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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조 래빗>(2019)이라는 영화가 있다. 배경은 2차 세계대전의 막바지였던 1944년 무렵. 10살 소년 조조의 시선으로 전쟁이 끝나는 것을 지켜보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조조의 입장에서 보면, 자신이 속한 세상에 히틀러라는 강자는 언제나 존재했다. 그는 자신의 나라를 세계에서 가장 강한 국가로 만든 '영웅'이었다. 조조가 태어난 세상은 이미 히틀러라는 독재자의 지배에 놓인 독일이었고, 세계를 향해 전쟁을 하던 최강국이었다.

조조에게 히틀러가 없는 세상을 가르쳐 주는 것도, 히틀러가 심어놓은 독일에 대한 우월감과 유대인에 대한 적대감이 잘못됐다는 말을 하는 것도 소용 없었다. 하지만 그런 비뚤어진 세상이 결국 무너지면서, 조조에게는 한 단계 성장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2020년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는 과연 그런 '놀라운' 기회가 주어지기는 할까? 영화 속 조조가 겪어야 했던 고난을 가볍게 여기는 것이 아니다. 그가 잘못된 신념을 깨닫고 성장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는 것이 부러울 뿐이다.

오늘 소개할 책은 '성매매에서 빠져나온 여성의 수기'인 <페이드 포>이다. 아일랜드 더블린의 가난하고 불우한 집에서 태어난 저자는 부모를 어린 나이에 잃고 난 후, 노숙 생활을 전전하다가 열다섯 살에 성매매의 세계로 들어간다. 그녀를 성매매로 이끈 것은 당시 그녀의 남자친구였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따듯한 잠자리와 먹을 것이었기에 그녀도 거부할 수 없었다.

소년의 성장담에서 시작한 이야기가 왜 갑자기 성매매 여성의 수기로 넘어갔는지 궁금할 수 있겠다. 하지만, 이 책을 읽는 동안 영화 속 조조가 얻은 그 가능성과 기회가 자꾸만 생각났고, 질문 하나가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성매매가 없던 세상을 살아본 적이 없다면, 성매매를 없앨 수 있다는 생각을 할 수 있을까?' 

성매매를 '선택했다'는 표현이 성립될 수 없는 이유
 
 <페이드 포> 앞표지
 <페이드 포> 앞표지
ⓒ 안홍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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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서 성매매는 엄연히 불법이지만, 현실에서는 '범죄'라는 인식이 다소 부족한 분위기다. 나 역시 여자로 살아오면서도 성매매 등 성범죄에 관해 분명한 문제의식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여성의 성이 착취되고, 산업적으로 이용되며, 학대가 증폭되는 악순환을 막을 순 없는 걸까. 이런 질문을 던질 때마다 세상은 내게 '현실적으로 그게 가능하냐? 불가능한 일로 너무 애쓰지 마'라고 말하는 듯했다.

한 번도 기대한 적이 없는 세상에 대한 이야기는 막막할 수밖에 없다. '히틀러의 세상'에 사는 열 살 조조에게 유대인 머리에 뿔이 없다는 것을 가르쳐주는 일이 쉽지 않았듯 말이다. 하물며, 여성의 성을 사고파는 것이 남성들의 어쩔 수 없는 '본능'의 영역이라고 믿는 세상에서 그것이 없는 사회를 얘기하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그저, 성매매가 음지에 존재함을 인정한 상태에서 피해를 최소화하는 방향으로만 고민했던 것 같다. 가장 위험하고 취약한 환경에 놓인 영역이므로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에만 매달렸던 모양이다.

그런데 <페이드 포>의 저자는 주장한다. 이런 논의로는 이들의 위험을 해결할 수 없다고. '성매매가 없는 세상'이라는 근본적인 접근 없이는 결코 풀 수 없는 문제라는 것이다.  
 
사회적으로 더 권력 있는 남성들에 의해 착취당하는 현실은 줄곧 수그러들지 않았고, 도망칠 수 없었기에 우리에게 실질적 혜택이 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 착취를 경제적인 이유로 '선택했다'라고 표현하는 일이었다.

