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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장으로 걸어볼래

다리가 많다고 신발이 많다고
너에게 갈 수 있는 건 아니지

수백 개의 다리를 가진 다족류
밀리페드라고 한들 다를 건 없지

시험에도 나오지 않는
너라는 책을 읽다가 알았지
말로도 발로도 다 할 수 없는 사랑이 있고
이별이 있다는 걸

그러니까 모든 연애는 주관식
뒤에서부터 읽어야 하는 책도 있지
그래서 그래

오늘부턴 좀 멋지게 걸어 볼래
난 이미 너에게 도착했으니까

심장으로 걸어 볼래.


김륭 시인의 첫 청소년시집 <사랑이 으르렁>(창비교육)에 실린 시다. '사랑'이라는 감정에 눈을 뜨기 시작한 청소년들의 일상과 심리를 섬세한 필치로 담아낸 시 65편이 실려 있다.
  
김륭 시인이 펴낸 청소년시집 <사랑이 으르렁>.
 김륭 시인이 펴낸 청소년시집 <사랑이 으르렁>.
ⓒ 윤성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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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한테 "마음껏 사랑하고 연애하라"고 한다. 시집에 실린 거의 모든 시에서 '사랑'이라는 시어가 나타날 만큼 줄곧 사랑에 대해 말한다. 시인은 "사랑은 오로지 '심장'으로 다가가는 길"이라고 한다.

"글을 쓰는 게 아니라 우는 것이라고 써놓고/진짜 운다, 반성문은 그래야 한다, 몸이 아니라/마음으로 울다 보면, 나도 머리는 좀/돌아간다는 생각이 들고 그렇다면 시인이/뭐 별거냐, 하고 이렇게도 쓴다//글은 쓰는 것이 아니라 쏘는 것이다//연애편지는 그래야 한다. 이럴 때는 내 인생도 좀/멋지다는 생각이 든다 … 나의 반성문은 내가 나에게 쓰는/연애편지."(시 "반성문과 연애편지" 부분).

학교 다닐 때 많이 써 봤을 것 같은 '반성문'과 '연애편지'를 연결지어 놓았다. 어떻게 두 글을 연결 지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나의 반성문은 내가 나에게 쓰는 연애편지'라고 하니 당연하게 느껴진다.

'19금'을 소재로 쓴 시도 있다. 제목을 보는 순간 살짝 심장 박동수가 빨라질 것 같았는데, 시에서 "태어날 때부터 19금이니까"라고 하니 '별거 아니네'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살짝 뽀뽀는 되지만/키스는 안 돼/하나가 되는 건 좋은데/그건 하나가 녹는 거야/하나가 녹으면 하나도 따라/녹아야 진짜 하나야/그렇게 녹아 없어지는 거야 …."(시 "19금" 부분).

"사랑이 으르렁"이란 제목의 시는 3편이다. '으르렁'은 싸움이 연상되는데, '사랑'을 붙여 놓으니 '사랑 싸움'이라고 해도 될까. 시를 읽으니 교실에서, 심지어 여학생들이 '으르렁'대는 것도 다 사랑스럽게 여겨진다.

"… 고2가 되자 교실마다 으르렁으르렁/서로 잡아먹지 못해 안다린 몇 마리가/꼭 있다//호랑이도 아니면서 으르렁, 사슴이나 기린 같던/여학생들마저 으르렁, 한다//…//으르렁, 사랑하고 싶은 것이다. 으르렁!/사랑 받고 싶은 것이다 …."(시 "사랑이 어르렁2" 부분).

김륭 시인은 "가끔씩 내 안에서 나를 찾아볼 때가 있다. 그렇게 찾은 나를 물끄러미 내가 아닌 듯 바라볼 때가 있다. 으르렁, 울어 주고 싶을 때가 있다. 나는 나였을까? 하루도 빠짐없이 으르렁거리는 내 울음은 몇 살일까? 청소년시를 쓰면서 내 인생에 없는 단어를 찾아보았다. 나는 왜 '아름다움'이란 단어 하나를 가지지 못했을까? 지난 사랑은 물론 내가 쓰는 시마저 그랬다"고 했다.

그는 "있는 이야기를 없는 이야기로 혹은 없는 이야기를 있는 이야기로, 가만히 울어 주고 싶었다. 사랑이 울면 시가 되는 거라고 믿고 싶었다. 많이 늦었지만 아름다움이란 단어 하나쯤은 갖고 싶었다. '실패한 성공'보다 '성공한 실패'를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래야만 으르렁, 조금이라도 더 멋지게 울 수 있을 거라고, 나는 나를 세상보다 먼저 믿어 주고 싶었다"고 했다.

김륭 시인은 상투적인 문법과 관습적인 상상력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동시 세계를 펼쳐 오고 있다. 김륭 시인은 2007년 <문화일보> 신춘문예에 시와 <강원일보> 신춘문예에 동시가 당선되어 문단에 나왔다.
  
김륭 시인.
 김륭 시인.
ⓒ 김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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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시인은 시집 <살구나무에 살구 비누 열리고> <원숭이의 원숭이>, 동시집 <프라이팬을 타고 가는 도둑고양이> <엄마의 법칙> <첫사랑은 선생님도 일 학년> 등을 펴냈고, '문학동네 동시문학상' 대상과 지리산문학상 등을 받았다.

김륭 시인은 오는 7일 오후 3시 30분 창원 중앙평생학습센터에서 "선율로 읽는 김륭의 시" 행사를 연다. 이영령 소프라노, 이수영 피아니스트, 설진환 작곡가, 조승완 바리톤, 이안‧송선미 시인 등이 무대에 오른다.

달걀2

사람도 깨진다 달걀보다 쉽게

사랑 때문이다 으르렁, 소리만 내도
깨진다

조마조마 시험 전날 밤, 라면을 끓일 때도
조심해야 한다 냉장고 문을 열면
달걀이 으르렁, 한다

세상은 책에서 배운 대로
돌아가지 않는다

달걀 하나라고 우습게 보지 마라
병아리가 아니라 호랑이가
나올 수도 있다

으르렁, 고백하러
너에게 간다

태그:#김륭 시인, #사랑이 으르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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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부산경남 취재를 맡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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