체할 수 없어 2006~2007년 북미에서 승차 유랑인 생활하기도. 농부이며 시골 복덕방 주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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