성매매를 '성적 자기 결정권'으로 표현하려는 시도가 뒷받침될 수 없는 이유는 우리가 성적인 이유가 아닌 경제적인 이유로 결정을 내렸기 때문이다. 성적인 요소는 즐길 수 없었고 견뎌야 했는데 우리가 진정으로 자기 결정권을 행사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더라면 업주에게는 빈 업소가, 성구매자들에겐 빈 필름이 남았을 테다.

카메라 반대편에 서봤기에, 솔직히 말해 포르노를 보는 습관이 있는 사람과는 관계를 맺고 싶지도 않고, 맺을 수도 없다. 포르노를 불쾌하다고 생각하는 여성이 있다면 그렇지 않다고 설득하려는 어느 누구도 용납하지 말라고 충고해 주고 싶다.

인간 됨을 지키는 일은 때때로 무엇을 수용할지에 대한 경계를 세우는 일을 필요로 한다. 나는 스트립과 포르노가 초래하는 폐해와 수모를 겪었다. 무해한 산업이 아니다. 구별 지을 수 있는 산업도 아니다. 성매매라는 거대한 기계의 부속품들이다. 이 체제는 그 정점과 핵심 모두에 상품화를 배치함으로써 여성의 가치를 적극적으로 저하시킨다. (본문 127~128쪽)

저자가 언급한 '포르노 산업' 관련 설명을 읽으며 '텔레그램 n번방 성착취 사건'이 발생할 수밖에 없는 현실을 이해하게 했다. 여성의 성을 '사고팔 수 있는 것'이라 인식하는 세상에선, 성에 대한 어떠한 방식의 욕구도 시장의 수요가 된다. 결국, 수요는 돈을 끌어들이고, 덩치가 커진 산업은 위험한 욕망, 악랄한 성착취와 범죄로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절대 깰 수 없는 악순환이다.

이런 분노와 두려움은 결코 처음이 아니다

나는 언론 보도가 나오기 전까지 성착취물을 공유하는 이른바 '텔레그램 n번방'의 존재를 인지하지 못했다. 그들의 입에 담을 수 없는 끔찍한 악행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런 분노와 두려움은 결코 처음이 아니다. 

2018년에 세상을 시끄럽게 했던 '웹하드 불법 동영상 카르텔'의 중심에 있던 양진호는 합법적인 사업체를 운영하고 있었고, 그 이전에는 '소라넷'이라는 음란물 사이트를 폐쇄하기 위해 국민적인 관심과 분노를 모아야만 했다.

물론 이들 사건 이전에도 다양한 방식의 소아 성폭행·성폭력 사건이나 청소년 성매매·성착취 사건이 있었지만 사회가 비슷하게 반응했음은 물론이다. 세상이 떠들썩하게 분노를 불러일으키던 사건들이 반복됐음에도, 하나를 힘들게 해결하고 나면 다른 곳에서 더 위험한 모습으로 '반드시' 되살아나고야 말았다.

결국, 그들을 잡아넣는 것으로 해결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말이다. 성에 관해 '사고팔 수 있는 것' 혹은 '돈이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근본적인 문제 자체를 바꿔야 한다.   
 
성매매 합법화를 관철하려는 성매매 옹호론자들은 전략적으로 성매매 경험 자체를 인권이나 시민권으로 포장하려고 하는데, 예상대로 인권과 시민권을 부인하는 행위는 전 세계적으로 극히 꺼려지는 행위이기에 성매매 옹호론자들이 계속해서 주장하며, 단단히 붙잡고 놓지 않을 전략이다. 당혹스러울 정도로 부적절함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325쪽)

성매매의 역사를 되짚어가다 보면, 많은 현대 민주주의 국가에서 '성매매 합법화'의 방식으로 성범죄 등의 문제를 해결해 보려 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시도는 대부분 실패했다. 성매매 노동자들이 당하는 차별과 학대가 용인될 수밖에 없는 제도의 근본적 모순 때문이다. 사회 구성원의 인권과 기본권을 중시하는 국가일수록 그 '불평등한 자유'를 설명해내지 못했다. 

결국, 성에 대한 문제는 '현실적'인 타협안으로는 해결할 수 없다는 얘기다. 이는 인류가 겪어온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소라넷에서 양진호로, '텔레그램 n번방'으로 잔혹하게 이어지는 한국 사회의 분노 또한 충분한 증거가 된다. 우리는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스웨덴에서는 여성과 소녀들을 위한 법적,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평등의 원리들을 견지하길 요구하는 사회라면 여성과 어린이, 그중 대부분인 소녀들이 사고 팔리며, 남성에 의해 성적으로 착취될 수 있는 상품이라는 생각을 거부해야 한다고 여겨진다. 그렇지 않으면 인간 존재 중에서도 구별된 계층으로서의 여성, 특히 경제적, 인종적으로 주변화된 여성과 소녀들이 이러한 장치들 그리고 지난 50년 동안 발전해온 국제 인권 조약들에 명시된 보편적 인권 존엄성 보호에서도 마찬가지로 제외됨을 용인하게 된다. - 구닐라 에크버그, '성매매를 금지하는 스웨덴 법' (본문 315쪽)

책에서 소개한 구닐라 에크버그는 스웨덴의 여성 인신매매 반대 운동을 이끈 인물이다. 그의 선언문을 읽으니 복잡했던 생각이 정리됐다. '성은 돈으로 살 수 없다'라는 명제는 인간 금욕에 관한 가치 선언이 아니라, 현대 민주주의가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인권'에 관한 이야기라는 것을 말이다.

성매매를 완벽하게 반대하는 세상

'값을 매겨 팔고 팔리는 성'을 암묵적으로 인정하는 한, 우리는 민주주의가 가장 기본적으로 추구해야 하는 평등과 인간 존엄의 가치와 계속 충돌할 수밖에 없다. 성매매 등 성범죄는 인권을 무시한 채 사람을 대상화할 뿐 아니라, '대가'를 이유로 사람에게 가하는 폭력과 착취를 당연시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문제의 해결은 '성은 값을 매겨 살 수 없는 것'이라는 전제에서 출발해야만 한다. 사회가 성매매의 불법성에 완전히 동의해야 함은 물론이고, '남성의 본능'이라는 궤변을 펼치며 암묵적으로 용인해온 사회 분위기를 타파해야 한다. 물론, 그에 동반되는 강력한 법적 처벌이 수반해야 함은 물론이다.
 
성매매 여성의 존재가 남성들이 지니는 성적인 공격성을 막는 안전밸브라서 다른 여성들을 보호한다는 주장이 있다. 이 주장은 사실이 아닐 뿐만 아니라 성폭력 없이 살아야 하는 모든 여성의 권리를 무시한다. 성매매를 정기적으로 하는 남성들은 관계를 맺고 있는 여성을 자주 더 폭력적으로 대하는 경향이 있다는 연구 결과들이 있다. 성매매 여성들을 이용하는 남성들은 여성들을 존중하는 남성들이 아니다. - 수전 맥케이아일랜드 여성연합 전 대표 (본문 341쪽)

여성들이 끔찍한 인권유린과 성범죄 사건에 끊임없이 노출되고 있다. 2020년 현재 우리는 '텔레그램 n번방'이라는 성범죄 사건에 분노하고 있다. 내년 이맘때엔 또 어떤 잔인한 폭력 앞에서 분노하지 않을 것이라 장담할 수 있는가?

그러니 우리, '완전하게 새로운 세상'을 상상해 보자. 순진한 이상주의라고 비웃어도 좋다. '성매매를 완벽하게 반대하는 세상'을 선언하지 않는다면, 문제는 계속 반복될 수밖에 없다.

페이드 포 - 성매매를 지나온 나의 여정

레이첼 모랜 (지은이), 안서진 (옮긴이), 안홍사(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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